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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오전.제주 남서부지역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비행장 일대는 고요했다.제주시에는 이날 새벽 오랜만에 호우가 한바탕 쏟아졌지만,대정지역은 푸른 하늘에 구름이 꼈다.대정에서 송악산으로 가는 도롯가 오른쪽에‘예비검속 섯알오름 유적지 1.9㎞,백조일손묘역 2.1㎞’라는 고동색 바탕의 표지판에 하얀 글씨가 새겨진 표지판 옆으로 들어서자 트럭이 지날 정도의 농로가 나타났다.가뭄 탓인지 농로는 흙먼지로 수북하게 뒤덮였다.
농로를 사이에 두고 올망졸망한 돌담이 이어졌다.짹짹거리는 촘생이(참새)와 매미의 울음소리가 화음을 이루고,찌르레기가 장단을 맞추며 사방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었다.밭 한가운데 들어선 격납고(정확하게는‘유개엄체’라고 한다)들이 묘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신발이 푹푹 빠지는 밭을 지나 격납고 위에 오르자 멀리 트랙터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격납고 사이에서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달 하순부터 시작할 마늘농사를 앞두고 밭을 갈고 있다고 지나가던 농민이 말했다.
이 일대를‘알뜨르비행장’이라고 부른다.제주도 전적지를 연구한 일본인 연구자 츠카사키 마사유키에 따르면 일제는 1932∼1933년‘제주도 비행기 불시착륙장’이라는 이름으로 20만㎡ 규모의 알뜨르비행장을 건설한 뒤 중·일전쟁 시기인 1937년에 60만㎡ 규모로 확장해 중국 폭격을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했다.이어 태평양전쟁 말기 더 확장했다.
일본은 1945년 초 전황이 불리해지자 제주도를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무대로 상정해 만주의 관동군 등 6만5천여명(조선인 징병자 1만5천여명 포함)을 제주에 집결시키고 각종 중화기를 배치하는 등 제주섬 전체를 요새화했다.알뜨르비행장을 확장하고,네이버 포토고사포진지와 갱도(동굴)진지를 구축하는 한편 송악산 해안 절벽에는 미국의 군함을 격파하기 위한 어뢰정을 배치할 동굴을 팠다.
이 일대는 한반도에서 일제의 침략전쟁 흔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 가운데 하나이자 강제동원의 상징성을 띤 곳이다.일제는 미군의 상륙 예상 지점을 제주 서남부지역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제주도민들은 이 지역에 집중 배치돼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격납고 건설에 동원됐던 중문면(당시 기준) 김영춘은 과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1944년 17살 때부터 5차례 노무에 동원돼 한 달씩 함바(기숙사)에 살며 일했다.당시 면에서 부락별로 몇 명씩 차출하라 하면 반별로 몇 명씩 동원돼야 했다”고 말했다.그는 “비행기 격납고 공구리(콘크리트)를 치기 위해 자갈이나 시멘트를 지게로 져 올렸다.위에는 풀을 덮어 상공에서 보이지 않도록 위장했다”며 “지게를 지고 격납고 위로 올라가다가 미끄러져서 넘어져 무릎뼈가 튀어나왔다”고 말했다.
한 격납고에는 2010년 박경훈·강문석 작가가 출품했던 일본군 제로센 전투기를 작품화한‘애국기 매국기’가 설치돼 답사객들의 눈길을 끈다.식민지 조선의 친일지주와 자본가들이 일본에 헌납한 전투기에 착안한 작품이다.그러나 작품이 설치된 지 14년이 지나면서 작품의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고,옆에는 정리되지 않은 오래된 쓰레기더미가 있었다.
당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2개월여 뒤 1945년 5월 안덕면 강희경은 16살의 나이에 강제동원됐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있을 때라 대신 일하러 갔어.그때는 집마다 한 사람씩은 의무적으로 가서 연병장(모슬포 일본군 부대) 일을 했지.어릴 때고 어딘지를 몰라서 어머니가 데리고 갔었어.”
