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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교제살인 사건만 세어봐도 숨진 여성은 138명에 달한다.그런데 여전히 교제살인의 법적 정의도,공식 통계도 없다.예방법과 처벌법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강의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김지은씨(가명·19)는 지나가던 대학 동기의 얼굴이 밝아 보여서 자기도 모르게 불러 세웠다.“박민지(가명·19)!너 어디 가?” “남친 만나러!” “어?너 남친 생겼어?” “생긴 지 얼마 안 됐어!” 5월 말이었다.
불과 일주일 뒤인 6월8일 밤,여자 동기들이 모여 있는 단체 카톡방이 술렁였다.누군가 계속 박씨를 태그했다‘@박민지‘@박민지 대답 좀’민지의 친언니라는 사람에게서 받았다는 모바일 부고장이 단톡방에 올라온 뒤였다.“당연히 다들 보이스피싱 같은 건 줄 알았어요.링크를 누르기만 해도 개인정보가 빠져나가는 그런 거 있잖아요.” 한 친구가‘그럼 내가 장례식장에 전화해서 확인해보겠다’고 했다.곧 단체 보이스톡이 걸려왔다.전화를 받고는 모두가 아무 말 없이 흐느꼈다.
그날 이후 단톡방은 그대로 멈췄다.한 명이 메시지를 읽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숫자‘1’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다가오는 첫 여름방학 때 대학 동기들끼리 갈 여행 계획을 정하는 투표도 의미가 없어졌다.가장 체구가 작았지만 가장 적극적이고 활달했던 민지씨가 주도하던 일이었다.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 대부분은 장례식장이 처음이었다.이수진씨(가명·20) 역시 마찬가지였다.하얀 제단 위에 놓인 친구의 모습이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영정사진으로 따로 찍은 사진이 없잖아요.스무 살이니까.그래서 그냥 민지가 브이를 하고 찍은 사진이었어요.민지 언니분이 저를‘인생네컷 사진에서 봤다’고 기억해주시는데 그 순간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그런데 제가 더 울면 안 되는 거잖아요.”
조문객들이 앉은 테이블 사이로‘남자친구‘심정지’라는 단어가 드문드문 들렸다.친구들은 민지씨가 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장례식장을 나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뉴스를 봤다.경기 하남에서 20대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흉기로 살해당했다는 내용이다.김지은씨와 이수진씨는 자신의 친구 이야기라는 걸 직감했다.전형적인 교제살인이었다.“가장 환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던 사람이 돌변해서 가장 고통스럽게 죽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김지은씨는 몇 번이고 이 말을 되뇌었다.
유가족은 SNS를 통해 민지씨가 “가해자의 성관계 요구 발언과 질투심에 점점 부담을 느껴” 헤어졌다고 말했다.피해자와 가해자가 사귄 기간은 고작 19일이었다.이별을 통보받고 여섯 시간 뒤인 그날 밤 11시,가해자는 전 연인을 아파트 1층 바깥으로 불러내 준비해온 칼을 휘둘렀다.119 구급대원의 연락을 받고 내려간 아버지와 오빠는 민지씨가 피 흘리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유가족은 가해자가 “칼을 준비하고 CCTV가 없는 곳을 고른 치밀한 계획범죄였으면서 체포되자마자 조현병을 언급했다”라며 분노했다.
이 비극은 특이한 사건이 아니다.지난 3개월 동안 일어난 교제살인 사건만 8건,숨진 피해자는 9명(〈그림〉 참조)이다.열흘에 한 명씩 죽은 셈이다.언론에 보도된 사건만 추려도 이 정도다.16년 전인 2009년부터 해마다 언론에 보도된 교제살인을 집계해온 여성 인권 시민단체 한국여성의전화 자료에 따르면,지난해‘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로부터 살해당한 여성은 최소 138명,살인미수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11명이다.최소 2.6일마다 여성이 살해당하고,1.2일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는 셈이다.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재 정부가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교제폭력 및 살인 관련 통계는 전무하다.여성가족부(여가부)는 여성폭력 상담전화 1366번으로 들어온 상담이나 상담기관으로부터 모은 상담 건수를 통해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할 뿐이다.여가부 권익증진국 관계자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법적으로‘교제관계‘친밀한 관계’에 대한 정의가 없기 때문에,상담 요청이 들어왔을 때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를 물어본 뒤‘교제관계’라고 답하면 체크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지난해 1366을 통해‘교제관계’내에서 발생한 폭력으로 들어온 상담 요청은 9177건(하루 25.1건)이었다.
경찰도 마찬가지다.2016년부터 112신고 코드에‘교제폭력’코드를 만들었지만 역시‘교제폭력’에 대한 법적인 정의는 없는 상태라 임의로 통계를 관리하고 있다.지난해 112를 통해 들어온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7만7150건(하루 38.2건),검거된 피의자는 1만3939명이지만 이 중 구속된 상태에서 수사를 받은 사람은 310명(2.2%)에 불과하다.
법적 정의도,레버쿠젠 대 몰데공식 통계도 없어
주무 부처에서도,레버쿠젠 대 몰데사법기관에서도,그 어디에서도 공식적인 통계를 내지 않는 이유는 실제로 교제폭력에 대한 법적 정의가 없기 때문이다.국내에는‘교제폭력’이라는 명칭도 뒤늦게 도입됐다.오랫동안‘데이트폭력’이라고 불렸으나‘데이트’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이 커지자 최근 몇 년 동안‘교제’라는 단어로 바뀌었다.하지만‘교제’라는 단어도‘데이트’를 한국어로 바꾸어놓았을 뿐이다.해외에서는‘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IPV·Intimate Partner Violence)’이라고 폭넓게 명명한다.교제하는 관계라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위험성을 담은 것이다.국제연합(UN)에서 쓰는 공식 용어이기도 하다.
