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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지역 병원 근무 중인
100명이 넘는 우리 간호사와 함께
성경 공부하며 신앙의 교제도 나눠
그 은혜는 힘든 유학 생활 동력 돼
1960년대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대한민국 정부는 독일의 경제 원조 차관을 받았다.대신 현지에서 일손이 부족한 광부와 간호보조원을 파견했다.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받는 월급에서 국내로 보낸 외화는 가난한 우리나라를 일으키는 종잣돈 구실을 했다.
당시는 우리 경제가 북한보다 힘들었던 시기다.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힘들어 다수의 대졸자가 가족 생계를 위해 파독 광부에 지원했다.간호사 역시 현지 일손이 부족하고 일하기 힘든 직종이었는데 우리 여성들은 독일 병원에서 열심히 일했다.국민을 일꾼으로 보낸 가난한 나라의 지도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용기가 없어 독일이 보내준 비행기를 타고 1964년 독일을 방문한다.지하 1000m 갱도에서 하루 8시간씩 목숨을 걸고 고된 일을 하는 국민을 본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격려했다.“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할지라도 후손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열심히 합시다.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엔 로르바흐 지역과 교외인 비슬로흐에 병원이 있어 100명 넘는 우리 간호사가 근무하고 있었다.나는 이들과 성경공부를 함께 하면서 신앙의 교제를 나눴다.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나누는 가운데 간호사들은 낯선 땅에서의 외로움을 달랬다.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나 역시 큰 은혜를 받았다.이는 힘든 유학 생활의 동력이 됐다.
성경공부 모임이 커져 모일 장소를 마련키 위해 로르바흐 병원 원목을 찾아가 병원 내 예배당을 빌렸다.현재 아신대 은퇴교수인 이동주 당시 전도사와 간호사 송화순 허정심 김은주씨 등과 함께 1973년 12월 세운 하이델베르크 한인교회도 이곳에서 창립했다.이후 강덕치 집사가 합류했고 미군 군목인 이정일 강도사가 후임으로 왔다.1980년대에는 유학 온 최종호 경성대 명예교수와 김광채 개신대학원대 명예교수,만디 나이김종렬 실천신학대학원대 명예교수와 김희성 서울신학대 명예교수,만디 나이이승렬 목사(전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사무총장) 등이 목회를 승계했다.
교회를 인도할 때 영적 체험도 겪었다.간호사 가운데는 한국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한 이들뿐 아니라 다양한 신자가 있었다.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혼자 성경을 읽는다는 한 간호사가 정신 발작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해 병실로 심방을 갔다.병원 뒤뜰을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던 중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란 찬송가 가사를 흥얼거렸는데 이 간호사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부르짖었다.안정을 시킨 뒤 병실에 데려다 줬던 기억이 난다.그 간호사는 병원에서 요양하며 말씀을 읽고 기도 생활을 하면서 회복됐다.
수십 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였지만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하는 한국교회 신앙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들러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설교했다.총신대 교수 김의환 박사는 1974년 제1회 로잔대회에 참석했다가 하이델베르크 한인교회를 방문해 설교했다.독일 본대학에 방문 교수로 온 이종성 박사를 모시고 성경 연구 모임과 부흥회도 가졌다.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 교회 출신인 내가 예장통합 측 목사가 된 배후에는 당시 장신대 학장인 이종성 박사와 나눈 신앙적 교분에서 맺어진 결실 때문이다.하나님의 인도가 있어 가능했던 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