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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와 가까운 선반에는 <슬램덩크> 주전 5인방의‘피규어’가 진열돼 있었다.별 모양이 찍힌 <드래곤볼> 주황색 칠성구도 보인다.<진격의 거인> <주술회전> <귀멸의 칼날> <하이큐> <체인소 맨> 등 각종 애니메이션 등장인물이 그려진 아크릴판과 열쇠고리가 빼곡하다.이런 가게가 골목에 수십곳 늘어섰다면?상점 위치를 표시한‘오타쿠 지도’까지 만들어 투어에 나선 이들이 있다면?오타쿠 문화의 본고장 일본 얘기가 아니다.대한민국 젊음의 상징,서울 마포구 홍대 거리의 요즘 풍경이다.
‘MZ 오타쿠’들이 홍대로 몰린다.세계 최대 규모의 애니메이션 굿즈 업체인 애니메이트의 홍대점 개점은 5년 전이지만,아시안컵 개최국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운영하는 상점이 골목마다 우후죽순 생겨난 건 불과 1~2년 사이의 일이다.어떤 이들은 피규어 상점이 늘어선 이곳을‘홍키하바라’라고 부른다.일본 오타쿠들의 성지인 아키하바라의 지명에 빗댄 표현이다.
피규어는 만화나 영화 및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또는 아이돌 등 실제 인물을 본떠 합성수지로 제작한 축소 모형을 말한다.피규어라는 말은 본래‘피겨(figure·모형)’의 일본식 독음인‘휘규아(フィギュア)’를 외국어 표기법에 맞지 않는 한국어로 사용하면서 생긴 신조어였다(피규어의 규범 표기는‘피겨’지만,아시안컵 개최국이번 기사는 부득이 홍대 거리에서 통용되는‘피규어’로 표기한다).
홍대 거리는 어떻게 오타쿠 성지가 됐을까.젊은 세대는 왜 애니메이션과 피규어·굿즈에 빠졌을까.지난달 16일부터 2주간 홍대 인근 피규어 상점 여러 곳을 방문하며 가게 주인과 손님 등 10명을 인터뷰했다.이들은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해보는 기쁨”(오태정씨·30)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오타쿠를 위한 변명”(이진영씨·27)을 자처하는 이들도 많았다.
고경아씨(28)는 피규어 상점을 처음 찾게 된 시기를 또렷이 기억한다.2020년 8월,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전 국민이‘집콕’생활에 들어갔을 때였다.전대미문의 팬데믹 재난은 시민들의 여가 생활 양상도 바꾸어놓았다.바깥 활동을 즐겼던 고씨는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취미를 찾아야 했다.아쿠타미 게게 원작의 애니메이션 <주술회전>을 좋아하게 된 건 그래서였다.
“취업 준비 중이었거든요.앉아 있는 시간은 많은데,일은 생각보다 안 풀리고.그래서 애니메이션을 틀어놓고 작업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그러다 보니‘평생 기억에 남을 정도로’좋아하게 돼버린 거죠.” 시간이 흐를수록 고씨의 책상 위에 피규어도 하나둘 늘어갔다.고씨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기념’하기 위해 피규어를 모았다”면서 “이제는 애니메이션을 보다 인상적인 장면이 나오면‘피규어로 사야겠다’는 생각부터 든다”고 말했다.
정청학씨(35)는 피규어 가게 지점장이다.정씨가 일하는 제이에스(JS)스토어는 지난해 여름 홍대 인근에 문을 열었다.그는 “근처에 있는 다른 피규어 가게들 대부분이 비슷한 시기에 개업했다”고 말했다.정씨는 코로나19 이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산업이 발전하면서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진 영향이라고 분석했다.소수의‘특이 취향’에 머물던 애니메이션이 다수가 누리는 대중적인 취미가 되었고,자연스레‘2차 창작물’피규어·굿즈의 인기도 커졌다는 것이다.
상인들 설명을 종합하면,2020년까지만 해도 홍대 거리는 애니메이트·피규어프레소 같은 대형 상점과 레트로 감성의 소품숍 뽈랄라백화점 등 몇몇 가게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이름 날리던 터줏대감 격의 중소규모 상점들은 줄줄이 문을 닫은 터였다.2021년,애니메이트가 AK플라자 5층으로 확장 이전한 것을 시작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2022년 피규어프레소 매장이 추가로 들어섰고,여러 피규어숍이 성업 중인 대구 등지에서 상점을 운영하던 이들이 홍대 거리에 매장을 열었다.지난해에는 JS스토어 같은 신규 상점이 여럿 생겨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른바‘홍키하바라’는 홍대입구역 4번 출구 바로 앞 AK플라자에서 합정역으로 가는 방향 500m 이내 골목길에 형성돼 있다.지하철 2호선과 경의중앙선,아시안컵 개최국공항철도가 지나 접근성이 좋은 데다 몇몇 가게가 매장을 넓히고 홍보에 나서면서 일대를 찾는 애니메이션 소비자들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김윤씨(45)는 피규어 상점을 열기 위해 2년 전 대구에서 올라왔다.김씨는 “처음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비슷한 가게가 서너 곳뿐이었는데 지난해 가을부터 급속도로 수가 늘어났다”면서 “지금은 비슷한 종류의 상점만 마흔 곳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김씨처럼 가게를 운영·관리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피규어를 모으던‘수요자’에서 피규어를 판매하는‘공급자’가 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정씨는 “주말 기준 하루 5000명 정도가 우리 상점에 방문하고 10명 중 1~2명꼴로 상품을 사간다”면서 “홍대 전체로 보면 (주말 하루 방문자가) 40만명은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유명 애니메이션이 영화로 개봉하면 방문자가 확 뛰기도 해요.(2021년 1월에) <귀멸의 칼날> 극장판이 나왔을 때도 그야말로‘메가히트’를 쳤죠‘팬티를 굿즈로 만들어도 사갈 정도’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어요(웃음).”