명칭도,통계도 없으니 정책과 법안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현재 교제폭력을 규제하는 법은 없다.성폭력처벌법(1993년 입법)·가정폭력처벌법(1997년 입법)·스토킹처벌법(2021년 입법) 등이 있지만,교제폭력은 사각지대다.그나마 2018년에 제정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서‘가정폭력,성폭력,성매매,성희롱,지속적 괴롭힘 행위와 그 밖에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정보통신망을 이용한 폭력 등’을 여성폭력으로 규정해놓았으나,정작‘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이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않았다.게다가 기본법이라는 특성상 구체적인 규제나 처벌 조항은 따로 없다.
따라서 현재 교제폭력은 형법상 폭행죄,협박죄 등으로 처리된다.경찰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거나 가해자에게 접근금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범죄는 아동학대·가정폭력·스토킹 범죄뿐이라,교제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경찰청 관계자는 “보복이 두려운 피해자가 가해자가 처벌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경찰도 더 이상 개입할 방법이 없다.접근금지 명령은 (가해자) 처벌이 아니라 (피해자)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일선 경찰관들도 부담이 덜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교제폭력은 근거 법률이 없으니 보호조치를 할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현재 교제폭력 규제 공백을 메우기 위한 노력은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다.하나는 예방,다른 하나는 처벌에 중점을 두고 있다.6월4일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보건복지여성팀 입법조사연구관은 “‘거절 살인,친밀한 관계 폭력 규율에 실패해온 이유: 강압적 통제 행위 범죄화를 위한 입법과제”라는 제목의 현안 분석 보고서를 냈다.그는 새로운 법을 또 만들기보다는 이미 운영 중인 가정폭력처벌법을 제대로 개정해서 친밀한 관계에 의한 폭력까지 포괄해 예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민숙 입법조사연구관의 문제의식은 일선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김수정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은 “성폭력·가정폭력·스토킹에 관한 법률이 개별적으로 있다 보니 각각의 피해를 지원하는 체계도 별개인 경우가 많다.피해자는 동일한 가해자와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다양한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은데,여러 기관의 다른 변호사로부터 법적인 지원을 받아야 하거나 성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한 의료 지원을 각각 다른 상담소에서 받아야 하는 식이다.상담소에서는 연계를 통해 어떻게든 피해자가 여러 곳을 다녀야 하는 걸 줄이고자 하지만,근본적으로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하나의 법제 아래 여성폭력을 포괄적으로 정의해서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개정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예방법뿐만 아니라 처벌법 논의도 지지부진하다.2016년 2월 박남춘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데이트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을 처음으로 대표 발의했으나 제19대 국회가 문을 닫으면서 자동으로 폐기됐다.이후에도 여러 차례 처벌법이 발의됐지만 역시 모두 폐기됐다.지난 4월10일 전 남자친구의 폭행으로 열흘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사망한 이효정씨(19)의 어머니는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려‘교제폭력에 대한 수사 매뉴얼 전면 개선‘가족·연인 간 폭행·상해치사,면식범인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양형 가중‘교제폭력처벌법 마련’등을 요구했는데,닷새 만에 5만명 동의를 받아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된 상태다.
정부는 여전히 홍보와 교육만
하남에서 일어난 교제살인 사건 피해자 박민지씨의 친구들도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을까 봐 우려스럽다고 입을 모았다.“가해자가‘미래가 창창한’20대 남성이고,초범이잖아요.재판장에게 반성문 몇 장 쓰면‘죄를 뉘우치고 있는 점’이 참작될 거고,조현병이라는 주장도 받아들여지면‘심신미약’이기 때문에 형량은 더 낮아지겠죠.민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데도요.” 친구 김지은씨가 말했다.실제로 2016~2018년에 발생한 교제살인 사건 108건의 판결문을 분석한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오마이북)에 따르면,레버쿠젠 대 몰데수형 기간을 수량화할 수 없는 무기징역 8건과 집행유예 2건을 제외한 98건을 대상으로 평균 형량을 계산한 결과 가해자의 평균 형량은 14.9년이었다.고의성이 없는 치사로 판정된 사건만 따로 빼서 보면 평균 형량은 6.6년에 불과했다.
박민지씨의 친구들은 기말고사 기간임에도 계속해서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김지은씨는 그 이유가 단 하나라고 했다.“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스무 살 대학 새내기가 여행 계획을 세우는 대신 이런 다짐을 하는 동안,정부는 무슨 노력을 하고 있을까?지난 5월6일‘수능 만점 의대생’이 헤어지자는 여자친구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는 사건이 보도되자 여가부는 5월14일‘교제폭력 방지 및 피해자 보호강화 방안 논의’를 위해 여성폭력방지위원회 제2전문위원회를 열었다.법무부,경찰청 등 관계 부처가 한자리에 모였다.당시 회의에서 어떤 구체적인 방안이 오갔느냐는 질문에 여가부 관계자는 “교제폭력 관련해서 홍보나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라고 답했다.피해자들은 예방과 처벌을 원하는데,정부는 여전히 홍보와 교육 수준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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