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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편 155.엘리자베스 시달
&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英걸작 <오필리아> 주인공
아름다움 뒤 가려진 이야기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주말,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욕조 물이‘너무’차가웠다


존 에버렛 밀레이,오필리아(일부 확대),1851년경,캔버스에 유채,76.2x111.8cm,테이트 브리튼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스무 살을 갓 넘은 여성 엘리자베스 시달이 차가운 욕조 물에 빠진 채 떨고 있었다.

지금 엘리자베스는 물 아래로 차츰 잠겨가는,그렇게 삶과 작별하는 비극의 여인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었다.

그런데,이런 와중에 그녀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눈에 힘이 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이가 딱딱 부딪히고,새빨간 입술마저 파랗게 질리는 듯했다.왜?욕조 안 물이… 차가워도 너무 차가웠다. 생각보다 훨씬 더 얼음장이었다.언제부터 이랬을까.적어도 몇 시간은 흐른 게 분명했다.욕조 밑에는 분명 묵직한 기름 램프가 있었다.그렇다면,이렇게까지 답도 없는 냉수가 되면 안 될 일이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오필리아를 위한 습작

혹시 램프의 불,그게 꺼지지 않았을까. 엘리자베스의 상념이 여기에서 멈췄다.그래.그런 상황인 게 확실했다.

밀레이 씨.물 온도가 너무 낮아서 그런데,욕조 아래 불이 잘 붙어있는지 봐줄 수 있어요?” 이제 몸을 일으켜 이런 말만 하면 되는데….그녀는 그러지 않았다.미동마저 자제했다.그냥 정말 죽은 듯 누운 채 견디기로 마음먹었다.

이유가 있었다.그녀는 당장 지금,불멸의 예술이 빚어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그녀는 위대한 그림의 탄생을 확신하며 인내,나아가 희생을 택한 모습이었다.

이날 엘리자베스는 라파엘전파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모델 역할로 욕조 안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4파운드짜리 은실 자수 드레스를 입고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 속 강물에 익사(溺死)하는 오필리아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그리고 있는 밀레이.그가 무서우리만큼 깊이 몰입하고 있었다.지금 밀레이를 건들면 그를 감싸는 마법도 깨질 게 뻔했다.흥이 깨지는 순간,화혼에 젖어드는 그림 또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오필리아,1851년경,캔버스에 유채,76.2x111.8cm,테이트 브리튼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그림은 잘 나온 거예요?” 이날 작업에 끝난 후에야 밀레이는 사태를 알아차렸다.그제야 사과했지만,엘리자베스는 겉옷을 찾기는커녕 이처럼 작품 이야기부터 했다.

밀레이는 엘리자베스가 화폭을 볼 수 있게끔 몸을 뺐다.

모습을 보인 작품은 <오필리아>.

엘리자베스의 직감이 맞았다.뒤늦게 담요를 두른 그녀의 몸이 핑그르르 돌았다.눈앞 그림이 너무도 아름다워서였다.통제되지 않는 오한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는 폐렴에 걸리고 만다.

그의 아버지가 밀레이에게 치료비를 물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고 할 만큼 상태가 심각했다.그래도,그래도 엘리자베스는 병석에 누운 채 웃었다.창백한 얼굴로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견디길 잘했어.” 백 번 같은 상황으로 돌아간들 백 번 다 참았을 터였다.덕분에 길이 남을 게 확실한 명작,<오필리아> 속 불멸의 여인이 될 수 있었으니.

그녀를 시련에 몰아넣을‘진짜’


엘리자베스 시달,1860년경

이 에피소드를 보면 엘리자베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예술을 아끼고,사랑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더 좋은 예술을 위해서라면 처절한 고통도 마주할 준비가 된 여성이었다.

이런 정신을 가졌기에 당시 런던의 모든 화가가 사랑했던 모델,엘리자베스.

언뜻 봐도 범상치 않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는 이 한 조각으로 끝나지 않는다.그녀는 곧 또 시련을 맞이한다.그 일은,불 꺼진 램프 건과는 견줄 수도 없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재차 위기를 맞닥뜨린 그녀는 그 틈에서 또 한 번 불멸의 작품을 건져 올릴 수 있을지.미리 운을 띄우자면,<오필리아>의 밀레이는 이 글 속 단역일 뿐이다.엘리자베스를 위험에 몰아넣을 ‘진짜’가 이제 등장한다.그의 이름은….

