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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3808억원이라는 역대 최고 재산분할액이 나왔다.항소심 재판부에서는‘노태우 비자금 300억원’이 SK 전신 그룹에 유입됐다는 판단하에 노소영 관장의 재산 형성 기여도를 인정했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이혼의 가격이 나왔다.1조3808억원.5월30일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판사 김시철)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최 회장(원고)이 노 관장(피고)에게 재산 총액 4조115억여 원의 35%인 1조3808억여 원을 지불하라고 판결했다.2심 재판부는 “사건을 배당받고 1년 3개월 동안 (1심보다 네 배 많은) 3만7000여 쪽의 자료를 검토”하고 28차례나 석명(심리 과정에서 사실적·법률적 사항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는 것)을 진행한 결과,1심에서 나온 재산분할액과 위자료의 20배에 달하는 금액을‘이혼의 가격’으로 결정했다.2022년 12월6일 1심 재판부는‘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위자료 1억원과 재산분할액 665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번 항소심 재판에서 쟁점이 된 것은‘위자료’와‘재산분할’두 가지다.먼저 유례없는 이혼 위자료 금액이 화제가 됐다‘김시철 부장판사다운’파격적 결정이라는 평가와 함께 현행 민형사 사건 위자료의 적정성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한편으로는 일부일처제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게 평가한 근거인‘유책주의’의 한계를 살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시철 부장판사는 이번 항소심‘최대의 변수’로 꼽혔다.김 부장판사는 과거 이혼소송에서도 종전 판결들과 다른 판단을 내려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6월,이혼 유책배우자에게 위자료 2억원 지급 명령을 내린 판결이다.당시까지의 역대 최고액이었다.이전까지 대부분의 판결에서 유책배우자가 내야 할 위자료는 3000만원 내외로 책정돼왔다.특유재산(부부의 일방이 혼인 전 갖고 있었던 재산과 혼인 중 자기 명의로 취득한 재산)과 관련해 여성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판결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보여왔다.
지난해 11월에는 부부 중 한 사람이 혼인 기간 중 단독 명의로 취득한 주식 등 재산의 형성 및 유지에 상대 배우자가 기여했다면 재산분할 대상으로 삼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단을 내렸다.최 회장과 노 관장의 항소심에도 그대로 적용된 논리다.그런 만큼 1심보다 위자료가 높게 책정될 것이란 예상이 중론이었다.예측대로 항소심 재판부는 노 관장의 정신적 고통과 최 회장이‘일부일처제를 존중하지 않은’정황을 세세히 언급했고 역대 최고 수준인 위자료 20억원을 결정했다.
■ 다른 이혼소송에도 영향 끼칠까?
조인섭 가사소송 전문 변호사(법무법인 신세계로)는 “가사사건에서 위자료 금액은 철저히 판사의 재량에 달려 있지만,지 피티 퐁퐁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은 상징성이 있다”라고 말했다.하지만 “이번 한 번의 계기만으로 가사소송 위자료가 전체적으로 상향할 거라 판단하기는 섣부르다”고 덧붙였다.
지금까지 이혼소송에서는 유책배우자의 재산 규모와 상관없이 대개 수천만 원 규모의 위자료 금액이 책정돼왔다.간통죄가 존재하던 시절에는 형사처벌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감안해 위자료 액수가 낮게 형성되었다.하지만 간통죄가 폐지된 이후에도 과거의 관행이 그대로 이어져왔다.이번에 나온 고액의 위자료는 그런 법적 공백을 메우고‘징벌적 손해배상’의 성격을 반영했다.
하지만 여타 민형사 소송의 위자료 금액과의 균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조인섭 변호사는 “교통사고 등으로 피해자가 사망해도 위자료는 대개 1억원 이상 책정되지 않는다.성폭력 사건도 3000만~5000만원 수준이다.다른 사건의 위자료 수준은 그대로 둔 채,이혼에 따른‘고통’만 높게 인정해 위자료를 높이는 판결이 지속적으로 나오리라 예상하기는 어렵다”라고 말했다.
