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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주말]
커밍아웃 뺨치는
밍아웃의 세계
누구나 말 못 할 사연 한두 개쯤 가슴에 품고 산다.
후폭풍이 예상돼 참고 있지만 입이 근질거리는 뒷담화부터,냥코 10주년 룰렛 리셋차마 입이 안 떨어지지만 계속 비밀에 부치기는 어려운 일도,인생을 걸어야 할 만큼 아프고 중대한 이야기도 있다.
허용된 통로가 있다.바로‘밍아웃’이다.영어 커밍아웃(coming out·성소수자가 성 정체성을 밝히는 일) 중‘커’를 떼어낸 콩글리시 신조어다.나의 정체성이나 취향을 타인에게 공개하는 행위를 뜻하며,단독 명사나‘X밍아웃’처럼 접미사로도 쓴다.“차은우 좋아한다고 남편한테 커밍아웃했어” “징검다리 연휴에 연차 낸다고 회사에 밍아웃 할 거야”처럼.
밍아웃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너무 많아 셀 수도 없다.누군가에겐 절체절명의 커밍아웃,너도나도 하는 흔해빠진 밍아웃에 희석되기도 한다.우린 왜 그토록 많은 밍아웃이 필요한 걸까.
털어놓을 비밀,이토록 많다니
밍아웃의 원조는 10년 전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등장한‘덕밍아웃’이란 게 정설이다.덕밍아웃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특정 취미 등 하위문화의 열성적인 팬(오타쿠)으로서 활동을 뜻하는‘덕질’을 몰래 하다가,“그 나이에 그런 걸 좋아한다고?”란 놀림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밝히는 것.
이어 특정 정치 성향을 띠는 인터넷 갤러리에서 익명으로 활동하는 사실을 밝히는‘갤밍아웃’과‘일(일간베스트)밍아웃,그리고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페밍아웃,특정 인물·이념의 추종자를 뜻하는 팔로어(follower)에서 따온‘8밍아웃’이 이어졌다.
민주당 지지자의‘1밍아웃’과 “계엄으로 계몽됐다”는 이들의‘2밍아웃’도 늘었다.
명품인 척하지만 짝퉁이라는‘ㄹ(레플리카·복제품)밍아웃,개인회생 도박 변제금가족 몰래 주식 투자한다는‘주밍아웃’도 있다.토익 점수 900점대 영어 실력자라는‘9밍아웃,A 학점 받았다는‘A밍아웃’처럼 질투를 부를 수 있는 자랑도 있다.
밍아웃이 대체로 긍정적으로 쓰이는 대표적인 예는 임신 사실을 밝히는‘임밍아웃’이다.손주가 될 태아 초음파 사진을 예비 조부모에게 건네거나,“할아버지 할머니 되심을 축하해요~” 같은 문구가 나타나는 스크래치 복권으로도 임밍아웃한다.
난임 치료나 시험관 시술을 털어놓는‘난밍아웃’과‘시밍아웃,혼외자를 둔 남성들의‘부(父)밍아웃’도 있다.
외모에 관한 비밀도 밍아웃 대상이다.성형수술 사실을 밝히는‘성밍아웃,세부적으론‘쌍(쌍꺼풀 수술)밍아웃‘코(코수술)밍아웃‘치(치아미백)밍아웃’과 몸무게를 공개하는‘몸밍아웃’도 있다.
이중‘털’은 예민한 카테고리다.여성들은 콧수염이나 다리털이 수북해 면도해야 한다며‘털밍아웃’을 한다.탈모를 감추려 가발을 착용하는 이들의‘가밍아웃’은 좀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결혼 정보 회사 가입 때,혹은 연인에게 가밍아웃 할지 말지 고민하는 남녀가 많다.
최근 국민의힘 대선 경선 토론에선 상대 후보의 키높이 구두와 가발·가슴뽕 착용 여부가 추궁돼 논란이 일었다.
분명한 건‘밍아웃’은 당사자가 결과를 책임진다는 자세로 스스로 하는 고백이라는 점.제삼자가 강제로 까발리는 건‘아우팅(outing)’이라고 하며,인권침해나 모욕죄에 걸릴 수 있다.
소수자 언어 도둑질 논란
커밍아웃은 세계 어디서나 성소수자 전용어다.동성애를 금기시하는 사회에서 성 정체성을 밝히는 것을‘벽장에서 나온다(come out of the closet)’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나오다(come out)’란 동사는 일반적으로 쓰지만,명사형인‘커밍아웃(coming out)’은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이 쓰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여전히 사회적 관계의 단절을 감수하고 때론 목숨을 거는 일이기 때문이다.지난 2월에도 커밍아웃한 남아공의 이슬람 성직자가 괴한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국내에도 1990년대 커밍아웃은 분명 그런 맥락으로 소개됐다.그러나 워낙 아무 데나 쓰다 보니 본래 의미가 퇴색했다.
