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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후 혼란 딛고 1960~1970년대 '경관용 정원' 조성
허인옥·성범영·송봉규 등이 선구자적 역할
관광·체험·감성이 결합한 독특한 정원으로 성장
제주는 기후·생물종 다양성 등이 정원조성에 유리

[제주=뉴시스] 1960~1970년대로 보이는 풍경이다.큰 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좁을 길인 올레 양쪽으로 해바라기를 심었다.드물게 보이는 옛 '올레정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출처는 제주시 발간 '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재판매 및 DB 금지

정원은 누군가의 손길로 다듬어진 공간이자,자연과 함께 빚어낸 경관이다.치유와 휴식을 제공하면서 생태계를 품는 그릇,그리고 이웃과 소통하는 마당이 된다.제주는 정원을 꾸미기에 이상적인 땅이다.따뜻한 해양성 기후,화산섬 특유의 토양,사계절 변화에 따라 피고 지는 수많은 식물들.그리고 돌과 바람,물이 빚어낸 독특한 풍경까지 정원을 이루는 요소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섬 곳곳에 담긴 정원을 통해 '제주형 정원(J-가든)'을 모색하는 이야기를 시리즈로 게재한다.<편집자 주>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해방이후 제주는 4·3사건,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혼돈의 시기를 맞았다.

제주4·3평화재단 자료에 따르면 제주4·3으로 인해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5000∼3만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가옥 4만여채가 소실되었으며,중산간 지역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학교·면사무소 등 공공기관 건물이 불탔으며 각종 산업시설이 파괴됐다.

특히 1948년 10월부터 진행된 이른바 '초토화작전'에 따라 해안선으로부터 한라산 방향으로 5㎞ 이상 떨어진 마을은 인적이 끊긴 유령마을이 됐다.

해발 200m이상에 위치한 중산간 초가나 돌담집 한켠에 마련한 '텃밭정원'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해안가 마을도 피난민 등이 몰려들면서 채소나 약초,과실나무를 심고 가꾼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그러다 1960년대 들어 지역경제에 활기를 띠었다.전기와 수도,도로 등 기반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했고,감귤산업이 태동했다.

제주에 '돈'이 유입되고 유통되면서 자본축적이 생겨난 것이다.1965년 감귤재배면적이 551㏊에서 1970년 9001㏊로 급증했다.

1971년에는 제주도에서 자체적으로 '제주도 종합개발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감귤단지 조성,관광활성화,기반시설 확충을 추진했다.

[제주=뉴시스] 돌담에 시멘트를 입힌 집에 형제로 보이는 어린이 사이로 원예 수국 등으로 만든 꽃밭 정원이 보인다.사진은 1970년대 모습으로 추정된다.출처는 제주도교육박물관 기획도록인 '만농홍정표선생 사진유품집'.*재판매 및 DB 금지이 같은 개발 분위기와 더불어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이 펼쳐지면서 부의 축적과 함께 새로운 주거환경이 만들어졌다.


민간에서 채소나 과수나무를 재배하는‘생산형 정원’에서 감상 등을 위해 식물을 가꾸는‘경관용 정원’을 조성한 것이 이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한라산 남쪽인 서귀포 지역은 온난한 기후 덕분에 일찍부터 개인 정원인 '꽃밭'이 만들어진 듯하다.

김춘부(98)할머니는 "19살에 효돈(서귀포시 효돈동)에 시집왕 살멍,뼈가 놀삭헐 정도로 속아신디,그때 꽃 보는게 유일한 낙이였주.(효돈에 시집와서 살면서 뼈 빠지게 고생했는데,꽃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1960년대 후반부터 집 마당과 올레(대문 밖 좁은 길)에 봉선화,달리아,샐비어 등을 심었다.종묘를 파는 동네 주민에게 씨앗을 구해서 혼자만의 정원을 만든 것이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김춘부 할머니가 지난 3월30일 서귀포시 효돈동 '베케' 정원에서 1960년대부터 꽃밭을 만든 배경을 설명하고 나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2025.05.11.제주시지역에서 민가에 정원이 확산한 것은 '신제주 개발' 영향이 크다.제주연구원이 발간한 제주통사에 따르면 197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연동마을을 지나다가 이승택 제주도지사에게 "공원 속의 도시답게 주택은 반드시 100평 이상을 확보하고,정원을 보기 좋게 만들도록 하시오"라고 지시를 했다.

1977년 신제주 건설계획이 공포되고 체비지 매각 입찰도 이뤄졌다.신제주 개발사업을 이렇게 시작됐으며,지금의 신제주 개인주택 마당에 정원이 대거 생겨난 배경이다.


