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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인‘태양절’을 맞이해 평양 만수대 언덕의 김일성ㆍ김정일 부자 동상을 참배하는 북한 주민들.photo 뉴시스 오는 7월 8일은 북한의 김일성(1912~1994)이 사망한 지 30주년 되는 날이다.1994년 사망한 김일성은 아마도 한반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그가 사망한 지 이미 30년이 흘렀지만,한반도의 절반은 여전히 그가 만든 체제 아래서 살고 있다.김씨 정권은 과연 한민족의 운명이었는가?
김일성의 전기를 분석하면 우선 그는 '우연히 생긴 지도자'로 볼 수 있다.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 4월 물론,1945년 8월 소련·일본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그 누구도 한반도가 분단되고,한반도 북반부에서 최고지도자가 될 사람이 소련군 대위 출신 김일성이라고는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김일성의 인생에는 수많은 '운명의 사건'들이 있었다.1930년대 김일성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빨치산 부대에 속해 항일투쟁을 벌였다.대단히 위험한 활동이었고,일본군 또는 만주군에 사살당할 위험도 있었다.'민생단사건'으로 이른바 '친일분자'에 대한 편집증적 숙청이 단행될 때 김일성은 전우의 손에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이 사건 중 하나만 결과가 달라졌어도 김일성이 집권하거나 그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권력을 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례로 '동흥습격'을 일으킨 빨치산 이홍광(1901~1935)을 과연 누가 기억이나 하는가?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장 이홍광이 이끄는 부대가 1935년 2월 조선 국경을 넘어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면을 습격한 '동흥습격'은 김일성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보천보전투'(1937)보다 규모나 전공 면에서 더 컸다.하지만 그해 사망한 이홍광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40년대에도 김일성의 '벼락 출세'에 기여한 몇몇 장면들이 있었다.1940년 김일성이 소련에 망명한 후 소련은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았다.병력을 유럽에 보내야 했던 극동전선 사령부는 외국인 빨치산까지 소련군에 동원했다.덕분에 소련 국적도 없는 김일성은 1942년에 소련군 대위로 임관했다.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는 바로 1945년 8~10월이었다.그 당시도 김일성은 매우 운이 좋았다.마침 소련군이 김일성을 파견한 곳은 평양이었다.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탸코프가 행정수도로 선택한 도시였다.가장 결정적 시기와 가장 결정적인 장소에서 김일성은 소련군 장성들 옆에 있었다.결국 그들은 김일성을 수령으로 본국에 추천했고,스탈린은 이 선택을 승인했다.
'백의사'의 김일성 암살 시도
1945년 집권 후에도 김일성은 수많은 위기에 직면했다.1946년 3월 1일 염동진이 이끈 우익 테러단체 '백의사(白衣社)'가 수류탄을 던져 김일성을 암살하려 했지만 소련군 소위 야코프 노비첸코가 몸으로 막아내 김일성을 구출했다.만일 마오쩌둥이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의 군대는 패배하고 그 자신도 한반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1953년 7·27 정전협정 체결 직후,소련 지도부 역시 전쟁을 일으키고도 이기지 못한 김일성을 해임할 기회가 있었다.그러나 1953년 스탈린 사후 내부 권력투쟁에 골몰했던 소련은 북한을 주목하지 않았고,
여자 고문 월드컵덕분에 김일성은 살아 남았다.
북한 내에서도 김일성을 공격한 당 간부들이 더러 있었다.1955년 '소련파' 박창옥 부수상은 김일성을 수상(首相) 자리에서 해임하자고 주장했다.1956년에는 '연안파' 최창익 부수상을 비롯한 여러 간부들이 그해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공개 비판했다.1957년에는 주(駐)북한 소련대사관 역시 김일성에게 "수상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라"고 했다.그러나 김일성은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1957년 가을부터 소련이나 중국에 의존하지 않는 완전히 독립적인 지도자가 됐다.
이처럼 김일성의 성공에 그의 좋은 운(運)이 기여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하지만 그의 능력 역시 무시하면 안 된다.김일성의 집권에는 그의 성격은 물론 우수한 러시아어 실력이 적지 않게 기여했다.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성공요인은 김일성의 정치모략 능력이었다.'민생단 사건' 때 상관의 의심을 샀다가 살아남은 김일성은 북한의 수령이 된 후에는 그를 감시한 소련 측 감독관들을 오히려 조종했다.결국 1940년대 소련의 부하에 불과했던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는 진정한 북한의 주인이 됐다.
북한이 떠받드는 이른바 '김일성주의'는 과연 무엇일까?북한을 연구하는 도서에서는 '김일성주의'에 관한 다양한 주장을 찾을 수 있다.'스탈린주의를 계승한 사상'은 물론 '민족주의였다'는 주장도 있다.물론 김일성이 만든 북한의 국가구조가 스탈린의 소련을 복제한 것은 사실이다.조선노동당이 북한을 지배하는 방식은 과거 소련공산당이 소련을 지배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김일성주의를 더 꼼꼼하게 보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근거도 보인다.공산주의 사상의 핵심은 미래 공산주의 유토피아 건설이다.김일성은 '공산주의 건설'보다는 '사회주의',즉 북한식 사회질서를 유지하라고 줄곧 강조했다.결국 그의 진짜 목표는 공산주의 사상의 승리보다는 자신의 권력유지였다.그래서 '김일성주의'는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요소를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정치적 이기주의의 극단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북한의 세습제도 역시 김일성 숭배를 위해 만든 것이다.1953년 스탈린 사망 직후 니키타 흐루쇼프 등 그의 후임자들이 스탈린의 유산을 없애는 것을 본 김일성은 '나는 스탈린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면 절대 안 된다'고 결심했다.그래서 장남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했다.결국 소련은 스탈린 사후 3년이 지난 뒤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지만,북한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이나 30년이 지난 지금이나 차이점이 그리 크지 않다.
'김일성주의' 수정하는 김정은
김일성의 후계자들 역시 지난 29년 동안 그가 만든 제도를 크게 바꾸려 한 적이 없다.물론 김정일이 실시한 정책은 김일성과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지난 2002년 김정일이 발표한 7·1경제관리개선조치(7·1조치)를 비롯해 개성공업지구 설립,포전(圃田)담당책임제 도입,연좌제 완화,재즈음악과 인상주의 미술 허용 등은 김일성의 기존 정책으로부터 일부 이탈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김정일은 절대 자신이 수정주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자 고문 월드컵자신이 '김일성주의자'라고 누차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그의 손자 김정은은 '김일성주의'를 노골적으로 수정하고 있다.심지어 "통일은 더 이상 필요없다"고 주장하면서 김일성이 만든 평양의 '조국통일3대 헌장 기념탑'을 철거하고,대표적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까지 해체했다.김일성이 사망한지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북한 지도자가 처음으로 김일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30년 전 사망한 김일성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아직도 매우 크다.북한에서 여전히 김일성은 신(神)과 같이 찬양을 받고 있다.하지만 김정은의 뜻에 따라 김일성주의의 핵심 교리(敎理)인 '통일'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이 교리가 영원하지 않다면 어느날 북한 주민들 중 누군가는 김일성주의 역시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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