한국은 민형사 소송 위자료 금액이 미국이나 유럽 등과 견주면 낮은 편에 속한다.이동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위자료 산정의 적정성에 관한 사법정책연구(2013)’에서는 국가별 사지마비 위자료를 비교했다.한국에 비해 프랑스는 1.7배,영국은 3배,독일은 4.7배,미국은 37배 높다.한국에서는 위자료가 제재적 성격을 거의 갖지 못한다고 평가받는다.언젠가는 공론장에서 논의해야 할‘위자료 적정성’문제가 이번 최태원-노소영 판결로 앞당겨질 수도 있다.
■‘보통의 이혼소송’처럼 대하자면
한편 이번 항소심 판결에서 일부일처제 존중을 강조하며 위자료를 높게 책정한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유책주의 원칙이 강하게 적용됐다는 우려다.이혼 청구 자격은 크게 유책주의와 파탄주의로 나뉜다.유책주의에 따르면 혼인 생활의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유책배우자는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한국은 1965년 처음으로 유책주의를 채택한 이후 지금까지 이를 따르고 있는데,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다.
한 법조 관계자는 “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일정 기간 이상 별거를 지속하는 등 혼인 관계가 회복될 수 없을 만큼 파탄 난 상황이 명백하다면 책임을 따지지 않고 쌍방 모두 이혼을 신청할 수 있게 하는 파탄주의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이번 항소심 판결이 부부간의‘헤어질 결심’을 경직된 제도 안에 편입시키는 효과를 낳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라고 말했다.이혼소송도 유책주의를 넘어 부부관계의‘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하는‘파탄주의’로 나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물론 한국 사법부에도 변화의 조짐은 있다.2015년 대법원에서는 유책주의가 “이혼을 둘러싼 갈등 해소에 적절하고,합리적인 해결 방안이라고 보기 어렵다”라는 파탄주의 허용 취지의 소수의견(6인)이 나오기도 했다.
다른 해석도 있다.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법조인은 이번 판결이 사법부의 그러한‘새로운’흐름을 거스른 것이 아니라고 해석했다.항소심 재판부가 일부일처제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지만,동시에‘파탄주의’적 성격을 반영하기도 했다는 것이다.유책 여부와 상관없이‘제대로’이혼을 하기 위해서는 부부가 공동으로 이룬 경제적·사회적 자원에 대한 공정하고 공평한 분할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특히 대기업 재벌가처럼 재산 규모가 클수록 오히려 상대 배우자의 기여도가 낮게 책정되는 모순이 지금까지 이어져왔고,이번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메시지’를 판결로 드러냈다고 분석했다.즉,이번‘세기의 이혼소송’을 부부 쌍방의 기여를 50대 50으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보통의 이혼소송’처럼 대했다는 것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최 회장이‘특유재산’이라고 주장해온 SK㈜ 주식을 재산분할 대상으로 삼고,재산 취득 과정에서의 불법성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 역시 일반적인 이혼소송이었다면‘이례적이지 않은’판결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먼저,혼인관계를 일정 기간 지속했을 경우 특유재산 역시 부부 공동재산으로 판단해 분할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시사IN〉 제848호‘그녀가 쏘아 올린‘이혼의 가격’논쟁’기사 참조).가정법원 부장판사 출신인 윤지상 변호사(법무법인 존재)는 “재산 규모가 큰 기업 경영인의 경우 오히려 판사들 사이에 심리적 저항이 있어서‘보편적 이혼소송’과 다르게 재산분할에서 주식을 포함시키지 않아왔다”라며 관행적으로‘차별’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사법부가 고액의 재산분할 판결로 기업 경영권을 흔든다’는 비난 역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했다.경영권의 핵심은‘주식’이다.이혼소송의 경우,쌍방이 합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주식분할 형태가 아니라 그 가치만큼의 금전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분할해왔다.대기업 경영인의 재산분할액 및 위자료 금액이 명확하게 알려진 경우는 많지 않지만,이혼소송에서 상대 배우자에게 기업의 주식 지분 일부를 지급한 2004년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의 사례가 있다.김 대표는 회사 지분 1.76%(35만6461주,지 피티 퐁퐁당시 300억원 상당)를 배우자에게 넘겨줬는데 이는 매우 예외적인 케이스다.