모자가게 점원의 운명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머리를 땋고 있는 엘리자베스 시달,17.1x12.7cm,테이트 브리튼

로제티! 내가 누구를 보고 왔는지 아는가?”

1849년,겨울.그러니까,엘리자베스를 그린 <오필리아>가 탄생하기 2년 전인 어느 날.월터 데버렐이 동료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화실 문을 열고 대뜸 외쳤다. “드디어 찾았어!” 데버렐은 로제티의 어깨를 두 팔로 쥐고 흔들었다.

“큰 키에 마른 몸,붉은 머리칼에 창백한 피부,신비로운 표정….우리가 바랐던,문학책을 찢고 나온 듯한 여인이야.” 들뜬 데버렐이 로제티를 잡고 끌었다.그가 조금 전 그녀를 본 곳,모자 가게로 데려다놓았다.

“저기 저 점원일세.”

데버렐이 가리킬 필요도 없었다.로제티는 진작에 그녀를 알아봤다.힘겹게 찾던 여성.과연 찾을 수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던 여인.그녀가 눈앞에 서 있었다.그녀가 엘리자베스였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자화상,1847,종이에 연필 등,20.7x16.8cm,영국국립초상화미술관

그 시절 로제티는 영국 라파엘전파 수장으로 있었다.

라파엘전파는‘라파엘로 전(前) 시대로 돌아가자’는 정신을 내건 예술 운동이었다.라파엘로 산치오 등 전성기 르네상스 거장이 선보인 고상하고 숭고한 화풍 말고,그 이전 시대처럼 더 겸허하고 세밀하게 그리자는 말을 기치로 둔 집단이었다.

이는 일종의 혁명 그룹이었다. 당시 영국 아카데미라고 하면 여전히 라파엘로와 함께 동시대 예술가 미켈란젤로,티치아노를 최고로 치고 있었으니.

은근하고 은은하게,자연스럽게 감동을 안기는 것.

로제티 주도의 라파엘전파가 보이고 싶은 그림은 이런 것이었다.

그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모델을 찾아야 했다.

그게 쉬운 일인가.예쁘지만 튀지 않아야 했고,꾸밀 줄 알지만 과하면 되레 문제였다.분위기는 있되 넘치면 곤란했고,균형 잡힌 몸매지만 어딘가 풍만하면 외려 부담스러웠다.

이에 더해 교양,연기력,예술 열정까지….흰 종이.따지자면,너무도 하얗기에 아름다운 도화지 같은 이를 찾고 있는 셈이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엘리자베스 시달,1852~1860,종이에 연필,24.1x20.9cm,The New Art Gallery Walsall

…이 사람이다.

엘리자베스를 마주한 로제티가 한 첫 생각이었다.기어코 라파엘전파의 새하얀 도화지를 찾고야 만 것이다.

‘라파엘전파’의 가장 중요한 여인


월터 데버렐,회색 앵무새,1852~1853,캔버스에 유채,53.5x35.2cm,빅토리아 국립 미술관

라파엘전파의 그녀,엘리자베스는 1829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로제티와는 아래로 한 살 차이였다.그녀는 칼 등 날붙이 제조업에 몸담은 아버지 밑에서 평범한 교육을 받았다.

엘리자베스가 예술에 흥미를 갖게 된 데는 소소한 사연이 있다.그녀는 보통의 어느 날,버터 포장지로 쓰인 종이에서 알프레드 테니슨의 시를 읽었다고 한다. 되새길수록 감동이었다.평생 잊지 못할,미(美)가 안기는 감미로움에 젖어든 순간이었다.

하지만,당장은 돈이 예술보다 먼저였다.

스무 살이 된 1849년,런던의 모자 가게에 취업했다.로제티의 손을 맞잡게 된 그곳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라파엘전파를 위한 모델이 돼달라는 로제티의 제안을 승낙했다.당장은 저항 조직으로 핍박받지만… 로제티, 그리고 그와 함께 라파엘전파 주축이 된 밀레이 모두 실력만 보면 영국 최고였다.그들의 예술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엘리자베스는 이를 기회로 받아들였다.

