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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투병 중인 91세 윤증호씨 "이웃들이 주신 도움,사는 동안 갚아야"【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이가 들수록 이웃과 더불어 나누고 사는 게 행복하다는 걸 느낍니다.얼마 전 세상을 떠난 아내가 입버릇처럼 말했어요.'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야 한다'고.생전 유지에 따라 아내 장례식을 치르고 남은 부의금을 자녀들과 상의해서 사회에 기부한 것뿐이에요."
윤증호(91) 전북 순창군 대한노인회 순창군지회 고문이 지난 3월 29일 별세한 아내 오순이(87) 전 오순이대덕식품 대표 장례식을 치른 뒤 남은 부의금 1000만 원을 최근 순창군에 기부했다.
윤 고문은 저승으로 가는 아내의 '마지막 노잣돈'이었을 부의금을 기부한 데 대해 "순창군민들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분이 아내 가는 길을 위로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라며 "아내와 순창에서 행복하게 살았고,아내가 평소에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서 순창군에 기부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내와 100세까지 살자고 다짐했는데
지난 4월 17일 오후 2시 순창읍 전통고추장민속마을 내 오순이대덕식품 자택을 찾았다.아내를 떠나보내고 홀로 지내는 집안은 정결했다.한쪽 벽면에는 재작년 윤 고문 구순 생일 때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이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이라는 문구 위에 걸려 있었다.윤 고문이 아내 왼쪽 어깨 위로 팔을 감아 얹은 사진에는 "사랑합니다.감사합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다른 벽면에는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이 윤 고문 부부와 활짝 웃는 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윤 고문은 "내가 다섯 남매고,자녀도 다섯 남매인데,육십에 일찍 돌아가신 큰 형님 빼고는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라며 "우리 집안이 장수 집안인 건 맞는 것 같은 게… 할머니가 100세까지 사셨고,슬롯 마피아다섯째 작은 아버지가 100세에 돌아가셨고,재작년인가 작은 어머니가 98세에 돌아가셨다"라고 담담하게 회상했다.
윤 고문은 "아내하고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자고 다짐했는데…,무료 칩 보증금 없음 카지노 한국어잘 생활하던 아내가 집안에서 갑자기 쓰러졌을 때 나 혼자였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정신이 아득하다"라며 "그래도 나처럼 아프지 않고 (하늘나라로) 갔으니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윤 고문은 이 대목에서 현재 위암 투병 중이라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했다.
"작년에 배 아래쪽이 아파 광주 병원에서 담낭 제거 수술을 했어요.10년 전쯤 전립선암이 발견돼 꼬박 10년이 걸려서 치료를 끝냈는데… 갑자기 위암이라고 해요.나이도 많고 그래서 항암 치료는 안 하고,검사 받고 약 먹고 그러고 있는데… 담낭 수술할 때나 검사받을 때 얼마나 아프던지,돌이켜보니 아내가 아프지 않고 간 게 고맙게 생각되더라고요."
중학교 졸업 후 이용사 자격증 취득
윤 고문은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 출신으로 1934년생,올해 만91세다.윤 고문의 설명에 따르면,그는 남들보다 늦은 9살에 남원 주생초등학교에 입학한다.해방 다음 해인 1946년 부친이 사망해 전주사범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다음 해 남원 금지중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진학은 한참 나이 어린 후배들과 함께 다니는 것도 망설여지고 군대 갈 나이도 돼 포기하고 중학교 졸업 후 직업에 대해 고민했다.몸이 약한 편이어서 농사일 대신 기술을 배워야겠다며 이용학원을 다녔다.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발사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손님 머리 감기기부터 시작해 3년 정도 이발 기술을 배운 뒤 면허증 없는 무허가 이발사로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윤 고문은 이용학원 6개월 과정을 수료하고 필기와 실기 시험 모두를 통과하고 이발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당시 남원읍에서 종업원 7∼8명이 근무하던 꽤 큰 규모 이발소에서 실습을 시작했다.
윤 고문은 25세 때 순창군 동계면 상외령 출신의 오순이 여사를 만나 결혼했다.신혼부부는 결혼 2년 후 남원에서 순창읍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윤 고문은 월세였지만 '우리이발소'를 개업했다.경험도 없고 가진 것 없이 시작했기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게다가 개업 후 8개월째 되던 어느 날 순창군으로부터 무허가 건물이어서 철거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통지를 받고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하지만 윤 고문은 순창읍내에서 이발소를 계속 운영하며,온라인 카지노 무료 토너먼트 슬롯혼자서는 벅찬 탓에 솜씨 좋은 이발사도 채용했다.손님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윤 고문은 "현재 순창군 이발소는 총 10개소 정도 되지만 1960∼1970년대에는 순창읍에 12개 정도,순창군 전체에 50여 개소가 있었다"라며 당시 치열했던 이발업소 현황을 들려줬다.