그 외에 재산분할 금액이 공개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지 피티 퐁퐁조승연(개명 전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지 피티 퐁퐁고 강신호 전 동아제약 회장 등의 경우 모두 주식은 분할 대상이 되지 않았다.노 관장 역시 1심에서는 재산분할로 최 회장이 보유한 SK㈜ 주식 가운데 절반을 지급하라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2심에서는 주식이 아닌 현금 지급을 요구했다.
윤지상 변호사는 “가사사건을 담당하는 법원은 무엇이 부부의 공동재산인지 구분하고,기여도를 반영해 합당한 분할 비율을 법리적으로 판단한다.사법부가 판단하는 것은 거기까지다.이때 유책배우자가 소유한 기업의‘미래’는 가사 법원이 고려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그것은 철저히 당사자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 재산분할에도‘독수독과’적용해야 할까
또한 전통적으로 가사소송에서는 재산을 취득하는 데 불법성이 있었는지 여부 역시 판단하지 않아왔다.예컨대 부부 중 한 명이 상속세나 증여세를 내지 않고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아 부부 공동재산으로 삼은 경우가 있다고 해보자.이 경우 해당 재산이 불법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재산분할 대상이 되지 않는 판례는 찾아보기 어렵다.이번 항소심 재판에서 노소영 관장은‘선경 300억원,지 피티 퐁퐁최서방 32억원,금고 10억원…’이라고 적힌 모친 김옥숙 여사의 메모와 함께 50억원짜리 약속어음 6장의 사진을 재판부에 제출했다.노 관장 측은 부친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의 300억원이 고 최종현 선경그룹(SK그룹 전신) 회장의 태평양증권 인수나 사업 경영 등에 사용됐을 거라고 주장하며 그 담보로 선경건설의 어음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최태원 회장 측은 변론 과정에서 태평양증권 인수에는 계열사에서 조달한 그룹 내부 자금을 사용했다며,설사 노 관장 측 주장대로 300억원이 최종현 회장에게 유입됐더라도 이는 불법 자금에 해당하므로 재산분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당시 SK그룹 역시 출처가 불분명한 돈으로 태평양증권을 인수하면서도 정부로부터의 세무조사나 검찰 수사가 없었다는 점을 짚으며,노 관장 부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보호막이나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어 결과적으로 SK그룹의 가치 증가에 무형적 기여를 했다고 봤다.이 과정에서 재판부는 300억원이 어떻게 조성된 것인지는 따지지 않았으며,설사 300억원이 불법 비자금이라 해도 1991년 당시는 범죄수익은닉규제법이 제정되기 전이었던 만큼 이 같은 정경유착 행위에 대해 소급해 적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정경유착을 통해 획득한 재산에 대해서 우리 사회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라는 과제가 던져졌다.법원은 이것을 가사 법원에서 판단할 몫이 아니라 사회공동체가 논의할 몫으로 남겼다.
■‘논란의 300억원’에 물릴 사회적 책임
법에는‘불법원인급여’라는 개념이 있다‘불법의 원인으로 인하여 재산을 급여하거나 노무를 제공한 때에는 그 이익의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는 의미다.법은 불법적인 수입에 대해 조력하지 않는다는 개념으로,예컨대 마약 판매·장물 취득 같은 불법적 수입을 소송을 통해 회수하려고 할 때 사법부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하지만 가사소송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희박했다.지금까지 법원은 부부 공동재산의 자금(재산) 출처의 합법성을 따지지 않아왔다.이번 항소심 재판 역시 여러 증거자료를 통해 노 관장이 부부 공동재산 형성과 유지에 기여했는지 여부만을 판단했다.
다만 이번 이혼소송을 통해 새로운 논의를 진전시킬 가능성은 열려 있다.한 법조인은 〈시사IN〉과의 통화에서 “만약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이혼소송에서 재산 형성 과정의 불법성을 문제 삼아 그 재산을 환수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면,일반인들의 이혼소송에서도 재산의 취득 경로에 불법성은 없었는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지금은 가사 법원의 재량을 넘어서는 부분이지만 만약 이것을 공론화할 사회적 의지가 있다면 한 번쯤 다뤄볼 만하다”라고 말했다.