엘리자베스는 곧장 라파엘전파의 가장 중요한 여인으로 존재감을 보였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결혼 잔치에서 단테를 만났으나 그의 인사를 거부하는 베아트리체,1852,종이에 수채 등,35.1x42.5cm,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

그녀는 로제티의 <결혼 잔치에서 단테를 만났으나 그의 인사를 거부하는 베아트리체>베아트리체도 연기했다.

베아트리체는 ≪신곡≫의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평생을 사모했지만,끝내 결실로 이어지지 못한 여인이었다.엘리자베스는 새침한 표정과 꼿꼿한 자태로 그런 그녀 역을 완벽히 소화했다.

월터 데버렐,십이야(2막 4장),1850

윌리엄 홀먼 헌트,베로나의 두 신사,프로테우스로부터 실비아를 구하는 발렌타인,1850~1851,캔버스에 유채,100.2X133.4cm 윌리엄 홀먼 헌트는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존 에버렛 밀레이와 함께 라파엘전파의 주역‘3인방’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엘리자베스 시달이 실비아 역을 맡았다.

이어 앞서 소개한 밀레이의 <오필리아>, 본인을 발견해 준 데버렐의 <십이야> 등에서 모델로 투혼을 발휘했다.짙은 눈매와 유리처럼 투명한 피부,가녀린 등줄기.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매혹적이었다.그녀는 이 매력을 살린,이에 따라 특히나 ‘잘 나온’<오필리아> 덕에 더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테니슨 시의 전율을 잊지 못한 엘리자베스는 그사이 시인 꿈을 꾼다.

모델 일을 이어간 엘리자베스는 언젠가부터 화가로의 미래 또한 함께 그려본다.그녀는 로제티(그의 아버지는 런던 왕립 대학교에서 언어를 가르친 교수였다)에게 시와 그림을 배웠다.라파엘전파 후원자,미술 비평가인 존 러스킨 덕에 더욱 본격적으로 미술을 익힐 수 있었다.

예술을 너무도 사랑한 그녀는,그렇게 종합 예술인의 길 위에 오르게 됐다.<오필리아> 건으로 폐렴에 걸려 심하게 고생은 했지만,대체로는 다 잘 풀렸다.이까지는 분명 좋았는데….

‘단테’의 베아트리체가 되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수태고지,1855,종이에 수채 등,35.5x24.7cm.엘리자베스 시달이 성모 마리아 역을 맡았다.

“리지(엘리자베스의 당시 애칭).시인 단테가 그랬듯 나 또한 나만의 베아트리체를 찾고 있었소.”

로제티가 엘리자베스 손 위로 제 손을 포개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언젠가 그가 이런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다.그가 보여주는 시와 문학,그림 모두 어느덧 한 주제만을 다루고 있었기에.그것은 불같은 사랑이었다.

“나의 베아트리체가 돼주겠소?”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시달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웃었다.그녀가 웃자 로제티도 웃었다.

이날부터 엘리자베스는 오직 로제티만의 뮤즈로 나섰다.

계속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긴 하겠지만,그녀가 꿈꾸는 궁극의 예술은 로제티를 통해 일궈낼 생각이었다.이를 위해 또 한 번 무슨 일이든 감내할 마음이었다.리지. 로제티를 조심하게.그는 위험한 인간이야.” 주변의 경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 채로.

고개 든 시련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크리스마스 캐럴,1857~1858,캔버스에 유채,34.3x29.7cm,포그 미술관

숨죽이고 있던 그놈이 그제야 고개를 올렸다.

로제티의 마음속 웅크리고 있던 녀석은,연인이라는 속박이 생기자 그제야 날뛸 채비를 마쳤다.놈의 이름은 바람기였다.

그랬다.

엘리자베스를 향한 경고에는 근거가 있었다.로제티는 실제로 “위험한” 사람이었다.그는 이기적이었다.자기애가 너무 강한 사내였다.무엇보다도… 그는 심각한 바람둥이였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잘 감추고 있었지만,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세인트 조지와 사브라 공주,1862,종이에 수채,52.4x30.8cm,테이트 브리튼.엘리자베스 시달이 사브라 공주 역을 맡았다.

로제티는 엘리자베스와 정식 교제를 시작한 뒤 약혼도 했다.

