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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인터뷰 -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945년 일제로부터 주권 회복
1948년엔 미국서 통치권 이양
두 개의 역사 광복절로 통합돼
현재까지‘건국기념일’없는 것
이승만,농지개혁한 진보 우파
미국의 앞잡이로 보는 건 오해
李,형곡동 로또김구 제거했다는 것도 낭설
서로 지지했던‘상호보완’관계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E H 카)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 말에 비판적이라고 했다.이러한 해석적 역사관이 특정 집단의 입장과 이권 위에서 역사 곡해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다.광복절을 앞둔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신촌캠퍼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다음은 김 교수와의 일문일답.
―광복절마다 이른바‘건국절 논란’이 불거진다.어쩌다 한국은 건국 기념일이 없는 나라가 됐나.
“그 뿌리를 찾아보면 시작부터 이념이 개입되어 있었다.일제강점기가 끝난 1945년에는‘광복’보다‘해방’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당시 가장 많이 읽히던 신문도‘해방일보’였고‘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과 같은 학술 서적의 제목들도 마찬가지였다.그러다 점차 해방이라는 용어가 좌파적 색채가 강하다는 이유 등으로‘광복’이라는 단어로 대체됐다.당초‘독립기념일’등으로 불리던 1948년 8월 15일에도 삼일절,개천절 등과 운율을 맞추고자‘광복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이렇게 1945년 8·15와 1948년 8·15가 모두‘광복절’로 통합되면서,1948년 8월 15일의 의미는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광복의 의미는 무엇인가,형곡동 로또건국과는 무엇이 다른가.
“‘광복’은 말 그대로 어둠 속에서‘빛을 회복한다’는 뜻이다.1945년 8월 15일은 일제의 어둠으로부터 빛을 되찾은 날이다.반면 정치학적으로는 주권의 회복을 의미한다.1948년 8월 15일은 독립정부가 수립되어 미 군정으로부터 통치권을 이양받은 날이다.건국이란 특정한 시간·공간·인간에 기반한 정치적 약속공동체를 세우는 것이고,다른 국가들이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건국절 논란’에 대한 의견은.
“소모적인 이념 대립보다 국민 통합의 방안을 제시하고 싶다.1945년은‘해방 광복,1948년은‘독립 광복’으로 함께 기리면 된다.이를테면 정부가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2025년 광복절은‘해방 광복’80주년이자‘독립 광복’77주년이 된다.”
―건국과 광복의 의미가 정치 이념 대립으로 변질된 오늘날,해법이 있을지.
“보다 폭넓은 마음으로‘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전승하는 역사의 가치를 되새길 시점이다.현재의 독립유공자법은 일제에 국권을 피탈당한 시기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일제에 항거한 공적만을 인정하고 있다.그 결과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반탁독립운동과 독립촉성운동 등에 참여했던 많은 유공자들은 잊히고 있다.독립 공적 범위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정부 수립까지,그리고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 독립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은 날까지로 확대할 필요가 있다.”
―1945년 해방,1948년 독립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해 수립된 대한민국 독립정부가 오늘에 이른 것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의미가 깊다.1917년 러시아 공산화,1949년 중국 공산화,1975년 인도차이나반도 공산화로 이어지던 흐름 속에 대한민국은 조선인민공화국에 흡수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냈다.그러나 헌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하는 통일된 독립국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까지 남은 결함이다.”
―현시점에서‘통일’은 요원하게 들리는 게 사실인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조직된 한국광복군이 약 300명이었다.일본군의 숫자는 700만 명이 넘었다.일제에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그럼에도 독립 정신을 잃지 않고 항전한 광복군의 활동이 있었기에 세계로부터‘패전국 일본의 일부’로 취급받지 않을 수 있었다.1945년 해방이 세계적 흐름 속에서‘도둑처럼’갑자기 닥쳐왔듯이 통일도 그럴 수 있다.한국광복군의 정신을 본받아 대한민국 통일 광복을 평화롭게 이룩하려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광복절을 맞아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연구해왔다.그의 과(過)에 대해 설명한다면.
“과오도 많은 인물이다.가장 먼저 1956년 3선 출마다.물러나서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운동가들을 기억할 수 있게 제도화에 힘써야 했던 시기였다.김영삼 당시 자유당 국회의원도 3선 출마에 반대하면서 “국부로 남으셔야 한다”고 호소까지 했었다.둘째,그의 측근이었던 이기붕 전 국회의장의 아들을 입양한 것.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였던 이 전 대통령이‘효령대군파’였던 이 전 의장의 아들을 무리하게 입양하면서 이기붕으로의 권력 쏠림이 가속화됐고,형곡동 로또정치 지형이 망가졌다.셋째,임기 중에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룩하지 못한 것.독립운동가 출신인 만큼 더 유리한 조건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는데,아쉬운 대목이다.”
―공(功)은.
“초지일관의 독립 정신.1898년 독립협회 활동을 시작으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기까지‘독립운동’외길을 걸었다.끝내 한국이 독립국가를 이룩한 것이 그 혼자만의 업적일 순 없지만,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그의 이름을 빼놓을 수는 없다.둘째,아직 미국인들이 유럽으로 유학 가던 시절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한·미 관계의 토대를 닦은 점.셋째,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수립한 것.넷째,농지개혁을 이룩한 것.다섯째,6·25전쟁 당시 국제사회의 원조를 이끌어 내고,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여섯째,교육 기반을 확대한 것.일곱째,원양어업을 개척한 것.여덟째,형곡동 로또원자력 기반을 구축한 것.아홉째,38선 이북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것 등 많이 있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해 바로잡고 싶은 오해가 있다면.
“이승만을‘미국의 앞잡이’라고 보는 오해가 있다.이승만은 일본의 하와이 공습 이전까지 일본과의 평화를 꿈꾸던 미국을 비판하는 데 앞장서왔다.오죽하면 미국이 이 전 대통령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상비계획(Plan Everready)까지 갖고 있었을 정도다.그가‘보수 우파’의 아이콘 격으로 여겨지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전제군주정에 반대하다 투옥됐고,독립운동에 헌신했다.해방 이후에는 보수 지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실시했다.당시로는 진보 우파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이승만이 김구를 제거했다는 낭설도 있는데,이승만과 김구는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된 이후에도 김구는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이승만을 지지했다.흔히 이승만은 외교독립운동,김구는 무장독립운동이라고 잘라 나누는 이분법은 잘못됐다.김구의 무장독립운동은 이승만의 외교적 발언권을 강화해줬고,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인 1940년 2월 이승만은 김구에게 보낸 서한에서 무장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주문하기도 하는 등 둘은 상호보완적 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