해당 사건이 대법원으로 올라갈 경우 4개월 안에 심리불속행으로 기각 여부가 결정되거나,그 기간을 지나 정식 심리가 이루어진다면‘상고기각’혹은‘파기환송’둘 중 하나로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심리 진행 시,김옥숙 여사의‘300억원 메모’의 신빙성은 핵심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하지만 해당 소송에서 메모의 의미를 재판단하는 것은 노소영 관장이 SK그룹 성장에 기여했는지를 판단하기 위함이지,재산 일부를 환수하거나 재산분할 대상에서 제외하기 위함은 아니다.
진보당은 6월4일,비자금으로 추정되는 300억원을 몰수하기 위한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미 사망한 데다 시효도 지났기 때문에 환수나 추징은 사실상 쉽지 않다.일부에서는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이 정경유착으로 창출한 재산에 대해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온다.
최태원 회장 측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SK그룹 경영에 유무형적 기여를 했다는 항소심 결과가 “편견과 예단에 기반해 기업의 역사와 미래를 흔드는 판결”이며 재판부의 “억측과 오해로 인해 기업과 구성원,주주들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입장을 발표하며 상고 의사를 밝혔다.
대법원으로 올라가는 상고심은 법률심이다.하급심에서 중대한 법리적 해석에 오류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항소심의 판결 내용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하지만 이번 사건은 재산분할 금액이 역대 최고액인 데다 사실상 정경유착 과정을 재산 형성의 기여로 인정한 만큼,대법원에서 판단할 최종 결론에서 재산분할액 등이 조정될 가능성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회장으로서는 1조4000여억 원에 이르는 현금 마련 방안을 미리 모색해‘최악의 시나리오’를 준비해야 할 형편에 놓였다.
항소심 판결이 난 날부터,SK㈜ 주가는 9% 이상 폭등하더니 3거래일 연속 급등세를 보였다.최태원 회장이 SK㈜ 주식 외의 자산만으로 현금 마련이 쉽지 않으리란 전망이 반영된 것이었다.
최 회장의 재산 중 상당 부분은 2조원 규모의 SK㈜ 주식과 6000억~7000억원 상당으로 추산되는 SK실트론 주식으로 구성돼 있다.최 회장은 지주회사인 SK㈜ 지분을 17.73%(약 2조원) 가지고 있다.그 외에 SK디스커버리·SK케미칼 등 상장사 및 계열사 주식 등도 보유하고 있지만 현금화해도 액수가 크지 않다(〈그림〉 참조).SK실트론 주식을 모두 매각한다 해도 청구된 재산분할액을 내기에 부족하다.
결국 SK㈜ 지분을 통해 현금을 마련해야 하는데,2003년 외국계 헤지펀드인 소버린자산운영이 SK㈜ 지분을 14.99%까지 늘려 최 회장의 경영권을 위협한 적이 있었던 만큼 최 회장으로서는 SK㈜ 주식을 최대한 방어하는 방향으로 자금 마련 방안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왔다.최 회장 처지에서는 SK㈜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현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도,주가 방어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그래야 담보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SK㈜ 주가 방어를 위해 다양한 대응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투기적 수요가 상승장을 이끌었다.주가 방어를 위한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 확대가 뒤따를 수 있다는,일종의‘밸류업’기대감이다.
하지만 이런 전략 역시 전망이 밝진 않다.한 재계 관계자는 “노 관장에게 주식이 아니라 현금 지급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최 회장이 한숨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것도 쉽지 않을 거다.이미 자신이 보유한 주식의 60%가량이 은행과 증권사에 담보대출,질권설정(어떤 재산에 돈을 받을 권리인‘질권’을 걸어놓은 것)으로 걸려 있어 추가 대출을 받는 건 부담이다.게다가 대출을 받으려는 이유가 이혼소송에 따른 재산분할액 때문인 것을 모두가 아는 상황이라 은행들도 부담을 안고 대출해주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특히 주식담보대출을 받을 경우엔 주가가 하락하면 마진콜(원금 손실로 인해 발생하는 추가 증거금 요구)을 받게 돼 추가 담보를 제공해야 하는데,이런 것이 여의치 않을 수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결국 기업 경영인으로서 신용도가 떨어지는 상황이 된다.”
