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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시설 당사자,박경인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위원장을 만나다
1994년생,30세.박경인의 삶은 시설에서 시작됐다.태어나기 전부터 미혼모 시설에 있었던 그는 태어났을 땐 영아원으로,이후엔 아동복지시설에 있다가 장애인복지시설로,그 다음엔 그룹홈으로 옮겨졌다.그러다 2019년 4월‘탈시설’하여 자립했고,지금은 자립 6년 차로 지원주택에서 생활하고 있다.
시설에 있을 땐 “말 잘 듣는 착한” 발달장애인이었던 그는 이제 장애인 권리를 위한 집회나 시위가 있을 때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높이는 건 물론 재판정,국회에서도 당당히 발언하는 활동가다.
피플퍼스트서울센터 자립지원팀 활동가이자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위원장인 박경인 씨는 오는 7월 7일부터 13일까지,UN 고문방지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갈 예정이다.UN 고문방지협약에 따르면,거주시설 수용도 고문에 해당된다고 보기 때문이다.박경인 활동가는 UN에 가서‘더 이상의 시설 수용 정책은 멈춰져야 한다’고 주장할 계획이다.
UN 방문을 위한 후원금을 모금 중인 박경인 활동가를 만나러 피플퍼스트서울센터에 방문했다.박경인 활동가의 시설 연대기 그리고 탈시설 이후의 삶을 들었다.
-시설 생활은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0살 때부터죠.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설에 있었거든요.미혼모 시설에서 태어났고,이후 아이들이 많은 시설 A에서 살았고,장애인시설 B에서도 살았어요.그룹홈에서도 살았고요.시설 A에선 한 방에 15명~20명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그룹홈은 5~6명 정도가 기본이었고요.
-박경인 활동가의 삶에서 시설은 어떤 공간이었나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단체 생활하는 곳,재미있는 곳,슬픈 곳,따뜻한 곳,차가운 곳이었어요.또 경쟁을 해야 하는 공간이었죠.
-왜 경쟁해야 했어요?
사랑 받고 싶은데,아이들이 많으니까요.그러니까 다른 아이보다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뭔가 잘해야 사랑 받을 수 있고,예쁨 받을 수 있다고요.(선생님,어른들이) 나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려면 뭔가 잘해야 한다,동생들을 잘 돌보는 일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시설 생활 중 이동이 많았어요.비장애인시설에 있다가 장애인시설로 이동했죠.
비장애인시설에 있을 때 적응을 잘 못했던 것 같아요.사실 언니들한테 맞지 않았으면 괜찮았을 거에요.언니들이 종종 우리를 봐줄 때가 있었는데,초등학교 1학년 때 한번 오줌을 쌌거든요.그 때 엄청 때리더라고요.방이랑 화장실이 좀 멀었고,재래식 화장실이어서 밤에 화장실까지 가는 길이 무서웠어요.친구를 깨워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친구가 안 일어나는 거에요.결국‘에라이 모르겠다’하고 잤는데,실수를 하게 된 거죠.여튼 그 일 이후로 사람과 어울리는 게 좀 힘들었어요.그러다 장애인시설로 가게 됐어요.거긴 화장실이 재래식도 아니고 방이랑 가까워서 좋았는데,다만 문이 유리로 되어 있었어요.밖에서 안이 다 보이는 화장실이요.
-그리고 또 그룹홈으로 옮겼잖아요,그때는 왜 이동한 건가요?
나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몰라요.
-본인 의지가 아니었군요?
시설 사람들이 봤을 때,그룹홈에서‘더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요.이전에 시설에 나랑 비슷한 언니가 있었나봐요.그 언니가 그룹홈 가서 적응도 잘하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고‘경인이도 한번 보내보자’한거죠.아동 그룹홈이 처음으로 만들어지던 때였거든요.그룹홈은 장애인 4~5명,사회복지사 선생님 1명 이렇게 같이 사는 거였어요.
-그렇게 이동하며,여러 명이 같이 생활하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요?
어렸을 때부터‘난 왜 내 방이 없지?왜 없을까’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주말에 가정 위탁을 가곤 했는데 그 집,그 가족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나는 왜 이렇게 가족끼리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다 같이 살까?
사회복지사 선생님 중에 좋은 분들도 있었지만 나쁜 선생님들도 있었어요.근데 또 그 선생님들이 할 일이 많긴 했거든요.위에서 너무 많은 일들을 시키는 거죠.그러니 정작 돌봐야 하는 우리를 제대로 봐주지 못하고… 그만두는 선생님도 많았어요.일에 대한 스트레스를 나한테 화풀이하는 선생님도 있었고요.
그룹홈에서도 방은 2~3명이 같이 써야 했고,방문을 항상 열어놔야 했어요.외출도 자유롭지 않았고요.5명이서 지내다가 2명 혹은 3명 추가되어 살 때도 있었는데,그게 너무 힘들었어요.지속적으로 같이 지냈던 5명끼리는‘우리 서로 가족’이라고 하고 가족으로 살려고 했는데,다시 또 누군가 시설로 보내지고,다른 그룹홈으로 보내지더라고요‘이게 뭐야’싶더라고요.5년 동안 서로 맞춰 가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함께 지낼 거라 생각해서 노력했는데 말이에요.
