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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8일,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53년 6월 18일,한국전쟁의 휴전 협상이 한창이던 시점에 이승만 대통령이 미군의 동의 없이 포로수용소에 있던 반공포로 2만 5000여 명을 석방했다.이 기습적인 단독 결정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 및 공산주의자 포로들은 거제도,논산,부산 등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휴전 협상에서 포로 문제는 중요한 쟁점이 됐다.북측은 일괄적인 포로 송환을 주장했고,UN군과 미군 측은 개인 의사를 존중하자는 입장이었다.반면에 이승만은 모든 반공포로의 일괄 한국 송환을 주장했다.공산 측의 위협으로 강압제 의해 북에 끌려갈 포로가 있을 것을 우려했다.또한 휴전에도 반대했다.
하지만 포로의 개인 의사를 존중하는 쪽으로 결정되고 휴전 협상에 진전이 생기자 이승만은 미군의 동의 없이 반공포로를 전격 석방했다.여기에는 북측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고,휴전을 서두르려던 미국의 협상력을 약화하며,마카오 면적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의 확답을 압박하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18일 당일 국군의 비호 아래 반공포로 석방 작전이 진행됐고,2만 7388명이 탈출에 성공했다.이 소식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격노했고,처칠 영국 총리는 면도 중 얼굴을 베었다고 한다.휴전 협상은 한 달 이상 지체됐다.
이승만은 결국 휴전 협상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얻어냈다.당시 한국과 미국의 위상 차이로 볼 때 막대한 경제·군사원조가 포함된 말도 안 되게 한국에 유리한 조약이었다.이승만의 공과에 대한 분분한 평가에도 이 조약만큼은 업적으로 꼽히는 이유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국내의 분열과 갈등,그리고 냉전시대의 국제정세를 보여준다.이 사건을 약소국 지도자가 강대국에 초강수를 뒀던 영웅적인 행보로 평가하는 설명도 있고,유엔군 사령관의 사실상 묵인 내지 미온적 대처가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