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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 사이트 usa228,228);padding-left: 20px; padding-right: 20px;">역(驛)과 원(院) 옛터에서 서울의 과거를 찾다
고양 벽제관 부근의 의주대로(일제강점기).서울과 의주를 연결하는 의주대로는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도로였다.의주대로 주요 거점에는 역과 원이 줄지어 세워져 여행객들의 편의를 도왔다.[국립중앙박물관]“이태원,구파발,홍제동,인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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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지명 중에는 역원(驛院)의 명칭을 사용한 사례가 적지 않다.역원은 국립여관으로 공무상의 여행자에게 말과 숙식 등을 공급하는 역과 숙박 등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원을 통칭하는 용어다.현대화와 도시발달 과정에서 역원은 모두 사라졌지만 현재의 지명을 통해 옛 역원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서울 노원구의 지명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함경도로 올라가는 경흥대로(慶興大路·도봉로) 상에 설치됐던 노원역(蘆原驛)에서 유래했다.노원구는 서울 동북 방면의 시계를 이루는 구역이지만 조선시대 노원역은 그보다 훨씬 안쪽인 강북구에 존재했다.1988년 노원구를 도봉구에서 분리하면서 지명 고증을 제대로 안 했던 것이다.1861년(철종 12) 제작된 <대동여지도>를 통해 노원역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이에 따르면,노원역 자리는 지하철 4호선 미아역(수유현) 아래 쪽의 북서울꿈의숲 서편이다.<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직접 답사해 제작한 지도로 정확도가 매우 높다.
<대동여지도> 中 노원역(1861년).서울 노원구는 노원역에서 명칭을 따왔지만 정작 <대동여지도> 상 노원역(큰 화살표)은 중랑천(청색 원)에서 한참 서쪽의 수유현(작은 화살표·강북구 미아동) 아래에 보인다.노원구의 지명은 고증이 안됐음을 알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 <대동여지도> 中 양재역(1861년).양재역 표지석은 현재 지하철 3호선 양재역 11번 출구앞에 있다.하지만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 양재역(붉은색 원)이 우면산 한참 아래의 양재천 가에 위치하는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지하철 3호선 양재역에서 남쪽으로 1㎞ 이상 떨어진 지점이다.[국립중앙박물관] 지하철 양재역에 세워진 말죽거리 표시 글씨.조선시대 양재역 주변을 말죽거리라고 했다.옛 말죽거리는 지하철 양재역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다.[배한철기자]1531년(중종 26)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노원역이 흥인문 밖 4리(1.6㎞) 지점에 있다”고 했고,조선말기 편찬된 <읍지>는 “흥인문 밖 10리(4㎞)”라고 적고 있다.흥인지문에서 <대동여지도>상의 노원역까지는 거의 정확히 4㎞다.양재역(良才驛)도 위치를 잘못 알고 있다.양재역 표지석은 지하철 3호선 양재역 11번 출구 앞에 놓여져 있다.그러나 <대동여지도>를 보면,조선시대 양재역은 그보다 1㎞ 이상 남쪽인 양재천 변에 위치한다.
조선시대 지방통제 위해 역원제 운영···전국 교통요지에 역 543개,원 1310개 설치
벽제관(벽제역) 주변 의주대로(일제강점기).[국립중앙박물관] 고양 벽제관 건물(일제강점기).중국으로 가는 의주대로 상에 존재했던 벽제관은 매우 중요한 역원 시설이었다.중국사신이 유숙하던 관청이어서 관(館)이 설치됐지만 국내 공무여행객을 위한 역(驛)시설도 갖췄던 것으로 알려져있다.조선시대 역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다.[국립중앙박물관]우리나라의 역대 국가들은 봉건제의 중국,일본과 달리 중앙집권 체제를 지속해 왔다.전국의 군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도로와 거점별 역의 기능을 강화하는 역로(驛路)행정에 주력했다.역은 교통·통신기관이었다.중앙과 지방의 명령 전달 뿐만 아니라 진상품 등 공공물자의 원할한 운송을 담당하는 화물터미널 역할도 했다.
1415년(태종 15) 서울에서 각 지방에 이르는 도로에 30리마다 역을 하나씩 두도록 제도화했으며 주로 대로변의 주현(州縣)에 설치했다.도성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동북방면(양주)으로 연결되는 노원역,남부지역(경기 광주)으로 통하는 청파역(淸波釋)을 뒀다.두 역은 그 중요성으로 인해 병조에서 직접 관할했다.1419년(세종 1) 음력 1월(이하 음력) 실록도 “청파와 노원역은 인구나 물산이 메마르고 쇠잔하지만 전달하는 문서는 가장 번거롭다”라고 했다.또한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따르면,청파·노원역에는 역졸이 합해 288명이 있으며,말도 160필이나 된다고 했다.청파역 위치는 문헌에서 숭례문 밖 2리 또는 3리 지점으로 표기되며 효창공원 동편의 용산 청파동1가 일원으로 짐작된다.
