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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23분 서울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개최된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탕' 하는 첫 총성 후 연이어 5발의 총성이 울려 아수라장이 되었다.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읽던 중 객석에 앉아 있던 재일 조총련계 한인 문세광(당시 22세)이 연단으로 달려가며 권총을 발사했다.박 대통령은 방탄 연설대 뒤로 몸을 피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연단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가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병원에 이송되어 수술 중 사망했다.바로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한화경기결과또는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1976년 9월 거문도에서 동료 남파 간첩들을 사살하고 귀순한 간첩 김용규(본지 2813호 '시효인간 김용규의 대남 침투공작' 참조)는 이후 조사 과정에서 중요한 증언들을 했다.그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1974년 8월 15일 당일 북한의 대남공작지도부는 서로 다른 2건의 박 대통령 암살사건 공작을 진행했다.해당 공작조도 서로 전혀 모르는 공작이었다.박 대통령 암살공작을 복선(複線)으로 포치한 것이다.1안은 8·15 행사장에서의 암살공작이었고 2안은 당일 저녁 경회루(경복궁 소재)에서 열릴 광복절 리셉션을 노린 폭파 암살공작이었다.당일 재일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한화경기결과북한 조종 친북교포단체)계 한인 문세광이 행사장까지 무사히 들어가 저격을 시도했으나 박 대통령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경회루 연회가 취소되자 당연히 2안인 경회루 폭파 공작도 중지되었다.만약 문세광이 행사장 침투에 실패해 저격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예정대로 당일 저녁 경회루 경축 리셉션이 열렸을 것이고 끔직한 대형 폭파 참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북한이 개발한 원격 라디오폭탄
1974년 2월 초 평양 중화 초대소(대남공작원 수용시설)에 당 연락부 25과(서울담당 지도과) 과장 박종수가 4명의 폭파훈련 전담교관을 데리고 왔다.박 과장은 '중앙당 지시로 오늘부터 중화초대소 공작원들에게 새로 개발된 라디오 폭파훈련을 실시한다'고 하달했다.원격조종에 의한 라디오폭탄 폭파훈련이었다.
먼저 폭파 대상물에 폭약을 작약(炸藥)하고 특수제작 초단파 수신기를 전기뇌관에 연결해 안테나를 장착한 후 4㎞
이내 지점에서 전원을 넣고 송신기를 작동시켜 대상물을 폭파시키는 것이었다.다음 날부터 라디오폭탄의 폭파원리,한화경기결과작동법,폭파대상물에 대한 작약 계산법,폭파위치 선정요령 등 실습훈련이 반복되었다.이 훈련의 목적은 남한 요인 암살과 주요 시설의 폭파였다.
공작원 김용규는 연일 계속되는 이 폭파훈련 중 대남비서 겸 연락부장인 김중린의 호출을 받았다.이 자리에는 연락부 제1부부장 이완기(후에 대외정보조사부장)와 25과장 등이 배석했다.김중린 부장은 김용규에게 "남한에 살 때 경회루에 가본 적이 있냐"고 물으며 향후 경회루가 조국통일의 대사변(적화통일 큰 전환점)을 열 수 있다고 강조했다.매년 8월 15일 저녁 경회루에서 광복절 경축연회가 열리는데 여기에 박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주요 요인이 참석하니 올해(1974년) 라디오폭탄을 설치해 모두 날려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김용규는 공작조장으로 경회루 폭파공작 계획을 수립하고 모의 실습훈련을 계속했다.한강침투로를 통해 서울에 잠입하여 경회루에 80㎏의 폭약을 작약하고 1.5㎞ 떨어진 전 국민대학 옥상에서 원격조종하기로 했다.8·15 경축 리셉션 전부터 경계가 강화될 것을 예상해 행사 10~15일 전에 폭약을 장착하기로 세부 계획을 세우고 도상훈련을 반복했다.특히 경회루 폭파 외에도 2~3개의 공작조를 투입해 다른 대상에 대한 폭파공격을 준비시켰다.
