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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평론학회와 함께하는 이 시대의 고전
플라톤의‘변론’: 진영 논리 넘어서기
정치를 공동체의 정해진 규칙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고 이 과정에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고 타협하는 기술이라고 이해한다면,현대 정치는 과도하게 가치관이나 세계관,아니 삶 전체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우리 사회는 정치 과열과 양극화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진영 논리에 포획된 정치적 양극화는 특정 진영에 속해서 같은 입장을 반복해 들으며 확증 편향을 강화하는‘메아리 방’에 안주하거나,아예 정치에 관심을 끊어 버리고 탈(脫)정치를 선언하는 것 중 하나만 선택하기를 강요한다.
2400여 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와는 다른 정치 참여 모델을 보여줬다.정치에 관심을 갖고 공동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만,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언제 어디서건 객관적인 관점(소크라테스에게는 철학적 관점)에서‘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정치 참여 유형이다.문제는 이런 소크라테스가 우리가 알다시피 사형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소크라테스가 속해 있던 아테네 역시 우리 사회 못지않게 정치적 양극화에 빠져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처형이라는 사건은 아테네가 정치적 격랑을 겪었던 시기의 끝자락에서 벌어졌다.기원전 403년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했고,그 여파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던 민주정이 폐기되고 친(親)스파르타 성향의 과두정 정권이 수립됐다.아테네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민주정을 회복했지만 이 과정에서 과거 행적을 두고 민주파냐 과두파냐를 가르는 정파적 논란이 사회 깊숙이 자리 잡았다.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도‘전문가 논지’를 주장하는 소크라테스를 과두파로 낙인찍은 민주파의 기획이었다고 의심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소크라테스는 경주마를 훈련할 수 있는 적임자는 다수 대중이 아니라 말 전문가여야 하듯이 젊은이 교육도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소크라테스가 이‘전문가 논지’를 정치 일반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은 없지만,그럼에도 아테네의 양분화된 정치 지형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엘리트주의와 과두파의 옹호자라는 혐의를 씌우기에는 충분했다.
당시 아테네 민주정은 양극화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과거의 행적을 문제 삼지 않는 사면령을 내린 바 있다.그러나 이미 사람들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상대편에 대한 정치적 혐오를 제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공식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타락죄,그리고 아테네가 믿지 않는 신을 끌어들였다는‘경건죄’였다.기소는 당시 아테네 민주정의 제도에 따라 500인의 배심원 법정에 넘겨졌고,소크라테스는 이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최후 진술의 기회를 얻었다.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플라톤의‘변론(apologia)’이라는 고전은 소크라테스의 법정 진술을 당시 방청객으로 앉아 있던 플라톤이 듣고 기록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그를 기소한 자들이 누가 젊은이들을 교육해야 하는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으면서 자신에게 타락죄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웠고,아테네에 공인되지 않은 신을 끌어들였다는 경건죄를 지목하면서 자신을 동시에 무신론자로 지목하는 논리적 모순을 범했다고 지적했다.적어도 표면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기소가 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변론을 마친 뒤 결국 사형 선고를 받았다.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실패한 변론이었나?
기존의 양분된 정치 지형에서 더구나 짧은 시간에 많은 배심원을 동시에 설득하려면 자신을 민주파로 포장하는 것이 유리했을지 모른다.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최후 진술은 아테네 정치를 기존의 민주파와 과두파의 대립에서 무지(無知)와 지(知)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구도로 전환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삶이 새로운 형태의 정치를 지향했음을 강조했다.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배심원이 220대280으로 유죄를 판결한 것에 대해 의외로 근소한 차이라고 평가하며 놀라움을 표했다.소크라테스는 애초에 최후 진술에서 무죄 방면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 자신의 삶 전체가 아테네에서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음을 입증하고자 했다.이 법정에는 배심원뿐 아니라 그동안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지켜본 아테네의 시민들이 방청객으로 앉아 있었으니 소크라테스에게는 그야말로 아테네 전체 시민을 대상으로 한 최후 진술이었으리라.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설득하고자 했던 새로운 정치 유형은 무엇인가?일반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재물은 물론이고 권력이나 명예 같은 정치적 가치와는 결별하고 보편적 진리만을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테네라는 정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여느 시민들처럼 소크라테스도 아테네의 국제정치적 운명을 갈랐던 주요 전쟁에서 세 차례나 중무장병 군인으로 참전했고,아테네 민주정의 기구 중 하나였던‘불레’라는 위원회에 참석해 중요 사건의 처리를 맡은 적도 있었다.그의 삶은 여느 아테네 시민의 정치적 삶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정치적 삶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철학적 태도가 가미된 정치적 삶이었다.진리 추구라는 철학적 태도를 가미한 정치적 삶이라고 하면 언뜻 거창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진영 논리에 매몰되어 자명한 오류를 범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으로 요약된다.소크라테스는 민주정하에서 아르기누세 전투에서 패한 장군들을 일괄 기소하는 것에 반대했고,스포츠 토토 베트맨 제로메이저과두정하에서 30인 참주가 민주파 지도자인 레온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의 명령이든 과두정의 명령이든 부당한 것에는 저항한 것이다.소크라테스가 정치를 진영 논리로 이해했다면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었다.이미 양분화된 사회에서 진영 논리에 따르지 않고,포커 칩 단위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이를 잘 알기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을 변론할 마지막 기회를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여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다.우리 정치의 전환을 위해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순교자를 기다려야 할까?다행히 플라톤의‘변론’은 우리에게 고전으로 남아 소크라테스의 외침을 고대 아테네를 넘어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는 모든 사회에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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