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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의 멘토들


장면 1.하의경청(下意傾聽),심사숙고(深思熟考),만사종관(萬事從寬),이청득심(以聽得心).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하며 깊이 생각하고 오래 고민한다.또 모든 일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처하며 상대방의 말을 경청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다는 뜻이다.인문학 강의에서나 나올 법한 말인 듯싶다.이 사자성어가 등장한 강연 주최는 스타트업 CEO 모임인‘스케일업 CEO클럽’이다.강연자는 삼성전자 스마트폰‘갤럭시 성공 신화’의 주인공 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현 국민의힘 국회의원).

그는 “CEO 경험을 살려 기업 성장을 고민하는 스타트업 CEO가 견지해야 할 리더의 태도에 대해 조언하는 자리”였다며 “조직과 유관부서와의 소통과 협업을 이끌어내고,조직 내에 사일로(silo·이윤을 독점하려는 사업부들의 이기주의 때문에 기술 공유가 어려워지고,시너지도 없이 오히려 기술력만 쇠퇴시키는 현상)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며,전문 분야 외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으로 강의를 마무리했다”고 소개했다.이날 행사에 참여한 스타트업 대표들은 “알차고 깊이 있는 경영 수업을 받았다” “최근 인문학적 갈증이 났는데 덕분에 해결이 됐다” “경영 역량 강화에 도움 됐다”며 반색했다.

장면 2.삼성전자와 삼성SDS 출신 전동수 전 사장이 스타트업 투자·육성 전문가로 변신했다.그는 삼성 퇴직 후 2021년 더인벤션랩과 손잡고 기술 기반 초기 창업 스타트업에 투자하는‘디지털 이노베이션 투자조합 1호’펀드를 공동 결성하면서 스타트업 육성에 눈떴다.4호 펀드까지 성공시킨 후(투자 기업 생존율 100%) 최근 전직 삼성전자 고위직 임원들과 함께 전문가 그룹‘아브라삭스’를 설립했다.전 전 사장을 비롯해 반도체와 소부장,정보기술(IT),바이오 분야에서 연구개발(R&D),한화이글스 구장사업화,스마트팩토리,한화이글스 구장마케팅·브랜드,인사·재무,해외 영업 등 경력이 30년 이상 된 전문가 18명이 참여했다.단순 재무적 투자자에서 벗어나 이들 퇴직 임원이 초기 창업 기업에 자신들의 재능과 경험을 전수하고,실질적인 성과로 만들어나간다는 복안.시스템반도체,우주항공,생성형 인공지능(AI),로보틱스를 비롯한 다양한 기술 기반 스타트업에 우선 투자하고,아브라삭스 멤버가 전문적인 자문을 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이런 사례는 비단 삼성그룹 출신 CEO만의 전유물이 아니다.국내외 대기업에 몸담았던 선배 CEO,고위 임원 중 인생 2막의 방점을 스타트업 투자·육성에 찍는 이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그 덕에 멘토링받은 스타트업이 유니콘으로 등극하는 등 성공 사례 역시 증가하는 추세다.

대표적인 예가 베스트셀러‘초격차’로 유명한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과 배달의민족이다.권 회장이 퇴직 전부터 꾸준히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김봉진 배민(법인명 우아한형제들) 전 의장은 권 전 회장 덕분에 유니콘 기업 등극에 힘을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직 CEO가 스타트업 육성,위기관리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사례도 있다.홍범식 LG 사장은 식당 테이블에서 주문할 수 있는 주문오더 1위 기업 티오더의 멘토로 유명하다.홍 사장은 티오더를 접하면서 성장 잠재력을 유심히 살폈다.이후 권성택 대표를 불러 기업 성장에 대한 조언은 물론 LG 계열사 협업을 성사시켰다.권성택 대표는 “티오더가 LG유플러스와 합작해 더본코리아 등 유명한 요식 업체에 SaaS 형태의 자동오더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었다”며 “홍 사장이‘빠르게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정도 경영은 천천히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더 길게 보면 제일 빠른 길이고 지름길’이라고 조언해줬는데 대기업 기술 탈취 사건 때 위기관리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5월 22일 스타트업 CEO 모임 Scale-up CEO Club에서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전직 CEO로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고동진 의원실 제공)
고동진 전 삼성전자 사장(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5월 22일 스타트업 CEO 모임 Scale-up CEO Club에서 스타트업 대표들에게 전직 CEO로서의 경험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고동진 의원실 제공)
멘토를 회사로

이런 인연 끝에 멘토링하는 회사에 전직 CEO가 정식 출근하는 사례도 생겼다.유아용품 스타트업 꿈비의 박영건 대표는 2018년 유준열 전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 사장과 인연을 맺은 후 코칭을 받았다.처음에는 유 전 사장이‘재능기부’차원에서 무료로 경영 전략 등을 조언했다.6년 가까이 인연을 이어가던 중 지난해 꿈비는 상장에 성공했다.회사 상황이 나아진 박 대표는 유 전 사장을 상근고문으로 모셨다.

풀무원,동원,매일유업 등 국내 유수 식품 대기업에서 일하다 사모펀드 계열 식품 회사 디자인밀 대표까지 지낸 윤정호 씨는 지금은 식품·맛집 IP 스타트업‘캐비아’의 부사장으로 맹활약 중이다.

박영식 캐비아 대표는 “기존 주력 사업이던 간편식 이외에도 IP를 활용한 사업 영역의 확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이를 위해 경험이 많은 전문가가 필요한 시점에 당시 윤 대표를 만났다”며 “B2C·온라인 매출에 집중하던 때인데 맛집 IP를 활용한 급식,식자재 등 B2B 신규 사업을 확장해보라는 조언을 듣고 실행에 옮겼더니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박 대표는 윤 대표를 부사장으로 영입,경영 시스템 안정화,수익 다각화 등을 하나하나 실현하고 있다.

전직 CEO 경험은 산업 재산

전직 CEO의 조언을 받아본 스타트업 창업자와 경영진들은 입을 모아 그들의 경험은 곧‘산업 자산’이자‘공공 재산’이라고 치켜세운다.폐기물 순환 경제 생태계를 구축 중인 스타트업 수퍼빈의 김정빈 대표는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 조언을 떠올리며 “기업을 이끌었던 대기업 CEO들은 우리 사회의 자산이다.그분들의 경험과 판단,지혜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산업 생태계 지적 재산으로 남아야 한다”면서 “책이나 인터뷰도 좋지만,후배 경영자와 마주하며 맞춤형 조언이 가장 중요한 지식 승계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박수호 기자 ]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2호 (2024.06.05~2024.06.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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