그런데 돌연 경회루 공작을 다른 공작조에 맡기고 김용규 공작조는 다른 특수 임무에 투입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북한은 경회루 공작도 복선으로 포치하고 또 다른 공작조에게 훈련을 시켜왔던 것이다.김용규로서는 그동안의 지속된 훈련이 무위로 돌아가 난감한 상황이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1974년 8월 13일 밤 12시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국내 암약 간첩들에게 이른바 A3방송지령(난수방송)을 하달했다."8·15 광복절 행사와 관련 중앙청 주변에 접근하지 말고 48시간 무휴 상태로 다음 지시를 기다릴 것.건투를 바람"이라는 비상 전문을 받았다.바로 경회루 공작을 염두에 든 지령이었다.김용규의 증언에 의하면 문세광의 저격미수가 결과적으로 더 큰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셈이다.이후부터 경회루 광복절 연회는 열리지 않았다.
퇴임한 이후락 중정부장 납치공작
경회루 공작에서 빠지고 김용규 공작원에게 새로 부여된 특수 임무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납치공작이었다.1974년 4월 3일 김용규가 당 연락부 중화초대소(5호)에서 라디오폭탄 폭파 훈련을 받고 있던 중 연락부 제1부부장 이완기의 호출로 중화초대소(2호)로 갑자기 불려갔다.여기에는 김상호 부부장,한화경기결과25과장 등이 배석했는데,당 중앙의 지시라며 이후락의 납치를 지시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등으로 1973년 12월 중앙정보부장(현 국정원장)에서 퇴임한 이후락 전 부장은 당시 해외에 나갔다가 귀국한 후 경상남도 충무시 소재 충무호텔 2층 특실에서 장기 휴양하고 있는데 그를 납치해오라는 것이었다.당 대남공작지도부는 연락부의 정예공작원 3명(김용규,황영철,강형수)과 또 다른 대남간첩부서인 작전부 소속 정예전투원 27명 등 총 30명으로 특수공작대를 편성했다.공작대장은 김용규였다.특수공작대를 지원할 별도의 인민무력부(현 북 국방성) 결사대도 조직되었다.
김용규 지도하에 전술계획도 수립되었다.작전배치는 엄호조(2),봉쇄조(2),차단조,행동조 등 6개조로 편성하고 무장장비는 무성권총,한화경기결과기관총,한화경기결과독침,단도,수류탄,마취제,드릴,라디오폭탄 등으로 무장했다.수차례의 반복훈련 끝에 최종 납치훈련에 들어갔다.평남 나포시 와우도 휴양소를 충무호텔로 가상하고 실전훈련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드디어 공작선 두 척에 분승한 공작원들은 중국 양쯔강 하구 중간 거점에 도착했다.북한은 해상침투를 할 때 아군과 미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어선으로 가장하는 수법을 자주 썼다.김용규 일당도 바로 남측으로 오지 않고 중국 양쯔강 쪽으로 항해하여 거기서 급유와 물품을 보급하고 대기하다 공해상으로 서해를 경유하여 남해 쪽으로 내려와 공작대상지인 충무에 침투할 계획이었다.그런데 중국 양쯔강 하구에서 대기 중 '작전중지·즉시 복귀' 명령이 하달되었다.납치대상인 이후락 전 부장이 휴양을 마치고 충무호텔을 떠났다는 것이었다.혹독한 훈련을 마치고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복귀하라는 명령에 공작대원들을 허탈해 했으나 다음을 기약하며 작전은 종료되었다.
이 두 건의 공작 중단 사례에서는 북한의 대남정보역량의 탁월함(?)이 확인된다.또한 단일 대상공작도 2선,3선으로 복선 포치하여 구사하는 정교성을 보여준다.이후 북한은 판문점 도끼살인(1976),미 정찰기 SR 71기 미사일 공격(1981),미얀마 아웅산폭탄 사건(1983),김포공항 폭탄테러(1986),KAL 858기 폭파(1987),강릉침투 잠수함사건(1996),이한영 암살(1997),천안함피격사건(2010),연평도 포격도발(2010),사이버테러(2013) 등에서 보듯 전조선혁명(전 한반도의 공산화) 완수를 위한 대남테러공작을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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