국립국어원은 2023년 커밍아웃을‘사상과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이라고 정의해 사전에 올렸다.내부에선 “어원을 명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현재 우리말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중요하다”며 포괄적 의미로 제시됐다고 한다.
커밍아웃·밍아웃 남용이 진짜 소수자와 약자가 겪어온 고통의 역사나 현존하는 위협을 희석하고 희화화한다는 비판이 있다.축하받을 일이나 단순한 취향을 밝히는 게 성소수자의 고백과 같을 수 있냐는 것이다.이를‘언어 도둑질’이라고도 한다.
미국에서‘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캠페인에 맞서 백인·보수층에서‘모든 목숨이 소중하다(All Lives Matter)’거나 낙태에 반대하는‘아기 목숨은 소중하다’는 구호가 나오자 언어 도둑질 논란이 일었다.
MZ세대는 소수자 의제에 민감하다.30대 여성 홍모씨는 “‘모 연예인이 커밍아웃했다’는 기사 제목에 놀라 클릭해보면‘난 야동 마니아’처럼 신변잡기를 떠드는 것이더라”라며 “정작 커밍아웃 못 해 끙끙 앓는 이들의 심정은 어떻겠냐”고 말했다.반면 “밍아웃처럼 명쾌한 표현을 왜 동성애자만 독점하느냐” “커밍아웃이란 말이 흔해지면 성소수자도 부담을 덜 것”이란 의견도 있다.
현재 한국에서 커밍아웃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상을 받은 윤여정은 지난달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장남이 2000년 커밍아웃했다.뉴욕에서 결혼식을 열어줬다”며 “이제 아들보다‘사위’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동성 연인을 둔 사실을 숨기려 위장 결혼식을 올리는 손자의 할머니로 출연한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에서다.
동성애자의 부모로서 25년 만의 커밍아웃에 “용기 있다”는 찬사가 나왔다.하지만 “자랑이냐?조용히 살라”는 공격도 적지 않았다.
며칠 뒤 K팝 그룹‘저스트비’의 멤버 배인도 LA 공연 중 팬들에게 커밍아웃했다.역시 국내에서의 파장을 각오한 것이었다.
솔직해지기 어려운 사회
우리 사회엔 진짜 커밍아웃만큼이나 힘든‘밍아웃’이 많다.대표적인 것이 암 투병이다.선진국에선 처음부터 주변에 알려 도움받는 것을 당연시하지만,한국에선 끝까지 비밀에 부치는 경우가 많다‘암밍아웃’을 둘러싼 고민이 많은 이유다.
암 환자들은 “암만큼 스트레스 받는 게 주변에 알리는 일”이라고 한다.“왜 걸렸어?그러게 조심하랬잖아” “요즘 △△암은 암도 아니래” “누구누구도 암 걸렸던데”처럼 무신경한 말에 상처받기 쉽다.“아픈 걸 알리면 불이익을 받거나 남들이 고소해할까 봐 걱정된다”고도 한다.
‘구(구안와사)밍아웃‘디(디스크)밍아웃’등 혼자 감당해야 할 고통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정신과 병력도 공개하기 쉽지 않다.젊은층과 청소년 사이 급증한 ADHD(주의력결핍장애)나 우울증,조현병 진단을 받고‘에밍아웃‘@밍아웃’또는‘우밍아웃‘조밍아웃’을 했다가 냉대당했다는 사례가 많다.한 정신과 전문의는 “정신 질환은 주변의 이해와 도움이 필요하지만 아직 편견이 크다.환자가 공개하려 한다면 일단 말린다”고 했다.
이혼한 이들은‘이밍아웃’을 할지 말지 심각하게 고민한다.이혼 커뮤니티엔 “빨리 새출발 하려면 공개하는 게 낫다”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되도록 숨기는 게 좋다”는 경험담이 엇갈린다.
심지어‘결(결혼)밍아웃’이나‘임밍아웃’을 두고도 “직장에선 100% 축하받을 일이 아니더라” “인사고과 시즌 지나 공개하라”는 말이 나온다.
리스크를 무릅쓴‘밍아웃’이 많다는 건 평균을 벗어난 다양성 혹은 약점에 관대하지 못한 사회,남의 눈치를 보거나 우월함을 과시해야 살아남는 사회라는 방증일 수 있다.당신의 밍아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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