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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범 한국침례신학대 신학과 교수
한국교회의 딜레마 중 하나는 거짓말이다.하얀 거짓말에서부터 새빨간 거짓말까지 거짓말의 종류는 다양하다.
청문회에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는 거짓말이 있고,망각이나 기억의 차질로 인해 단수 실수로 자신도 모르는 거짓말도 있다.흑백논리의 모순에 빠지면 선한 사람도 범죄자로 만들고 흉악범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 있다.검사는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을 유도해 사건의 진실을 확인함으로 유죄를 선언한다.
반면에 변호사는 “예” 또는 “아니오”로 대답을 유도해 무죄를 변호한다.그래서 법정에서 “예”라고 대답하면 “유죄”가 되기 쉽고 “아니요”라고 약간 거짓말 섞긴 대답을 하면 무죄가 되기에,카스토르피고인 입장이 되면 “아니요”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왜냐하면 “침묵”도 사람들에게는 죄를 인정하는 “예”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깊은 우물 속 같아 헤아릴 수 없다는데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본성을 꿰뚫어 보셨나 보다.요즘도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이 많다.강아지보다 아니 금수보다 못한 인간도 있다.양의 탈을 벗기면 더 흰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난다.탈이 완전히 벗겨져서 흉악한 모습이 드러났는데,회개와 눈물 뒤로 숨어 잠시 묻혀 있다가 더 큰 양의 탈을 쓰고 부활한다.그래서 양의 탈을 쓴 사람이 교회와 대학의 수장 행세를 하고,한 나라의 정치인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그래서인지 오늘날 목사의 위상이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내가 신학교에 입학할 때는 이발사 다음에 목사라는 말을 들었다.그래도 그때 목사는 도덕적으로 성직자라는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오늘에 와서‘나는 아모스 선지자처럼,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말씀만 선포한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목사가 몇 명이나 될까?이사야 시대 이사야 한 명이 아닌 7천 명의 남은 자가 있던 것처럼 어둠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진주 같은 목사가 많았으면 한다.
예전에는 교인들이 사악한 이리로 성도의 영혼을 약탈하는 목사의 얼굴에 양(목자)의 탈을 씌워서라도 교회를 보호하려고 했다.“쉬쉬”해서라도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조금은 있었다.그런데 요즘은 뒷북을 치듯 갑자기 달려들어 순진한 담임목사에게 이리의 탈을 씌워 매장하는 목사들과 교인들이 있는 것 같다.
요즘 선한 목자에게 이리 탈을 씌워 쫓아내는 교회도 있다.교인 수의 정체도 헌금의 부진도,더 큰 교회 건물을 짓지 못하는 이유도 다 목사 탓으로 돌린다.목회해 본 사람만이 묻지 않아도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해오는 진실의 소리가 있다.목사의 죄는 계수할수록 많아진다.
아프리카 선교지에 방문하고 왔던 한 분에게 한 선교사의 생활에 대해 분노에 찬 말을 했다.선교사님이 아프리카 빈궁한 지역에서 식모를 둘이나 두고 호화스럽게 산다는 것이었다.나는 그 선교사님이 너무 잘못했다고 생각했다.그 후에 한 선교사님이 말은 전혀 달랐다.극빈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공돈을 주는 것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거지 근성을 심어질 수 있다는 우려로 약간의 일거리를 주고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식모도 두고 일꾼도 둔다는 것이었다.
신학교 학창 시절에 설교 못 해서 쫓겨나는 목사는 없다는 말을 들었다.그러나 이제 설교 못 해도 쫓겨나는 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아인사이드 목사는 한 교회에서 같은 본문으로 똑같은 설교를 한 달 이상 했다고 한다.그 이유는 같은 설교를 해도,성도들의 생각과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나는 이 교회 저 교회에서 한 본문으로 여러 번 하기도 했다.한 설교에서 같은 성경 말씀을 여러 번 인용했다.그래도 늘 새로운 말씀에 은혜받았다고 해준 아내가 고맙다.나는 젊었을 때 한번 말한 내용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그러나 내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의 설교에 배운 것은 “반복”의 힘이었다.유창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보다 오히려 “반복”하여 말하는 사람이 마음에 새겨주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의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했던 것은 기득권과 충돌하는 예수의 신학(천국 복음의 본질) 때문이었다.그러나 그들의 눈에 보인 것은 현실 정치(경제적 기득권)이었다.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정치적 살인에는 고도의 신학적 계산이 숨어 있었다.돌로 쳐서 죽이는 유대 전통과 관습 대신 선택한 십자가 처형법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인간”이란 낙인을 찍기에 너무나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 웅장한 신학적 계산과 정치적 적용을 맞물리게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발생한 사건에 “거짓말”을 섞는 여론조작이 필요했다.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말했던 책임자들은 다 뒤로 물러나,군중의 결정에 우리도 존중한다는 성명서를 낼 수 있었다.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십자가에 못 박아라”라는 군중의 거대 목소리만 남게 되었다.결국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의 힘이 예수라 불렀던 메시아를 죽였다.
십자가의 억울한 죽음에도 침묵하셨던 예수님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26)는 말씀하셨다.왜 이런 말씀하셨을까?뱀이 얼마나 지혜롭기에,카스토르예수 제자들도 뱀의 지혜를 배워야 하는가?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은 거짓말 공장이다.뱀처럼 진실(사건)에 거짓을 섞어 사실인 양 소문 내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있다.예전에 뱀이 에덴동산에서 그랬던 것처럼,그런 방법으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아담과 하와의 작은 잘못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야만 할 만큼 큰 죄였다.또한 거짓말하는 것은 지옥의 유황불 못에 던져질 만큼 큰 죄이다(계 21:8).왜 거짓말하는 것이 새 예루살렘 밖으로 추방되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되는 대형 죄가 되는가?그리스도인은 순교를 각오하고 예수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법적 증인이다.
만약에 그리스도인이 거짓말을 하면,그가 전하는 예수 복음마저도 거짓말로 여겨 믿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예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 14:5)라는 평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유창한 거짓말과 진실한 말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을 설정한다.거짓말하는 무리는 교회 밖으로 추방하는 회개의 때가 왔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계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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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토르 - 2024년 실시간 업데이트:또한 미래전략에서 직접 개발한 ‘시황 분석 툴(Tool)’도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카스토르,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내달 7일 예정된 바이든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마지막 국정 연설 이전에 주요 지원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