민간에서 정원의 등장은 경제적인 여건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제주에서 초기 정원문화 형성은 선구자·선지자를 통해 퍼져나갔다.

허인옥(91) 제주대 명예교수는 1960년대 감귤을 전파한 핵심 인물이다.1967년 일본에서 감귤 27개 품종,1만그루를 들여와 식재하는 등 제주 감귤산업의 기초를 닦았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허인옥 제주도 명예교수는 지난 2일 오후 제주시 용담1동 자택에서 제주에 차나무를 심어 다원을 조성한 과정을 알려주고 있다.2025.05.11.

무엇보다 그는 녹차를 제주에 뿌리내리게 만든 장본인이다.제주대 대학생 시절인 1950년대 중반 서귀포 고근산 인근에 차나무 4000그루를 시험적으로 심었다.

그는 일본인과 한정식 식사를 한 후 나온 '숭늉'에 대한 질문에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는데,그 일본인이 "아,솥 씻은 물이군요"라고 말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식사 후에 이뤄지는 차 문화가 없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많았다.젊은 시절에 차나무를 심기로 결심한 배경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서성환(1924-2003)과 의기투합했다.서성환은 한국의 차문화 부흥을 꿈꾸고 있었던 차에 젊은 허인옥의 차나무 재배경험을 들었던 것이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허인옥 제주대 명예교수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해서 조성한 서귀포시 도순다원.지난 1월30일 풍경이다.2025.05.11.

이들은 1979년 도순다원,1982년 서광다원을 일구기 시작한 것이다.지금은 한국의 대표적인 차나무 정원이자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허 명예교수는 차나무뿐만 아니라 레몬,바나나 등 아열대 작물을 제주에 정착시켰으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자원식물학,식물영양학 등의 과목을 개설하기도 했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생각하는 정원'을 조성한 성범영(86) 원장은 그야말로 맨몸으로 부닥치며 정원을 일궜다.

경기도 용인이 고향인 성 원장은 어린 시절부터 유독 나무를 좋아했다.그중에서도 화분에 오목조목 섬세하게 가꾸어진 작은 나무를 보면 신기하고,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성범영 생각하는 정원 원장은 5일 자신이 손수 일군 분재정원에서 밝은 미소를 보이며 분재에 담긴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2025.05.11.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에서 와이셔츠 사업을 하면서 번창할 즈음인 1968년 저지리에 있는 군대 동료의 알선으로 덜컥 땅을 사버렸다.

와이셔츠 사업을 하면서도 틈틈이 제주를 오가다가 1974년에는 주민등록을 제주로 옮기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나무를 심는 일에 매진했다.

동백나무,야자나무,감귤나무를 구해다 심었으며 소철 씨앗 20~30마대를 파종하기도 했다.농장 한쪽에 소나무,주목,윤노리나무,느릅나무 등을 화분에 심었다.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분재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분재를 몰랐기에 밤새워 독학했고,국내외 분재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배움을 얻었다.

나무가 하나둘 뿌리를 내리면서 정원 형태를 갖춰가던 1992년 정식 개원했다.개인의 취미와 호기심으로 시작한 정원이 경관과 관람용 정원으로 전환한 것이다.

[제주=뉴시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에 분재를 테마로 조성한 생각하는 정원.(사진=생각하는 정원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현재 정원 3만6000㎡에 분재 100여종,1000여점이 있다.국빈 방문지로도 유명하고,영국과 미국의 정원잡지에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정상급 지도자의 방문지라는 명성과 함께 인민교육출판사 교과서에 실릴 정도다.황무지를 바꾼 개척성,분재에 담긴 예술성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송봉규(1931-2023)는 제주시 한림읍에 '한림공원'을 조성했다.관광용 식물테마 정원이다.

송봉규는 고희기념집에서 "한림서 소학교를 다닐 때에도 꽃을 구해다 많이 심었던 생각이 난다.무언가 심기를 좋아하고 나무를 사랑했던 일은 어릴 적부터 체질화해 갔던 모양이다"고 적었다.

그는 1971년 부친의 유산을 정리해 한림읍 협재리 모래밭 30만㎡를 사들였다.협재굴과 인근 해수욕장을 묶어 개발하는 임해관광단지 조성을 위한 것이다.

당시 관광개발사업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황무지를 개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1972년 일본에서 들여온 워싱턴야자,카나리아,소철 등의 씨앗을 뿌렸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왼쪽은 제주시 한림읍의 불모지를 개척해 1970년대 초반 야자수를 심는 모습(사진=한림공원 제공).이들 야자수가 하늘을 찌를 듯이 자란 가운데 입장객이 이 곳을 지나고 있다.2025.05.11.