신생 상점들은 피규어 외에도 아크릴 스탠드나 열쇠고리,아시안컵 개최국캔배지 등 다양한 굿즈를 판매하는 특징이 있다.둥근 모양의 뽑기 캡슐에 굿즈가 들어 있으면‘가차,조그만한 티켓을 사서 무작위 경품을 받는 형식이면‘이치방쿠지(제일복권)’등 판매 방식에 따라 명칭도 다양하다.성별에 따라 선호하는 상품의 종류도 조금 다르다.진열된 상품이 피규어 중심이면‘남성향,소규모 굿즈 중심이면‘여성향’으로 분류하는 이도 있다.전자를‘전통적 오타쿠,후자를‘신생 오타쿠’성향이라고 보기도 한다.
굿즈 중심으로 진열대가 개편되면서 오프라인 상점을 찾는 발길도 늘었다고 한다.피규어는 최소 5만원에서 비싸게는 수십만원에 이르기 때문에 온라인 매장에서 최대한 저렴하게 구매하려는 이들이 많은 반면,주로 3만원 이하인 열쇠고리나 아크릴 스탠드 등은 오프라인 상점에서 사도 가격 차가 크지 않다.특히 뽑기나 복권의 경우 특유의‘손맛’이 주는 즐거움이 있어 방문 소비자를 늘리는 유인이 됐다.
고경아씨는 “(서초구 소재) 국제전자센터(국전) 9층은 더 오래전부터 오타쿠 성지로 유명했다”며 “국전이 피규어를 주로 판매한다면 홍대 신생 상점들은 아기자기한 굿즈를 많이 파는 것 같다.국전이‘전통적 오타쿠’들이 가는 곳이었다면 홍대는‘신생 오타쿠’들이 모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무언가를 모으는 행위 자체가 좋다는‘수집광’들도 있었다.대학생 김훈씨(24)는 뒤로 메는 검은색 가방에 인형과 열쇠고리 등을 가득 달고 있었다.그는 “포켓몬과 에반게리온을 좋아하긴 하지만 원래부터 애니메이션 자체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면서 “물건을 모으는 걸 좋아하는 반면 버리는 건 잘 못한다”고 말했다.방송국에서 성우로 일하는 이이로씨(25)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이 장난감을 너무 안 사주셔서 한이 됐다”면서 “19세 때부터 돈을 벌었는데,6~7년간 인형이나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꾸준히 사 모았다”고 말했다.
홍대 상점에서 만난 이들은 자신을‘오타쿠’로 당당히 소개했다‘오타쿠’라는 표현은 1990년대 PC통신 등을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오타쿠’를 한국어식 발음으로 한‘오덕후’는 2005년 디시인사이드 애니메이션 갤러리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에‘오덕후’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은 2010년 무렵,케이블채널 프로그램 <화성인 바이러스> 때문이었다.방송에 출연한 20대 남성은 여성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새겨진 베개를 안고 자거나 해당 캐릭터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오타쿠’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린 동시에‘오타쿠=사회성이 결여된 남성’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남긴 계기가 됐다.
시간이 흐르며 이 같은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실제 홍대 거리 피규어 상점에 모이는 이들은 성별도,연령대도,차림새도 다양했다.애니메이션 인물처럼 코스프레를 하거나 특이한 무늬의 티셔츠를 입은 이들도 간혹 보였으나 평범한 옷차림의 직장인·대학생이 더 많았다.유치원생 아이 손을 잡고 온 어머니들,용돈을 모아 친구 선물을 사러 왔다는 중학생도 보였다.진열대의 제품들을 가리키며 대화를 나누는 외국인들의 말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친구에게 줄 선물을 사러 왔다는 오태정씨는 “중고등학교 시절 오타쿠라며‘왕따’를 당한 적도 있다”고 했다.“예전에는 혼자 만화를 그리고 있으면 음침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그때와 비교하면 인식이 많이 달라졌지만,여전히 어떤 것을 깊게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편견이 있는 것 같아요.그 대상이 옷이든,화장품이든 말이죠‘굳이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가성비를 따지고 효율을 중시하잖아요.”
그가 휴대전화로 사진을 보여주며 웃었다.“지금까지 모은 걸 합치면,글쎄요.전셋집 마련하지 않았을까요?” 초등학생 때부터 모은 20여년의‘보물’은 플라스틱 박스 여러 개에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오씨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여고생 9명이 결성한‘스쿨아이돌’의 활약을 그린 <러브라이브!>다.
오씨는‘손에 잡히는 감각’이 수집 욕구의 본질이라고 했다.“소유할 수 있는 느낌 때문이에요.화면 속 캐릭터는 아무리 좋아도 실재하진 않잖아요.내 곁에 존재한다는 그 감각을 느끼고 싶은 거랄까요.워낙 손에 잡히는 게 없는 세상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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