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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 화가'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
앙리 마티스(1869~1954).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평생의 라이벌이었던,20세기 최고의 화가로 불리는 거장이자,예술의 나라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가.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보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작품도 우리에게 꽤나 친숙합니다.전시도 여러 번 열린 적이 있고,인테리어 상품으로도 인기가 있어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거든요.
그런데 사실 이런 의견도 적지 않습니다‘괜찮긴 한데,작품의 뜻은 잘 모르겠다‘20세기 최고라고 부를 정도로 대단한 평가를 받는 화가인지는 몰랐다’좀 더 과격한 의견들도 있습니다‘너무 단순한 거 아닌가‘그냥 인테리어 소품 아닌가‘색깔이 이상하다’….이런 반응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어떤 작품이든 취향에 안 맞을 수 있고,싫어하는 것도 각자의 자유니까요.사실 마티스를 몰라도 살아가는 데 아무 지장은 없습니다.
마티스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 딱 그랬습니다.마티스가 세상을 떠난 후 30여년이 흐른 1990년,한 미술사학자가 마티스가 태어나 자란 프랑스 북부의 시골 마을을 찾았습니다.마티스는 생전에 이미 세계 최고 거장의 반열에 올랐던 작가.하지만 그의 고향에 있는 젊은이들은 마티스의 이름조차 잘 몰랐습니다.
생전의 마티스를 기억하거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노인들은 한술 더 떴습니다.“마티스,그 멍청이 말이군요.우리 마을에서 유명한 바보였습니다.어르신들은 마티스를‘세 번 실패한 패배자’라고 불렀어요.아버지 가게도 물려받지 못했고,공부에도 실패했고,화가가 돼서도 실패했으니까요.어린아이들도 마티스보다는 더 그림을 잘 그릴걸요.” 연구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계 최고 거장이라는 타이틀과,고향 마을에서의‘세 번 실패한 패배자’라는 모욕적인 별명.이런 차이는 어디서 왔을까요.마티스는 왜 세계적인 거장으로 인정받았고,고향 마을 사람들은 왜 반대의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마티스의 삶과 함께 그 이유를 되짚어 봅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북부의 시골마을(르 샤토 캄프레시스)에서 씨앗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어머니는 페인트 가게의 점원이었습니다.아버지는 장남인 마티스가 당연히 가게를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사춘기 아들이 연극 배우가 되고싶다고 했을 때,헛소리하지 말라며 뺨을 때린 것도 그래서였습니다.감수성이 예민했던 마티스가 위경련과 복통,탈장 증상을 호소했을 때도 아버지는 말했습니다.“저렇게 허약해서야,씨앗 자루를 짊어지고 배달하는 일은 못 하겠군.가게도 못 물려주고,저걸 어디에 써먹을지.쯧쯧….”
스무살이 넘을 때까지만 해도 마티스는 자신이 화가가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법률가가 되거라.” 아버지는 말했습니다.마티스는 그러기 싫었습니다.하지만 달리 하고 싶은 것도 없었고,혼자 벌어 먹고 살 재주도 없었던 마티스는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래서 그는 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변호사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했습니다.하지만 마티스의 마음속에는 뭔지 모를 울화와 스트레스가 쌓여갔습니다.그리고 스물한 살 때인 1890년,어릴 때부터 앓던 탈장이 악화된 탓에 마티스는 거의 1년 간 병원에 입원해 요양을 하게 됩니다.

구원은 갑작스레 찾아왔습니다.“많이 심심하지?그림이라도 그려 보면서 기분 전환을 해 보려무나.” 그의 어머니가 선물한 미술 도구 상자.자상한 어머니의 배려가 담긴 그 작은 상자가 마티스의 삶을 바꿨습니다.마티스는 선물받은 도구로 잡지나 책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그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그 전에는 아무 것도 관심이 없었다.하지만 내가 붓과 물감을 손에 쥔 순간,이게 바로 내 삶의 모든 것이 될 거라고 직감했다.그림은 나에게 낙원과도 같았다.” 오랜 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하는 날,마티스는 입원할 때의 우울하고 무기력한 청년과는 딴판으로 달라져 있었습니다.이제 그에게는 활기가 있었고,꿈이 있었습니다.