그녀야말로 최후의 연인이라고 선언하는 듯했다.다만,단지 그뿐이었다.

로제티는 엘리자베스와의 결혼만은 계속해 미뤘다. 그는 평범한 가문 출신의 엘리자베스를 싫어하는 누이들의 반대를 거론했다.로제티의 행동거지를 보면 이는 핑계가 분명했다.애초에 결혼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는 이 말 뒤에 숨어 바람을 계속 피워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속은 타들어갔다.

그녀는 로제티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천재들의 모임.로제티 주도로 라파엘전파 손끝에서 빚어질지 모를 구극(究極)의 예술을 놓을 마음도 없었다.엘리자베스는 로제티라는 사람 자체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그의 빛나는 예술적 재능과 감각을 여전히 보배처럼 대했다.

“나보다 더 뛰어난 감각이야”


엘리자베스 시달,유령의 숲,1856

엘리자베스 시달,레이디 클레어,1854~1857,종이에 수채,33.8x25.4cm,개인소장

엘리자베스는 공허한 가슴을 그림으로 달랬다.

1856년작 <유령의 숲>, 1857년작 <레이디 클레어>…. 그녀가 그린 앞 그림은 긴 머리카락 여성이 나무 틈 회색 유령을 피해 도망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다음 언급한 그림은 같은 제목인 테니스의 시구절 속 한 장면을 옮긴 것이다.본인이 귀족 아닌 유모의 딸이라는‘출생 비밀’을 알게 된 클레어.고심 끝에 약혼남에게 이를 고백한다.그런데,예상과 달리 약혼남은 그녀의 신분은 상관하지 않은 채 솔직한 인격에 더 감동을 받는다는 내용이다.이 작품 또한 결혼을 미루기만 하면 로제티를 저격해 보란 듯 만든 게 아닐지.

가르침을 길게 받지도 않은 엘리자베스가 벌써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재치도,창의력도 놀랍더군.어떤 면에선 나보다 더 뛰어난 감각이 있어.
로제티도 지인을 통해 이렇게 평할 만큼 엘리자베스에게는 잠재력이 있었다.

그런 그녀가 로제티에게 헌신했다.사랑을,열정을,영혼을 쏟고 있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보카 바치아타(입맞춤을 받은 입술),1859,패널에 유채,32.1x27cm,보스톤 순수미술 박물관

이런 와중에도 로제티는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동료 화가의 약혼녀를 건드는가 하면,출신이 의심되는 한 여성과는 진하게 몸을 붙였다.<입맞춤을 받은 입술>.그 여인 앞에서 이처럼 농밀한 초상화를 그려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는 어느 순간부터 크게 앓았다. 로제티의 변하지 않는 행동거지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엘리자베스는 원래도 몸이 허약했다.실은,그녀가 라파엘전파의 눈길을 사로잡은 새하얀 피부를 가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그녀는 유전병으로 결핵과 장 질환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마음고생으로 거식증과 신경통도 달고 다녔다는 후문이다.그런 그녀는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축복받은?죽어가는 그녀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베아타 베아트릭스,1864~1870년경,캔버스에 유채,86.4x66cm,테이트 브리튼

붉은 머리칼의 창백한 여인,엘리자베스.

그녀가 눈을 감고,고개를 젖힌 채 어딘가 몰입하고 있다.엘리자베스 뒤로는 ≪신곡≫의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보인다.둘은 피렌체 시가지를 배경으로 마주 선 모습이다.엘리자베스,그대를 향한 사랑은 이들처럼 시공간을 넘어선다는 점,아울러 해시계처럼 영원히 작동한다는 점을 표현한 듯하다.

후광 두른 붉은 새는 그녀의 손바닥 위로 꽃을 살포시 떨어뜨린다.양귀비꽃이다. 이는 기나긴 잠,그리고 영원한 죽음의 상징이다.로제티가 1864년부터 구상해 6년간 붙든 작품,<베아타 베아트릭스(축복받은 베아트리체)>였다.

로제티가 내놓은,보다 정확히는 엘리자베스가‘건져 올린’라파엘전파의 또 다른 걸작이었다.