<경국대전>에 소개된 전국의 역은 543개이며,역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이용율이 높은 순서에 따라 대,중,소로로 분류했다.서울 근교의 양재역,영서역(迎曙驛·은평 불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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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는 관원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정승은 9마리,어사는 3마리까지 이용가능
여행자와 수행원(1904년).역에서 이용가능한 말은 벼슬의 등급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났다.[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컬렉션)]각 역에는 찰방(종6품) 관리 하에 역장,역리,역졸 등이 근무했고,역마(타는 말,짐말)를 상시 비치해 관리들이 이용하거나 각종 물품을 나르는데 활용했다.공무로 출장가는 관원은 상서원(尙端院)이 발행하는 마패를 증표로 삼아 역마를 이용했다.마패의 한 면에는 관원의 등급에 따라 이용가능한 말의 마릿수를 새기고,다른 한 면에는 주조 연월일과 발행기관을 새겼다.<경국대전>에는 말 지급 수량을 정1품(정승) 9마리,정2품(판서) 6마리,종2품(참판·관찰사·통제사) 5마리,어사 3마리 등으로 규정했다.
전국의 역 중에서는 삼남(충청·전라·경상)의 도로가 한데 모이는 양재역이 가장 혼잡했다.양재역은 조선 제11대 중종(재위 1506~1544) 재위기 익명서 사건으로 사서에 자주 등장한다.1547년(명종 2) 9월 18일 양재역 벽면에 붉은 글씨로 “여주(문정왕후)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1476~1552)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이다”라고 쓴 익명서가 붙어있는 것이 발견됐다.이 일은 문정왕후(1501~1565) 동생인 윤원형(1503~1565)이 왕후의 반대세력과 사림을 숙청한 사화사건으로 비화한다‘양재역 벽서사건’(정미사화)이라고 한다.선조가 즉위하고 사림세력이 정계를 장악하면서 무고로 공인됐고 죽거나 피해를 당한 인물들도 복권됐다.벽서가 나붙을 만큼 역과 역 주변은 언제나 북적거렸다.역에서는 사람도 식사를 해결했지만 죽을 끓여 말도 먹였다.양재역 주변 도로의 별칭이 말죽거리가 된 이유다.
큰 역은 폭주하는 업무량으로 역졸과 역로들의 이탈이 빈번했다.<세종실록> 1448년(세종 30) 4월 4일 기사는 “양재역에서 안부역(安富驛·수안보)까지는 하삼도 요충의 길이어서 사객(使客·공무 출장 관리)이 번다하다.역리들의 전운(轉運·물자운반 업무)를 종들이 견디다 못하여 도망하는 일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원은 사적(私的)으로 이용가능,길가에 건물만 있는 경우 많아 조선후기 쇠퇴
역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교통 요지와 분기점에는 원(院)도 뒀다.원은 역과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원은 고려시대 불교사찰에서 운영하던 숙소였지만 역로망이 강화되며 국가시설로 흡수됐다.원은 공무가 아니더라도 이용할 수 있어 역보다 상대적으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는 전국의 원은 1310개소다.그중 서울 권역이거나 인접 지역은 △한성부 4개 : 보제원(고려대 앞 안암오거리),홍제원(서대문 홍제동),이태원(용산고 정문),전관원(행당중 정문) △양주목 6개 : 덕해원(누원 또는 누원점·1호선 도봉산역 맞은편),도제원(토원 또는 퇴계원·남양주 퇴계원리) 등 △광주목 16개 : 사평원(한남대교 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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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서초 잠원동,강남 압구정·신사동의 한강변은 조선시대 사평나루로 불렸다.한양에서 지방으로 연결되는 전국도로망 중 제4로(경기 광주~판교~부산)와 제5로(용인~통영)가 사평나루를 지났다.사평나루에는 사평원(沙平院)이 섰다.사평원 위치는 신사중 일원으로 추정한다.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 사평나루에는 장시도 크게 열려 상업중심지로 성장했다.사평장은 전국 15대 향시(鄕市·지방 정기시장)로 번성했다.지금은 한강개발과 아파트 건설로 사평원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18세기 이후 상업발달하며 점막(店幕)이 원 대체,주변에 큰 시장도 형성