마티스의 앞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화가가 되겠다”고 말하자 아버지는 노발대발했습니다.“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무의미한 짓이야.너는 굶어 죽을거다.” 아버지의 폭언보다 더 아팠던 건,마티스가 또래의 화가 지망생들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었다는 겁니다.파리로 떠나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마티스는 다른 젊은 화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공부에 몰두했습니다.어머니가 보내주는 용돈으로 간신히 생계만 유지하며,밤낮으로 그림을 그리는 생활.형편은 어려웠습니다.하지만 괜찮았습니다.훗날 마티스는 회고했습니다.“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뭔가에 열중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빛이 나는 법.마티스의 곁에는 그의 빛을 알아보고 돕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1892년 만나 아내가 된 아멜리에가 가장 큰 도움을 줬습니다.그녀는 모자 가게를 열어 마티스를 먹여살렸고,그림이 팔릴 때마다 제비꽃 한 다발을 선물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남편을 지탱해 줬습니다.폴 시냐크는 그에게 점묘법으로 영감을 줬고,존 러셀(지난주 칼럼에서 다뤘습니다)은 그에게 고흐의 그림을 선물하며 색채를 쓰는 법을 알려줬습니다.“아주 좋아,친구.넌 재능이 있어.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말고 하고싶은 대로 해.” 그렇게 마티스는 삶의 색채에 서서히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른여섯 살이 되던 1905년,프랑스 남부의 어촌 마을 콜리우르에서 마티스의 색채가 폭발합니다.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그림에 몰두하면서 자신만의 화풍을 찾은 겁니다.마티스는 눈에 보이는 색이 아니라 자신이 쓰고 싶은 색을 마음대로 캔버스에 칠하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같은 뜻을 갖고 있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그 해 파리 가을 전람회에 작품을 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빴습니다.“뭐야?색이 엉망이잖아.” “멋대로 색을 쓰다니,마치 야수(짐승)같은 그림이군.” “물감을 엎은 건가?” 평론가와 대중은 마티스와 동료들에게 조롱을 퍼부었습니다.그럴 만도 했습니다.당시까지만 해도 그림 속 색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색과 비슷해야 했습니다.모네,세잔,고흐처럼 독창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색에서만큼은 그 불문율을 지켰지요.하지만 야수파는 달랐습니다.비유하자면 클래식만 존재하던 세상에서 처음으로 록과 힙합 음악을 들은 것 같은,평생 부드러운 맛의 요리만 먹다가 처음으로 마라탕을 맛본 것과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새롭고 생소하고 자극적인 화풍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부유한 수집가였던 미국인 거트루드 스타인과 레오 스타인 남매가 그랬고,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부자 세르게이 슈추킨이 그랬습니다.슈추킨은 마티스의 그림을 접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마티스 그림의 신선함에 마음이 미친 듯 떨린다.눈을 감아도 그림이 보인다.“ 이들이 작품을 사들인 덕분에 마티스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그러는 사이 마티스의 명성도 점차 높아졌습니다.부자들이 작품을 샀다는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마티스의 그림이 대중의 눈에 익으면서 그의 작품 속 색채들의 묘한 조화와 매력,신선함이 점차 마음에 스며든 덕분이었습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과 글로 표현합니다.그걸 음악이나 춤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있습니다.사랑으로 예를 들어봅시다.사랑의 말이나 시를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아름다운 사랑 노래나 에드워드 엘가의‘사랑의 인사’와 같은 클래식 음악이 될 수 있겠지요.춤으로 표현하는 방법도 많습니다.열정적인 탱고나 발레의 파드되(2인무)처럼요.그렇다면 그림은 어떨까요.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연인이나 가족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어떤 장면을 그릴 게 아니라,색(色) 그 자체로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마티스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여기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페인트 가게에서 본 다채로운 색상,고향 마을 사람들이 만든 형형색색의 직물이 그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던 것도 영향을 끼쳤습니다.마티스는 말했습니다.“그림을 그린다는 건 색채를 겹쳐 쌓는 것이다.음표 하나는 곧 색채 하나.음표 여러 개가 화음을 이루듯이,색채 여러 개는 삶을 이룬다.” 다시 말해,마티스의 그림에서 색은‘사물을 보여주는 물감’이 아니라‘삶과 감정을 보여주는 음표’였던 겁니다.


이런 색을 통해 마티스가 표현하려고 했던 감정은 평온과 휴식.마티스는 인생의 초반을 불안과 억압 속에서 보냈고,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뒤에도 가난과 비판에 시달려왔습니다.성공한 후에도 딸의 투병,아내와의 이혼 등 괴로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그 모든 일을 겪는 내내 마티스는 마음의 평화를 간절히 바랐습니다.그래서 말했습니다.“나는 불안을 없애고 정신적 위안이 되는 예술,일상에 지친 사람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안락의자와 같은 예술,모두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술을 그리고 싶다.” 그래서 마티스의 그림에서‘무엇을 그렸는지,즉 소재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중요한 건 마티스가 섬세하게 골라 배치한 색과 구도가 얼마나 보는 이의 마음을 정화하고 위로하는지입니다.