SK실트론 매각도 쉽지 않다.SK실트론은 국내 유일의 웨이퍼(반도체 원판) 생산 기업이다.최태원 회장은 한국투자증권과 삼성증권이 각각 만든 특수목적법인(SPC)을 통해 SK실트론 주식 29.4%를 인수하는 총수익스와프(TRS) 방식으로 지분을 확보했다.SPC가 SK실트론 지분을 대리 매입하고,최 회장은 SPC에 SK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는‘질권설정’을 한 것이다.따라서 최 회장이 SK실트론 지분을 매각하기 위해서는 질권 설정을 풀어야 하고,이 과정에서 계약파기에 따른 위약금이나 SK 주식 일부를 제공해야 할 가능성이 있다.
고비는 또 있다.매수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한국CXO연구소의 오일선 소장은 “최태원 회장이 SK실트론의 지분을 팔아도 나머지 지분은 SK㈜가 가지고 있는 만큼 다른 기업이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할 매물이다.무엇보다‘급매’로 나오는 것이니 시간을 끌수록 매수자가 유리해진다.빨리 움직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게다가 최 회장이 SK실트론 주식을 구입하는 과정에도 논란이 있었던 만큼 매각 과정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
현재 최태원 회장과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최 회장이 SK실트론 지분을 인수한 것을 두고 소송전을 이어가고 있다.2021년 공정위는 SK㈜가 최 회장에게 부당한 이익을 제공했다고 판단하고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을 부과했다.최 회장은 항소했고 올해 1월 승소했다.하지만 공정위는 이에 불복해 상고했고 현재 대법원으로 소송이 넘어가 있는 상태다.오 소장은 ”최태원 회장으로서는‘돼지저금통에 있는 돈까지 다 긁어와야 하는 상황’인데 현금이 나올 구석이 모두 막혀 있다”라고 평가했다.
6월3일,최태원 회장은 항소심 판결 이후 첫 행보로 SK수펙스추구협의회를 소집했다.이곳에서 최 회장은 “SK와 국가경제 모두에 부정적인 영향이 없도록 묵묵하게 소임을 다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본인의 위기와 SK의 위기,국가경제의 위기를 동일선상에 둔 발언이었다.다음 날,〈서울경제〉에 “회장님 말씀에’울컥‘…최태원 편지에 SK 직원들 응원 쏟아진 이유는”이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해당 기사는 최 회장이 사내 포털망에 올린 글에 달린 직원의 댓글들을 인용했다.“구성원들을 생각하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저는 제 자리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겠다” “SK그룹의 역사와 명예를 바로세워달라”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이혼소송으로 대법원까지 갈 각오를 한 이상 SK 내부에서는 그룹이‘흔들린다‘경영권이 위협받고 있다‘절치부심한다’라는 기사가 나갈수록 나쁘지 않다는 분위기다.대법원이 이런 여론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여론전에 공력을 기울일 것이란 예상이다.
일부 시장 전문가들은 최근의 SK㈜ 주가 상승이 기업의 내재적 가치가 반영되지 않은 경영자 리스크가 견인한 호재라는 점에 주목했다.앞으로 최 회장의 행보에 따라 SK 주식 가격의 불안정성이 커질 위험성도 지적된다.투자 전문기관인 서스틴베스트의 류호정 투자솔루션팀장은 “지주회사인 SK㈜ 최대주주의 소송 리스크와 재원 마련 딜레마가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부각되고 있다.소송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로 인한 평판 리스크가 높아지고 주가 영향도 지속될 수 있으리라 보인다.SK㈜로서는 이러한 리스크 부담을 최소화하는 게 필요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류 팀장은 “다만 최태원 회장 입장에서는 SK㈜ 주가 부양의 유인이 더 높아진 셈이므로 자사주 소각 확대 등 보다 적극적인 주주친화적 행보를 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라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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