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 도침 디시
NO.2: 약침 효과 디시
NO.3: 침 매일 디시
NO.4: 침 부작용 디시
NO.5: 침 신경 손상 디시
NO.6: 침맞고 헬스 디시
NO.7: 침맞을때 통증 디시
NO.8: 침술 과학적 근거 디시
NO.9: 침치료 디시
NO.10: 한의원 침 디시
NO.11: 한의원 침 아픔 디시
NO.12: 한의학 효과 디시
NO.13: 회전근 개 침 디시
당시 일본 보도-각종 기록 교차 검증…가해 행위 실체에 접근 시도
[Pictures From History / Universal Images Group via Getty Images]
(서울=연합뉴스) 이세원 기자 =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국가정책을 그르치고 전쟁에의 길로 나아가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렸으며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1995년 8월 15일,무라야마 도미이치 일본 총리 담화 중)
패전 50주년을 맞아 당시 일본 총리가 행정 수반으로서 발표한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는 어두운 역사를 직시하려는 시도였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이라는 표현이 제국주의 일본의 가해 행위를 드러내기에 충분한지 의문이 드는 것들이 있다.1937년 12월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南京)에 일본군이 입성한 후 벌인 대규모 학살,생밤효능이른바 난징대학살을 그런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도쿄 교도=연합뉴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당시 일본 총리가 도쿄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패전 50주년을 맞아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그는 제국주의 일본의 가해 행위를 언급하고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명했다.[자료사진]
일본군은 난징에서 중국군 포로와 어린이를 포함한 수많은 중국인을 학살했다.강간이나 약탈도 이어졌다.중국 정부는 난징대학살 희생자 수를 30만명 이상으로 규정한다.연구자에 따라서 20만명 정도로 보는 이들도 있고 적게는 2∼3만명으로 여기는 학자도 있다.
일본은 난징대학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일본 정부가 난징대학살을 '난징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시각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일본은 희생자 숫자에 유독 집착하며 '진상을 확인하기 어렵다'는 시각에 무게를 싣는다.일본 외무성이 내놓은 설명은 학살의 심각성을 축소하고 자국의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하다는 인상마저 풍긴다.
"일본 정부로서는 일본군의 난징 입성(1937년) 후 비전투원 살해나 약탈행위 등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하지만 피해자의 구체적인 인원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고 정부로서 어느 것이 정확한 수인지 인정하는 것이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외무성 홈페이지)
진보 성향 일간지 아사히(朝日)신문 기자로 활동하다 정년퇴직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조마루 요이치(上丸洋一·70)는 최근 번역 출간된 '난징학살과 일본의 신문보도'(소명출판)에서 가해의 역사에 물타기를 하는 이런 기조에 맞서 난징대학살의 실체에 접근한다.
(도쿄=연합뉴스) 일본의 패전 76주년인 2021년 15일 일본 도쿄 야스쿠니(靖國)신사에서 우익 성향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난징대학살 관련 내용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라고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있다.[촬영 이세원]
저자는 난징에서 학살의 벌어졌을 때 일본 신문이 어떤 내용을 보도하고 어떤 내용을 기사화하지 않았는지를 추적해 검증한다.책에는 당시 일본 신문의 보도나 이들이 남긴 저서를 확인하고 생존한 종군 기자를 직접 취재하는 등 발품을 팔아 사실관계를 규명하려고 시도한 결과물이 담겨 있다.
책에 따르면 당시 일본 신문은 학살을 대체로 보도하지 않았다.군과 정부 당국은 엄격하게 보도를 통제한 것이다.구마모토 제6사단에 종군 기자로 파견된 오사카 마이니치신문 고토 고사쿠는 출발 직전 정보주임 참모로부터 "군에 불리한 보도는 원칙으로써 일절 써서는 안 된다.(중략) 기사는 검열을 원칙으로 하고 특히 군기 비밀사항을 적어 보낸 자는 전시육군형법으로 총살형"이라는 주의사항을 들었다고 한다.
종군 기자들은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라고 종용당했다.고토는 회사 간부로부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8천만 국민,강원랜드 카지노 돈세탁200만 현민의 대표로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대임을 완수하리라고 기대한다"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인류애를 강조하거나 생명 존중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기사도 금기였다.전쟁이 비참하다고 칼럼을 쓴 에히메(愛媛)현 지방지 이요신포(伊予新報)는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신화=연합뉴스 자료사진]
당시 일본 신문은 마을을 점령한 일본군과 마주한 중국인들이 '대일본 환영'이라고 적은 일장기를 흔드는 등 일본군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보도하기도 했다.하지만 신문이 아닌 다른 기록을 확인해보면 이는 적국 군대에 살해당하지 않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고 한다.일본군은 '환영 대일본' 깃발을 내건 마을에서 중국 청년들을 일제히 사살하기도 했다고 책은 전한다.
난징 침공을 다룬 많은 저작 가운데는 '학살은 없었다.이에 대한 신문 기사가 없는 것이 그 증거'라는 주장도 일부 보이지만 이는 학살 광경을 보도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기자도 자기 검열을 했기 때문이라고 책은 지적한다.
[소명출판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당시 신문은 일본군이 중국 병사를 포획하는 등 전과를 거둔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지만,다수의 포로를 어떻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다루지 않거나 '처치' 등의 모호한 표현으로 뭉뚱그렸다.책은 군인 등이 당시에 남긴 일기 등 신문 이외의 다른 기록을 교차 검증해 저항 의지와 능력을 상실할 포로를 일본군이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조목조목 집어낸다.일본 우익 세력의 반발을 불렀지만 결국에는 '완전한 허위라고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이 일본에서 확정된 일본군의 '백인(百人) 참수 경쟁' 보도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검증한다.책에 따르면 일본군 용사가 중국 병사 ○○명의 목을 베었다거나 ○○명을 참수하겠다고 결의를 했다는 식의 보도가 당시 일본 신문에서 여럿 확인된다.책은 이런 참수가 백병전과 같이 전투가 한창인 상황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저항 의지를 상실하고 붙잡힌 포로를 살해하는 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한다.
42년간 신문 기자로 일하고 퇴직한 저자는 수년에 걸친 조사와 검증을 토대로 당시 신문 기사와 다른 기록물에서 드러나는 격차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기자들은 전장의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라기보다,전장의 사실을 감추기 위해 기사를 작성한 것이 아닐까?그런 의심조차 생긴다."
윤소영 옮김.5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