동굴(갱도)진지와 고사포진지로 가는 도로변에는 안내판이 없다.동굴(갱도)진지는 20여년 전만 해도 일제 전적지를 답사하는 이들의 필수코스였으나,지금은 답사객들도 잘 다니지 않는다.좁은 길을 따라 200∼300m 들어가 나타난 갱도진지 입구는‘붕괴위험 지역’이라는 팻말과 함께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막은 상태이다.안내판은 갱도진지 입구에 있었다.
“굴에서 흙을 곡괭이로 파내면 철길 위에 도로꼬(궤도차)로 바깥으로 운반했어.밀고 가서 흙을 쏟아놓고 또 들어가고 했어.밤낮으로 교대하면서 일을 하는데,네이버 포토요령을 부릴 수가 없어.아이고,당초 꾸물꾸물도 못 해.”
갱도진지 위의 고사포진지는 제주올레 10코스가 지난다.예전에는 남쪽으로 송악산과 바다,북서쪽으로 모슬봉이 보였지만,네이버 포토지금은 다 자란 수풀로 전망이 막혔다.이곳에서 올레길을 걷던 김준일(45·서울)씨는 “제주도민들의 강제동원 실상을 자세하게 알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옛날 고사포가 흔적 정도만 알 수 있다”며 “좀 더 친절한 안내판이 필요하고,주변 나무를 정리하면 전망이 트일 텐데 아쉽다”고 했다.
남원면 김우품도 15살이던 1943년‘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됐다.그는 “그때는 어린 사람이나 나이 든 사람이나 모두 노무자로 보냈다.하루는 면사무소로 집결하라고 해서 가니 내가 제일 어렸다”며 “대정 상모리 병사 신축 공사장에서 한달 정도 일하고 집에서 와서 한 달 정도 있다가 또 가서 일해야 했다.돌을 놓고 시멘트를 쳐서 고사포진지를 만드는데도 동원됐다”고 말했다.
트랙터가 밭갈이하며 흙먼지가 날리는 사이로 제비가 낮게 날며 먹이를 찾다가 푸른 하늘 위로 올랐다.8·15가 다가왔지만,2시간 남짓 알뜨르비행장 일대에서 만난 관광객은 2명이 전부였다.제주도는 이곳에 평화대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콘텐츠의 빈약을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격납고 앞에서 5년째 300평 규모의 콩나물 콩 농사를 하는 김아무개(62)씨는 “학생들과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데 요즘은 날이 더워서 그런지 안 오는 것 같다”고 했다.콩밭 사이에서 잡초를 제거하던 김씨는 “평화대공원을 만든다는데 우리는 농지만 내놓게 된다.누가 좋아하겠나”고 했다.이 일대 주차장에는 안내문이 여럿 흩어져 있다.정비가 필요해 보였다.격납고를 둘러보려고 찾은 관광객 신승우(24·전북)씨는 “이런 유적지가 남아있다는 게 놀랍다.안내문이라도 제대로 있었으면 좋겠는데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훌륭한 유적지에 비해 콘텐츠가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격납고 바로 근처에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예비검속을 명분으로 구금된 주민 252명(41명은 행방불명)이 학살된‘섯알오름 예비검속 희생자 추모비’가 서 있다.지난 10일 문을 연‘백조일손 역사관’에는‘예비검속과 집단학살의 가해자’라는 제목으로 군과 경찰의 지휘·명령계통의 최고 책임자로‘대통령 이승만’을 적시하고 있다.4·3 시기‘가혹한 방법’을 동원해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라고 지시했던 대통령 이승만은 2003년 정부가 펴낸‘제주4·3사건보고서’에도 대량 인명피해의 최종 책임자로 나와 있다.
제주 현대사 연구자는 “알뜨르비행장 일대는 일제의 강제동원과 이승만의 실체를 알 수 있는 곳이다”라며 “평화대공원 건립에 앞서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안내판과 유적지 주변 정비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핬다.
국내외에서 추진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기념사업을 반대해온 제주4·3단체들은 최근 성명을 내고 “KBS가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진 이승만 다큐가 4·3 등 현대사의 주요 사건에 대한 일방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며 방송 중단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