막내는 걔가 유치원 때부터 같이 살았는데,중학생이 되니까 시설로 보내졌어요.ADHD 때문에 사고 많이 치긴 했지만 그래도 철 들어가고 있었거든요.이제 사춘기였는데… 마음이 아팠어요.또 다른 언니는 다운증후군이라 말을 잘 못하긴 했지만 자기 표현은 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근데 결국 또 시설로 보내지고,다른 ADHD 있는 언니도 정신장애인 시설로 보내지고… 그 때 너무 힘들더라고요.나는 그래도 그대로 있겠지 했는데,나한테도 짐 싸라고 하더라고요.일주일 뒤에 옮긴다고요.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어디로 또 옮겨 질지 모르니까.그래서 내 공간은 항상 불안했던 공간,더 이상 이 곳에서 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자리하는 공간이었어요.
-시설은 약자들을‘보호’하는 공간이라는 인식도 있는데요.여기에 대해 경인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겉보기엔 시설이 나를 보호한 것 같겠지만,사실 보호는 나 스스로 한 것 같아요.그룹홈도 선생님 한 명이 4~5명을 돌보는 건데 그게 정말 보호가 될까요?사람이 많은 시설은 더 그렇고요.
그리고 시설A에 있을 때보다 시설B로 이동하고 나서,조금 더 보호 받는다는 느낌이 있었는데,그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졌기 때문이었어요.시설B에 있을 땐 수영 배우고,수영 선수로도 활동했거든요.대회 나가서 메달 받아오는 언니들 보면서‘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생각했었죠.나중에 실제로 대회 나가서 메달을 받기도 했어요.(웃음)
근데 13살 때 그룹홈으로 이동하게 됐죠.거기선 클라리넷을 해야 했어요.오케스트라 공연을 해야 했거든요.운동을 계속 하고 싶었는데 여건이 안 됐어요.수영 하고 싶다 그러면,그냥 악기 연습이나 계속 하라고 하더라고요.수영은 시설B에 있을 때나 가능했던 거고,이제 지원 끊겨서 안 된다고.악기 배우는 것도 내 수급비로 했어요.
-어느 곳에서 살지,어떤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할지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네요.언제부터 탈시설을 고민하게 됐나요?
그룹홈 있을 때 선생님들이 너무 자주 바뀌고 힘든 때가 있었어요.그래서 성인 되면 나가서 살고 싶다고,그래서 결혼 이야기를 고등학생 때부터 한 것 같아요.
-왜 결혼을 생각했던 거에요?
그 방법 밖에 없는 줄 알았으니까요.나가서 살려면 결혼 하거나,가족을 찾아야 한다고요.
-혼자서도 시설을 나가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건 언제 알게 된 건가요?
그룹홈에 종종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와서 교육을 할 때가 있었어요.어느 날 자립캠프를 한다고 신청서를 주더라고요.그래서 신청서를 냈죠.토요일마다 한 달에 네 번 가서 회의하고,마지막엔 1박2일 캠프를 갔는데,보호자 선생님 없이 간다는 거에요.너무너무 좋았어요.(웃음) 이후로 발달장애인 인권 관련 활동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는데,그 때부터 그룹홈 선생님이랑 어긋나기 시작했어요.왜 그런 걸 하냐고 하더라고요.“너 달라졌다”면서요.그 때‘여기엔 정말 내 생활이 없구나’생각하게 됐죠.그러면서 그룹홈 친구들끼리 몰래 불꽃축제도 가는 사고도 치고.(웃음) 우리 스스로도 할 수 있다는 걸 점점 배우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직장 이슈도 컸어요.난 내 직장을 중심으로 하고,오케스트라 공연 등 그룹홈 스케줄을 거기 맞추고 싶었는데,자꾸 그룹홈 스케줄에만 맞추려고 하는 거에요.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자립을 꿈꿨고,진짜로 자립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린 걸로 아는데요.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지 못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선생님들은 “그냥 조용히 나가라”는 식이었거든요.예전에 있었던 시설 선생님들도 “좀 더 있어봐.”라고 하거나 “결혼하면서 나가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거나… 도와주지도 않았어요‘네가 얼마만큼 하겠어?과연 정말 하겠어’이런 생각으로 그냥 내버려둔 것 같아요.결국 자립지원금도 못 받았어요.