엘리자베스 시달,샬롯의 여인,1853,종이에 연필과 잉크 등,16.5x22.3cm

바람을 일삼은 로제티가 드디어 새사람이 됐을까.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는,우리가 옛 단테와 베아트리체처럼 필생의 사랑이 맞다는 걸 받아들였다는 증표 아닌가.맞다.하지만 인정의 시기가 너무 늦었다. 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었기에. 그림 속 양귀비꽃은 괜히 둔 게 아닌 것이다.엘리자베스는 한참 전인 1862년에 죽은 상황이었다. 표면상 이유는 사고였다.실제로는 약물 과다복용에 따른 극단 선택에 가까웠다.

끝까지‘못된’남자였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하트의 여왕,1860,패널에 유채,25.4x20.3cm,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

앞서 로제티는 엘리자베스가 죽기 2년 전,그러니까 1860년.그제야 둘 사이 결혼식을 올렸었다.

장소는 한적한 교회였다.서로를 만나고 10년,약혼을 하고도 하세월이 흐른 후에야 맺어진 혼인이었다.

“리지.오늘이 우리에게 가장 기쁜 날이야.” 로제티가 어색하게 웃었다.그가 웃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웃지 않았다.왜,왜 이제서야….엘리자베스는 로제티의 옷깃을 붙든 채 묻고 싶었다.그녀에게는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숨지기 전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희망은 임신이었다.

아이만 낳으면 새로운 가능성의 뿌리를 쥘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그놈의 바람기 또한 잠잠해지리라고 확신했다.엘리자베스는 1861년에 딸을 낳았다.사랑으로 품으려고 한 그 아이는,죽은 채로 세상 빛을 봤다.

그녀는 무너졌다.더욱더 마약성 약물에 빠져들었다.그러다 1862년 2월 10일.야간 강의를 마치고 온 로제티가 쓰러진 그녀를 발견했다.이미 의식이 없던 그녀는 다음 날 새벽에 세상을 등졌다.당시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엘리자베스 시달,1854,종이에 수채

뒤늦게 죄책감에 절인 로제티는 길게 울었다.그의 시를 그녀의 관 속에 함께 넣었다.

로제티는 그때부터 “혼이 빠졌다”는 말을 들을 만큼 피폐해졌다.그녀를 그리워하며 <베아타 베아트릭스> 작업에 매달릴 때는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 상태 또한 오래 가지 않았다.

로제티는 1869년,맞고 daum 게임그러니까 엘리자베스가 죽고 7년이 흐른 시점.엘리자베스를 위한 사랑의 시를 세상에 선보여야겠다며 그녀의 관 속 시집을 꺼내기로 했다. 친구를 시켜 실행에도 나선다.

그녀는 전혀 썩지 않은 채,
살아있을 때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네.
다녀온 친구의 이 말에 로제티는 충격을 받는다.

그 무렵 로제티는 새로운 연인(!) 제인 모리스를 만나 안정을 찾으려고 했는데….그 소식을 들은 후 다시 불안에 휩싸인다.말년의 그는 불안정한 정신을 안고 사실상 은둔 생활을 했다.끝내 1882년,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나이는 쉰네 살.엘리자베스가 죽고 20년이 흐른 후였다.

“사랑은 (…) 수의를 두른 채”


엘리자베스 시달,자화상,1853~1854,캔버스에 유채,개인소장

죽은 사랑을 위해 울지 마세요.
사랑은 진실하지 않은 때가 많아요.
사랑의 색은 파랑에서 빨강,
밝은 빨강에서 다시 파랑으로 변해요.
사랑은 일찍 죽을 운명을 타고났고,
수의를 두른 채 누워 있어요.
(…)
이는 엘리자베스가 생전에 남긴 시였다.제목은 <죽은 사랑>이다.

그녀는 사랑을 믿었다.사랑과 예술이 한 도화지에서 함께 나아갈 수 있고,이들이 엮여 더 화사한 꽃도 피울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그랬던 그녀가 끝내 이런 시를 쓰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다는 것.앞으로도 두고두고 거론된 미술사의 비극이리라.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이젤 앞에 앉아있는 엘리자베스 시달,1852

참고자료


미술대사전(인명편),한국사전연구사(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에 대해선‘로제티’가 아닌‘로세티’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지만,미술대사전에 맞춰‘로제티’로 썼어요.)

Life of Dante Gabriel Rosetti,Knight,Joseph,Franklin Classics Trade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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