마티스의 그림이 처음 보면 강렬하고 이상해 보일 수 있지만,계속 보다 보면 그 안에서 일종의 평화로운 고요가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마티스를 조롱하고 비판하던 사람들도 그 고요를 느꼈습니다.마티스가 40대였던 1910년대부터 그의 작품은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50대인 1920년대에는 마티스라는 이름이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그럼에도 마티스는 자만하지 않고 더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침내 60대인 1930년대 세계 미술계에서 그의 위상은 정점에 달했습니다.독일,프랑스,미국에서 연이어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고,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마티스 회고전은 미술사에 남은 전설적인 전시가 됐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증명하듯이,그는 70대의 나이에 성치 않은 몸으로 완전히 새롭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젖힙니다.색종이를 오려 그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겁니다.마티스는 이제 붓 대신 가위를 들었습니다.그는 종이에 색을 칠하고 이를 잘라낸 뒤 이리저리 붙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이런 방식은 원래 붓으로 그림을 그리던 방식보다 몸에 부담이 덜하면서도 더 즉흥적이고 대담한 색채와 모양 실험을 가능케 했습니다.



20장 넘는 종이 작품을 모아 펴낸 화집에‘재즈’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종이 작품의 즉흥적인 성격이 재즈와 닮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마티스는 말했습니다.“가위로 종이를 자르는 건 연필이나 목탄보다 섬세하면서도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해방감을 준다.내 작품은‘가위로 그려서’색채와 형태의 경계를 허문 그림이다.” 원색의 종이들이 만들어낸 자유로운 색과 모양들.80이 다 된 나이에 그는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습니다.비록 몸은 침대와 휠체어를 오갔지만,마티스의 마음은 여전히 청년이었습니다.
생의 마지막 나날,마티스의 작업실 벽면은 색색의 종이 형상들로 뒤덮여 마치 환상적인 정원처럼 변해 있었습니다.주변 사람들과 의사의 만류에도 그는 가위를 내려놓지 않았습니다.그리고 84세이던 1954년 11월 3일,마티스는 영면에 들었습니다.세상을 떠난 그의 침대 머리맡에는 가위와 색종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도 유명한 사람이 있었다고요?마티스?그게 누구죠?이것도 그림인가요?” 1990년대 연구를 위해 마티스의 고향 마을을 찾은 전기 작가 힐러리 스펄링은 이런 반응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스펄링은 연구를 진행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마티스의 업적을 알렸습니다.마티스의 풍부한 색채를,온라인 룰렛 라이브그가 일궈낸 업적과 명성을,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취를 이뤄낸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그리고 마티스의 작품 속 풍부한 색채가 고향 마을이 생산하던 다채로운 옷감에서 왔다고 밝혔습니다.그리고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지역 신문들은 앞다퉈 “우리 마을에는 거장 마티스가 있었다”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화가가 고향에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는 관광 코스인‘마티스 루트’가 만들어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시의회는 마티스의 아버지가 운영했던 씨앗 가게 건물을 사들여 이름을‘마티스 하우스’로 바꿨습니다.마침 열린 마티스 전시는 지역 주민들 덕분에 역대 최대 규모의 관람객 수를 기록했습니다.지역의 관광 자원을 개발하겠다는 속물적인 의도가 아니었습니다.마을 사람들은 진심으로 마티스를 자랑스러워했고,그의 작품에서 감동과 사랑을 느꼈습니다.

마티스의 고향 마을 사람들의 이런 변화는 우리가 뭔가를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줍니다.때로 우리는 바로 곁에 있는 가치 있는 것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산다는 건 바쁘고 힘겨운 일이니까요.하지만 일단 관심을 가지고,알게 되고,내 삶과의 접점을 찾게 되면 우리의 시각은 완전히 달라집니다.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바뀌는 경험은 마치 마법과도 같습니다.그런 경험이 많아질수록,삶은 풍성해지고 살아볼 만한 것으로 변합니다.
제가 매주 전하는 미술과 작가들의 이야기가 이런 경험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The Unknown Matisse: A Life of Henri Matisse(힐러리 스펄링 지음),앙리 마티스(폴크마 에서스 지음,김병화 옮김),힐러리 스펄링이 2005년 가디언에 쓴 'Matys?Mathis?Qui?'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연재물입니다.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이미 구독 중인 7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그림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그때 그 사람>으로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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