그룹홈 선생님이랑 인권 활동하는 거 관련해서도 계속 부딪히고,그 때 선생님이 다이어트도 시키고 있었거든요.먹고 싶은 거 못 먹게 하고,야채만 계속 먹으라고 하고요.우리가 예뻐지고 몸도 날씬해져야 OO오빠랑 결혼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그래야 예쁜 웨딩 드레스도 입는다고‘여자는 조금 날씬해져야 한다,설거지도 잘하고 밥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자주 들어서 압박감이 심할 때였어요.그 선생님의 요구에 맞추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그래서 자살 시도도 하게 됐죠.정신병원에 있을 때도 내 얼굴이 너무 싫어서 지우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세수도 매일 여러 번 했는데,그래도 안 지워지더라고요.그렇게 하면 내 얼굴이 지워 질 줄 알았어요… 그렇게 1년 정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하고,다시 자립 준비를 시작한거죠.
일단 일부터 다시 구해야 하니까,주변 언니들한테 부탁해서 이마트에서 포장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는데,너무 빡세더라고요.3개월 정도 하다 그만두고,김포공항에 있는 한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했어요.고등학교 때도 바리스타로 일했으니까 일은 좋았어요.근데 또 일 스케줄이랑 그룹홈 스케줄이랑 맞추고 이런 거에 너무 스트레스가 쌓여서,LH에 신청서 내고‘그냥 혼자 살아보자’고 정했어요.혼자서 하느라 정말 고생이었어요.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주민센터 가서 물어보고,겨우겨우 했죠.
막상 또 나오려고 하니까 걱정되긴 하더라고요.보통은 결혼해서,혹은 문제가 있어서 나가니까.마치 내가 문제행동을 일으켜서 나가는 것 같고,내가 문제가 있는 사람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최대한 주변 사람들한테 피해주지 않고 나가려고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과정은 그렇게 힘들었지만,자립 생활을 시작해서 어떤 점이 좋았나요?
사람들을 내 집에 초대할 수 있는 것.내 집으로 배달이 오는 것.그리고 방 꾸미는 거요.한번은 완전 키티 방을 한 적이 있어요.키티 침대 패드,이불,매트,커튼… 전부 키티였어요.(웃음) 돈도 엄청 많이 들었죠.근데 지금은 아니에요.그리고 옷도 자유롭게 입을 수 있고.벗을 수도 있고!(웃음)
-피플퍼스트센터(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중심이 되어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자립지원센터)에서 활동하게 된 과정도 궁금해요.
그 부분은 좀 복잡한데요.(멋쩍은 웃음) 2020년 1월부터 일하게 됐는데,일하면서 완전 양아치였어요.(웃음) 머리도 금발 머리인데 지각은 밥 먹듯 하지,일하는 시간에 계속 졸지…‘월급 루팡’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죠.그러다 (정신질환 관련 복용약을 중단한 것으로 인한 문제 발생으로) 입원하는 일이 있었고,이후 퇴원한 뒤엔 진짜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 다짐했어요.
그때‘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주변 사람들이 정말 많이 도와줬거든요.당시에 나를 잡아 주는 사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요.나에게 등 돌리지 않고 손 잡아줬던 사람에게 고마워요.그래서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누가 힘들 때 그 사람 옆에서 견뎌주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돕는다는 말보다,같이 힘내서 견뎌줘야 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그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 곧 UN 고문방지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러 제네바로 가시는데요.어떤 이야기를 할 계획인가요?
한국 대표로 가는 거라 좀 긴장되기도 한데요.일단 예산이 있어야 해서… 모금 중인데 빨리 후원금이 다 모였으면 좋겠어요.UN에선 “한국은 시설을 유지하려고 하는 일에 많은 돈을 쓰고 있다”고 말할 예정이에요.(인터뷰가 진행된 직후인 6월 25일,서울시의회는 본회의에서 '탈시설 지원 조례'를 시행 2년만에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폭력이라는 건,꼭 때리거나 욕하는 게 아니라 시설에 사람을 두는 게 폭력이라고요.이런 상황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그러려면 우리에게 자원이 필요하다고요‘지원’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그래서‘자원’이 필요하다고 봐요.
-우리 사회가 탈시설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요.
시설 밖으로 나오는 걸 자연스러워 했으면 좋겠어요.똑똑한 사람만 탈시설 하거나,혹은 문제를 일으켜서 탈시설 하는 게 아니라,당연히 자립을 할 수 있는 거라고.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만약 탈시설이라는 목표가 달성된다면,그 이후엔 무엇을 하고 싶어요?
바리스타 다시 해도 될 것 같은데,사실 손목이 아파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심리상담 공부 하고 싶어요.그리고 탈시설이 된 이후라 해도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은 계속 필요하지 않을까요?또 탈시설은 했지만 집이 없는 사람도 있을테고요.안정된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동료가 더 많이 생기는 일 등 고민들을 계속 이어갈 것 같아요.오래오래 피플퍼스트센터에 남아서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하고 싶어요.(웃음) 장혜영 전 의원이 만든 노래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를 정말 좋아하는데요.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아보려고요.
※ 박경인 활동가의 UN 방문 후원금 모금은 피플퍼스트서울센터 홈페이지에서 안내하고 있다.http://peoplefirsts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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