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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 어둠 밝힐 빛은 문화유산 수호"
1·4후퇴 당시 훈민정음 해례본 안고 피난
국내 첫 사립미술관 '보화각' 세우는 등
민족 자긍심 높이는 문화보국 정신 실천
〈편집자 주〉 9월 3일,마침내 대구간송미술관의 시대가 열린다.2016년 대구시와 간송미술문화재단이 건립·운영 계약을 체결한 지 8년 만이다.개관에 앞서 간송미술관을 설립한 전형필 선생의 문화보국 정신을 비롯해 대구간송미술관 개관 의미와 공간 소개,전인건 대구간송미술관 관장이 밝히는 운영 계획 등을 세 차례에 걸쳐 상세히 짚어본다.
2018년 여름,대구미술관은 전국에서 몰린 관람객들로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다.이곳에서 열린 간송미술관 설립 80주년 기념 특별전 '조선회화명품전'의 전시 기간 일 평균 관람객은 무려 1천800여 명.김정희,
지난주로또번호김홍도,신사임당,신윤복,안견 등 거장들의 국보급 그림 100여 점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그에 대한 관심은 상당했다.
그 전시는 많은 관람객의 마음에 간송 전형필(이하 간송·1906~1962)이라는 이름을 남겼다.국민들의 자부심을 높이고,감동을 안겨준 국보급 문화유산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생전 모습.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나라 어둠 밝히는 빛은 문화유산 수호"
간송(澗松)은 전형필의 호다.산골짜기에서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를 뜻한다.일제 식민통치,6·25전쟁 등 지난한 역사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호처럼 한결 같이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서울 종로 거부(巨富) 집안의 늦둥이 막내아들로 태어났다.어릴 적부터 서화를 가까이 했으며 책 읽기를 좋아해 서점을 찾아다니며 신간은 물론 옛 한적(漢籍)들까지 손에 닿는 대로 사왔다고 한다.
책 모으는 취미가 장차 문화유산에 대한 수집 열정으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됐던 것일까.그가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유산 확보에 발 벗고 나선 것은 위창 오세창(1864~1953)을 만나면서부터다.위창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국 서화가의 기록을 총정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을 펴낸 서예 대가였다.그의 호를 지어준 것도 위창이었다.
그는 위창을 통해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빛이 민족 문화유산 수호임을 깨닫고,20대 초반 본격적으로 위창의 문하에서 서화골동의 감식안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버지와 숙부,형까지 모두 돌아가시면서 그는 유일한 적손으로서 십만석을 상속 받은 조선 최대 지주가 됐다.엄청난 부의 주변에는 유혹의 손길도 뻗쳤을 수 있겠으나,그는 오로지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보호하는 데 사명감을 안고 몰두했다.
1938년 서울 성북구에 개관한 보화각 입구에 간송 전형필과 위창 오세창,청전 이상범,월탄 박종화,지난주로또번호춘곡 고희동,석정 안종원,박종목,심산 노수현,이순황 등이 앉아 기념 촬영을 했다.간송미술문화재단 2024년 현재 서울 성북구 간송미술관의 모습.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일본이 한창 조선 문화말살을 펼치던 1930년대,간송은 이에 맞서고자 계획을 세운다.지금까지 수집한 문화유산을 보관·전시·연구하는 공간을 만들어 민족 자긍심을 심어주겠다는 것.
그렇게 세워진 공간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寶華閣)이다.'빛나는 보배들을 모아둔 곳'이라는 의미의 이 공간은 서울 성북구에 위치하고 있으며,1971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간송은 이후에도 국내 최초,최대 미술사학 학술단체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을 발간하는 등 전통문화 연구와 계승 발전에 힘써오다 1962년 급성 신우염으로 타계했다.그의 문화유산 수호와 육영공적을 기리고자,나라에서는 대한민국문화포장과 대한민국문화훈장국민장을 추서했다.
◆작품 가치 알아본 혜안(慧眼)
그의 일생을 축약하는 것은 쉽지 않다.그가 역경을 뚫고 온 재산을 들여 멸실 위기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지켜내는 과정에서 겪은,그 만큼의 수많은 일화들이 점철돼있기 때문.
특히 간송은 문화유산을 구입하게 될 때 달라는 금액을 깎는 것은 물론,적게 부르는 값을 그대로 내고 산 적이 없었다.원 주인이 그 가치를 잘 모르고 싼 값을 부르면,그 두 배건 세 배건 자신이 판단한 가치대로 대금을 지불했다고 전한다.
대구간송미술관을 찾는 문화유산 중에서도 사연을 담은 것들이 있다.국보 제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 창제 목적과 글자를 만든 원리 등이 담긴 훈민정음 해설서다.
1904년 경북 안동의 고가(古家)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3년 간송이 수장하게 된다.당시 소유주가 부른 값은 1천원.서울 북촌의 기와집 한 채 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헌데 간송은 '귀한 물건은 제값에 치러야한다'며 소유주가 요구한 액수의 10배인 1만원을 건넸고,중개상에도 사례금을 1천원이나 줬다고 한다.그러니 훈민정음 해례본은 당시 기와집 열한 채 값인 1만1천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수집한 것이다.
이후 6·25전쟁과 1·4후퇴 때 문화유산을 두고 피난을 가야했던 급박한 상황에서도,간송은 훈민정음 해례본만은 소중히 챙겨 다니며 자신의 몸을 떠나지 않게 했다고 한다.
국보 제68호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수집 과정의 일화도 전해진다.고려청자를 대표하는 걸작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매병의 표면에 상감 기법을 이용해 상공을 날아가거나 지상으로 내려오는 학들이 새겨져 있다.
고려 무신정권의 지도자였던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무덤에서 도굴됐던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간송이 1935년,일본인 골동상으로부터 무려 기와집 스무채 값에 해당하는 거금 2만원에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일본인 수집가가 찾아와 두 배 가격인 4만원에 사겠다고 했으나,간송이 "이 청자보다 더 훌륭한 자기를 가져오면 그때 산 가격대로 드리겠소"라고 응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오동욱 대구정책연구원 사회문화연구실장은 "수많은 작품 수집 관련 일화만으로도 간송이 얼마나 우리 문화유산을 소중히 여기고 아꼈는지를 잘 알 수 있다"며 "간송은 '자신이 판단한 가치대로 대금을 지불한다'는 철학으로,문화로 나라를 지켜낸다는 문화보국의 정신을 실천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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