"이발소끼리 서로 시기하고,요금 할인,손님 빼앗기 등 경쟁이 치열했어요.그래서 이발사들 단합을 위해 '사우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어요.회칙을 마련하고,부부 동반 모임을 한 달에 한 번씩 가졌어요.친목을 도모했더니 효과가 있더라고요.그 일로 감사패도 받고,이용사협회 회장을 20년 가까이 했어요.이용업에 30여 년 종사하고 60세부터는 이용업소를 후배에게 이양했습니다."
윤 고문이 전해준 아내 오순이 여사는 생활력이 강할 뿐 아니라 손재주도 좋고 눈썰미가 남달랐다.젊은 시절에는 행상을 하기도 하고,한복을 만들면서 집안 살림에 힘을 보탰다.대구,토토 사이트 메이저 베스트 온라인 카지노광주 등지에서 원단을 떼어다 한복을 만들었는데 단골손님이 늘어났다.오 여사는 평생 파마를 해본 적이 없다.지금까지 낭자머리를 하고 있다.그래서 당시 '낭자 한복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 여사가 고추장 사업에 뛰어들게 된 데에는,한복 만드는 것보다 고추장 제조 판매가 더 나을 것이라고 조언한 지인 덕분이었다.'오순이 명의'로 식품 허가도 취득하고 고추장 사업을 시작했다.'순창'을 대표하는 전통고추장민속마을로 1996년 이주해 오순이대덕식품을 연 이후에도 고추장 담그기와 한복 만들기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육체적으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살았단다.
위암 투병으로 60kg 몸무게 46kg으로 줄어
윤 고문은 전통고추장민속마을과 관련해 뜻밖의 이야기를 또 하나 꺼냈다.
"오순이대덕식품 건물 지을 때 은행 빚이 1억 원가량이었어요.외지인들이 우리 고추장민속마을을 방문했을 때 잘 알아보라고 마을 어귀에 표지석을 세웠는데,1300만 원이 들었어요.표지석은 개인 돈으로 세웠지만 마을 주민들 단합을 위해 가게 이름을 넣지 않고 '민속마을 일동'이라고 새겼어요.그런데… 당시 대출금 상환 전이어서,아내에게 너무 염치가 없어 표지석을 세우기 하루 전날에야 실토했어요."
윤 고문은 자신의 제2고향이자,아내와 자녀들 고향인 순창에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남모르게 7000여 만 원이 넘는 돈을 사회에 기부했다.전통고추장민속마을 표지석 건립을 포함해 불우이웃돕기성금,옥천장학회 장학금,<순창읍지> 발간 후원,순창읍경로당 개축공사 성금,미래발전협의회·옥천향토문화연구소 후원 등 기부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소문이 안 나게 한 선행이었지만,좁은 지역 사회에서 윤 고문의 기부는 '쉬쉬' 하며 알려졌다.윤 고문은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순창군이 수여하는 '순창군민의 장 공익장'을 2021년 수상한 바 있다.
윤 고문은 "아내와 열심히 일하면서 2남 3녀를 키웠는데,4남매를 대학 공부까지 시킬 수 있있던 건 오로지 아내 공이 컸다"라며 "자녀들은 현해 서울,전주 등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고 순창에 자주 찾아오는 편"이라고 귀띔했다.
윤 고문은 벽에 걸린 아내 사진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다 남은 생에 대한 바람을 전했다.
"지난해 아프기 전까지는 그래도 60킬로그램은 나갔는데.지금은 뭘 먹으려고 해도 입맛이 없어서 46킬로그램밖에 나가질 않아요.예전보다 몸에 힘이 없는 게 느껴져요.마을과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고,어려운 사람을 돕고 사는 건 보람 있는 일입니다.아내가 눈치를 전혀 주지 않아서 하고 싶은 대로 봉사하며 살 수 있어 행복합니다.이제 살 만큼 살았는데…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살아있는 한 계속 보답하며 살고 싶어요.아내와 순창에서 많은 도움과 혜택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으니까 아내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북 순창군 주간신문 <열린순창> 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