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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공습경보가 울려 퍼졌다.6·25전쟁 후 북한과 혈맹을 맺고 있던 중공 국적 항공기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날아든 것이다./사진=KTV 갈무리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공습경보가 울려 퍼졌다.6·25전쟁 후 북한과 혈맹을 맺고 있던 중공 국적 항공기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날아든 것이다.다시 전쟁이 터진 것처럼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는데,당시만 해도 적대국이었던 상황에서 양국은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했을까.
42년 전 어린이날 오후 2시,가족들과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다.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난 것 마냥 공습경보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TV에선 "실제 상황입니다","실제 공습경보를 발령합니다"라는 다급한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군 레이더에 잡힌 정체불명의 항공기.공군은 곧바로 출동했고,우리 영공에 날아든 이 항공기의 정체가 중공 국적 항공기임을 파악했다.항공기 옆면에 '중국민항'이라 쓰여있었던 것.중국은 당시 적대국으로 분류되던 나라였기 때문에 적국의 공격이라 판단해 곧바로 폭격할 수도 있었다.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그런데 우리 공군이 요격 태세를 갖추자 이 문제의 민항기는 날개를 아래위로 흔들었다.공격할 의도가 없다며 귀순 의사를 밝힌 것이다.
우리 공군은 근접 비행을 하며 민항기에 방향을 바꿀 것을 유도했다.하지만 연료가 모자랐던 민항기는 춘천 캠프페이지(옛 미군기지)에 불시착했다.비행장 활주로를 50여m나 지나 두 바퀴가 땅에 깊숙이 박혔는데,영국 제트기 트라이던트 기종이었던 이 민항기가 착륙하기엔 춘천 캠프페이지 헬기 활주로는 턱없이 짧았기 때문이었다.
1983년 5월 5일 어린이날.평화로운 정적을 깨고 공습경보가 울려 퍼졌다.6·25전쟁 후 북한과 혈맹을 맺고 있던 중공 국적 항공기가 대한민국 영공으로 날아든 것이다/사진=KBS 갈무리알고 보니 이 민항기 안에선 납치극이 벌어지고 있었다.랴오닝성 선양 공항을 출발해 상하이 국제공항을 향하던 중 하이재킹(공중 납치)된 것이다.남자 5명,여자 1명으로 총 6명으로 꾸려진 납치단은 미리 준비한 총으로 조종실 자물쇠를 부쉈고,조종사 머리에 총을 갖다 대며 기수를 대한민국으로 돌릴 것을 요구했다.조종사가 이를 거부하자,승무원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승무원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춘천 캠프페이지에 불시착한 후 납치범들은 대만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며 대치를 이어갔다.그러다 당시 안기부 박세직 해외 담당 제2차장이 대책반장을 맡아 납치범들을 기내에서 직접 면담해 요구 조건을 수용할 의사를 밝혀 납치범들의 무장을 해제시켰다.대부분 중국인이었던 승객 96명 그리고 총상을 입은 승무원들을 포함해 총 9명의 승무원들이 무사히 탈출했다.모두 생명에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납치범들과 승객들 그리고 불시착한 기체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우리 정부는 관계부처 대책회의를 긴급 소집하고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그러던 중 중국 측으로부터 "교섭 대표단을 태운 특별기를 보낼 테니 착륙 허가를 내달라"는 전문이 도착했다.사건 발생 몇 시간 만이었다.중국이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교섭에 나선 건,민항기 탑승객들 중 중국 최고 군사기밀을 쥐고 있는 미사일 전문 학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전언도 있다.
중국 민항국장 명의로 온 이 전문에는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쓰였다는 점이 큰 의미를 보여줬다.6·25 전쟁 후 전문을 보낸 것도 처음이지만 통상적으로 한국을 남조선으로 칭하던 중국이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이라고 언급한 것이다.우리 정부는 중국의 착륙 허가 요청을 승인했고,사건 발생 이틀 후인 5월 7일 33명의 대규모 중국 교섭 대표단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우리 정부와 중국 협상단은 승객과 기체 송환 문제에 대해 협의를 시작했다.6.25전쟁 후 약 30년 만에 처음으로 한 테이블에 앉은 것이었다.
한중 대표단은 6차례 걸친 회담 끝에 중국 승객과 승무원들을 중국으로 돌려보내는 데 합의했다.납치범 6명은 우리나라 사법 절차로 처리하기로 했다.기체는 김포공항으로 이송 후 중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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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항기 탑승객들은 춘천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와 중국으로 출발 전까지 근교 산업시설,용인 자연농원,백화점 등을 견학했다/사진=KTV 갈무리 중국 민항기 탑승객들은 춘천에서 수도권으로 올라와 중국으로 출발 전까지 근교 산업시설,용인 자연농원,백화점 등을 견학했다/사진=KTV 갈무리당시 한국 정부는 납치극에 불안해 하던 중국 민항기 승객들을 극진히 환대했다.중국인 탑승객들을 춘천에서 서울로 데려와 워커힐 호텔에 묵게 하고,
토트넘 풀럼 토토삼성전자·기아자동차 공장과 용인자연농원 등을 보여줬다.귀국할 땐 컬러TV를 선물로 제공했다.한국의 발전상을 알리고 적대국이었던 중국과 향후 수교할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당시 환대를 잊지 못한 사고기 승객 마슈에장이 워커힐 호텔 직원을 찾아 한국에 오기도 했다.직원 이름이 적힌 사진 한 장만 달랑 들고 30년 만에 한국을 찾은 건데,수소문 끝에 은퇴한 호텔 직원 이순호씨와 만난 마슈에장은 "당시 워커힐의 환대는 공포에 떨던 우리 가족과 많은 중국인에게 온기가 되었고 한국의 정을 심어 주었다"고 감사를 표했다.
납치범들은 한국에서 재판을 받고 4~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년 후에는 형 집행정지로 출소했으며,우리 정부는 인도적 차원에서 대만으로 강제 추방하는 방식으로 망명을 허가해줬다.
전쟁 상황을 방불케 했던 중국 국적 민항기의 불시착은 '사랑의 불시착'이 돼 한중 수교의 물꼬를 튼 계기가 됐다.중국인 승객들에게 보여준 한국 측 환대가 전쟁 후 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외교를 정상화하고자 하는 한국의 진정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다.실제 한국에서 연이어 열린 1986년 아시안게임,1988년 올림픽에 중국이 모두 참여했으며 1992년에는 정식 국교가 성립됐다.6·25 전쟁 당시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양국이 민항기 불시착 사건을 통해 화해한 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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