조선후기 문을 닫는 원이 많았고 대신 그 자리에 점막(店幕·주막촌)이 들어섰다.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은 “이른바 원이라는 것은 주인이 없는 빈집을 길 위에 지어놓은 것이어서 대부분 황폐화하였고 폐지되어 오래가지 못하였다”라고 했다.점막은 국가가 아닌 민간에서 운영하며 역처럼 여행객들에게 음식과 숙박을 제공했으며 18세기 이후 상업인구의 증가와 함께 늘어나게 됐다.고지도와 문헌 등을 통해 확인되는 점막은 △양주 누원점(樓院店) 또는 누원(다락원) △수유현점(지하철 4호선 미아역 주변) △오가문점(도봉 방학동 추정) △송파점(송파·석촌동) △양천 개화우점막(개화산 북쪽) △시흥행궁 앞 점막(금천 시흥5동) △고양 신점(新店) 등이 있다.이는 일부일 뿐이고 최대 상품시장인 서울과 통하는 대로에 훨씬 많은 수의 점막이 발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도봉산에서 내려다본 누원점 터.1호선 도봉산역 앞에는 조선시대 주막촌과 시장인 누원점이 들어서 동북권의 물화를 독점하면서 상권이 크게 번창했다.붉은 화살표가 가르키는 곳이 누원점 터이다.[배한철기자] 도봉구 누원점 입구.지금은 도봉산 권역 공영차고지가 들어서 있다.[배한철기자]누원점 터는 1호선 도봉산역 맞은편 도봉권역 공영 차고지(봉구 도봉로 961) 자리다.조선시대 서울의 동북방면 관문 지대에 위치했던 누원점은 성저십리 외곽에 위치해 금난전권(禁難廛權·관허상인의 독점적 상업권) 적용에서 제외됐다.이에 따라 함경도에서 생산되는 어물과 삼베를 매점매석하면서 유통경제 중심지로 성장했다.송파점은 송파나루에 섰던 송파장의 주막촌이다.송파장은 북한강과 남한강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상선들이 정박하는 곳으로 대규모 가축장과 곡물장,땔나무장이 열렸다.누원과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올라오는 각종 물화를 독점판매해 시전상인들과 갈등을 빚었다.<일성록> 1785년(정조 9) 1월 2일 기사에 의하면,종로의 내어물전 시전상인들은 누원점과 송파점의 상인들이 요로를 막고 가격을 조종해 피해를 입고 있다며 엄중 단속을 요구했다.누원점은 경흥대로가 쇠퇴하면서 위축됐고,송파점은 1925년 을축년 한강 대홍수로 시장이 물에 잠긴 이후로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다.
도봉산 초입의 누원점,상선 정박지 송파점 곡물·어물 독점하며 유통경제 중심지로 번성
외국사신이 머물던 곳은 별도로 존재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조선시대 외국 사신을 맞아 접대하던 국영 객관(客館)은 태평관(太平館),모화관(慕華館),동평관(東平館),북평관(北平館) 등이다.태평관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숭례문 안 황화방(중구 태평로 2가 신한은행 본점)에 마련했고,모화관 역시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돈의문 서북쪽(현저동 서대문 독립공원)에 지었다.동평관은 일본,북평관은 여진 사신을 위한 객관이다.동평관은 종로4가 덕수중 앞,북평관은 종로 6가 흥인지문 안쪽에 표지석이 있다.
서대문 모화관(일제강점기).청나라 사신들이 머물던 객관이다.모화관 앞에 영은문(사진속 독립문 자리)이 있었다.[국립중앙박물관]역원은 도로와 교통,통신기관이 근대화하면서 1896년(고종 33) 폐지된다.지금은 지명으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서울의 청파동,노원구,역촌동,역삼동,양재동 등은 역과 관련된 지명들이다.은평 역촌동은 영서역에 소속된 역민(驛民·역의 부역에 동원되는 백성)이 사는 동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강남 역삼동은 양재역 주변의 세 마을을 합해 이뤄졌다고 해서 만들어진 지명이다.원의 명칭이 반영된 지명도 허다하다.홍제동의 동명은 홍제원에서 따왔다.홍제원은 중국으로 향하는 의주로에서 돈의문을 벗어나 만나는 첫번째 원이어서 다른 원보다 규모가 컸고 건물도 1895년(고종 32)까지 존치됐다.구파발(은평 진관동) 명칭은 파발군(공문 속달 전담 군인)의 휴식시설인 파발막(擺撥幕)에서 비롯됐고,강동 명일동은 한영고 자리의 명일원에서 유래했다.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신증동국여지승람.경국대전.읍지.일성록.반계수록(유형원).대동여지도(김정호)
2.조선시대 경기연구.서울역사편찬원.2019
3.조선시대 한성부의 역할.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2013
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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