1982년 한림공원 조성사업 허가가 나자 개발은 날개를 달았다.1985년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해 아열대식물원에 695㎡규모의 유리온실을 신축했다.제주지역에서 최초의 온실 정원이다.

이어 허브정원,매화정원,토피어리정원,양치식물 온실,산야초 정원,선인장 온실,수선화정원 등이 순차적으로 들어섰다.

한림공원에서 유리온실 정원을 처음 선보였다면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여미지식물원은 1989년 개장 당시 '동양최대 유리온실'이라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식물원 면적 11만2397㎡ 가운데 1만2543㎡가 온실이다.야외 식물원에는 숙근초,멸종위기식물,만병초,소철,스포츠토토 분석 큐어벳왕벚나무 등으로 정원을 구성했고 한국·일본·이탈리아·프랑스의 정원형태도 조성했다.


이처럼 1970년대부터 규모를 갖추고 조성을 시작한 제주의 대표적인 정원은 관광과 결합한 특징을 갖고 있다.

1973년 당시 청와대 관광계획단에 의해 제주도를 국제관광지로 만드는 '제주도 관광종합개발계획'이 발표됐다.

관광기반시설 확충하고,중문관광지구,해안관광지구,동굴관광지구,문화관광지구 등을 조성해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것이다.숙박업이 고급화되고 다양한 관광시설이 속속 등장했다.

이때부터 제주의 식물테마 정원은 주목받는 관광시설이자 관광상품이었다.다른 지역보다 이른 시기에 식물테마 정원이 조성된 이유이기도 했다.

정원형태를 띤 관광농원이 나타난 것은 1980년대이다.1984년 당시 남제주군 남원읍에서 개장한 수농원이 효시다.감귤,망고,양란 등을 식재하고 관광객을 위한 휴게실,식당 등을 갖췄다.이후에 우후죽순 생겨난 관광농원들도 감귤,화훼,키위,약초,난,망고 등의 비슷한 유형으로 관광객을 유치했다.

공기관에서도 앞서 나갔다.제주도가 제주시 연동지역에 조성한 한라수목원은 1987년 국립수목원에 이어 1993년 개장했다.지금은 20만8133㎡에 야생화원,약·식용원,양치식물원,이끼원 등 12개 테마 정원을 갖췄다.지역주민의 힐링장소일 뿐만 아니라 국내외 관광객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제주에서는 관광객 유치 등을 위해 식물테마 정원이 일찍 들어선 가운데 제주도가 다른 자치단체보다 먼저 수목원을 조성했다.1993년 개원한 제주시 연동 한라수목원은 시민의 힐링장소이자 국내외 유명 관광지로 성장했다.10일 하늘에서 바라본 한라수목원 모습이다.2025.05.11.

이런 제주의 정원은 소쇄원 등 한국 전통 별서정원은 물론이고 일본의 '자연의 축소재현' 정원,중국의 '은유,상징,풍수 중시' 정원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제주는 관광,체험,감성,힐링을 핵심으로 하는 독창적인 정원 구성으로 성장했으며 자생식물과 더불어 아열대 식물 등 외래식물 도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제주에서 식물원,수목원,관광농원 등의 정원이 일찍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의 기후와 다양한 식물자원 덕분이다.

2021년 발행한 한라산총서 개정증보판에 따르면 제주지역에 분포하는 식물은 2129종(분류군)이다.이는 전국 4100여종의 52%에 해당하는 것으로 국내에서 식물종 다양성이 가장 풍부하다.

면적으로 식물종 밀도를 계산한다면 제주도는 ㎢당 1.08종으로 한국의 0,041종보다 훨씬 많고,하와이 0,05종보다도 20배가 높다.

제주는 해안에서 한라산 정상 1947m까지 난대상록활엽수림대(아열대식물),온대낙엽활엽수림대,한대침엽수림대 등으로 식물 수직분포대가 형성되면서 식물종이 다양하다.

용암암괴에 형성된 독특한 용암숲인 '곶자왈'에 다양한 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북방한계와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섬이라는 지리적 고립성은 고유종인 특산식물로 진화를 유도했으며 풍부한 강수량과 해양성 기후도 식물 생존에 유리한 조건이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아부오름과 뒤편으로 여러 오름이 보인다.(사진=뉴시스DB)

특히 화산폭발에 따라 제주 섬 곳곳에 솟아있는 368개의 크고 작은 오름(작은 화산체)은 햇빛,수분 등이 각각 다르게 스며드는 역할을 하면서 좁은 지역에 다양한 식물이 서식하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다양한 생물종,화산 지형,토양 등이 있는 제주지역은 테마형 정원,개인 정원을 조성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는 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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