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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외전] 조선어학회 사건,고명걸·장복성·채석진 그리고 신동영의 한글 전파 
일본이 강요한 문자 생활은 한국인들에게 고통과 부담을 줬다.그것은 하나를 버리고 둘을 새로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히라카나와 가타카나는 물론이고 한자까지 공부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고대 이래로 한국인들은 한자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그래서 고대 한국인들은 한자를 알파벳처럼 활용하는 이두를 고안해냈다.이두문자를 한국어 어법에 맞춰 쓰는 모습은 조선시대 관공서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13년 전인 1579년 6월 30일(음력 6.7),황해도 백천군의 노비들인 막심과 막동이 매매됐다.이 거래를 증명하기 위해 관아에 제출된 계약서 겸 영수증인 명문(明文)은 한문이 아닌 이두로 작성됐다.이 문서에는 우리말 '은/는'이 와호(臥乎)로 표기돼 있다.
머릿속으로는 주어-목적어-서술어 순으로 생각하고 글을 쓸 때는 주어-서술어-목적어 순으로 배열하는 게 한국인들에겐 불편했다.그래서 막심·막동의 주인 같은 양반들도 법률문서나 공문서를 작성할 때는 이두를 쓰는 예가 많았다.조선시대에 훈민정음이 대중화되지 못했다고들 하지만,한자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1894년 동학혁명을 계기로 한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동학혁명으로 양반계급의 권위는 추락했고,이 때문에 양반의 문자인 한자의 권위도 떨어졌다.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한자에서 벗어나던 한국인들에게 일제가 강요한 것이 한자 없이 쓰기 힘든 일본 문자다.이 강요가 얼마나 진절머리 나는 것인지는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이 잘 증명한다.
조선어학회 사건과 무명 투사들
한글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최현배나 이희성 같은 조선어학회 관계자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다.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투사들이 이에 동참했다.그중에는 어린이나 청소년도 많았다.이들의 활동 중에는 독립운동으로 봐야 할 사례도 적지 않다.국가보훈부에 의해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한 고명걸·장복성·채석진과 신동영의 활약도 그런 사례에 포함된다.
강원도 원산에 명성(明星)학원이 있었다.원산불교포교소가 설립한 이 학교는 서민층 자녀를 위한 보통학교(초등)였다.1932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3면 우상단은 "무산아동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라고 소개했다.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나 소작농의 자녀들이 많이 다닌 학교였다.
명성학원 학생 고명걸은 1934년 여름에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문자보급운동에 참여한 5078명 중 1인이다.조선일보사는 외형상 이 운동을 한글운동이 아닌 문맹퇴치운동으로 설정했다.일제 식민정책이 한반도 곳곳에 파급되기 위해서는 문맹률이 떨어져야 했다.어느 문자든지 간에 조선총독부와 소통할 수 있는 문자를 대중이 해득하는 게 일제의 한국인 동원에 유리했다.그래서 총독부는 경찰을 동원해 감시와 훼방을 하면서도 이 운동을 전면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이 운동은 한글운동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국 독립에 유리하고,문맹퇴치운동이라는 측면에서는 총독부에 불리하지 않았다.이런 모호성에 힘입어 보통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약 5천 명이나 참여할 수 있었다.
고명걸은 그 5천 중에서 두드러졌다.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 제10권: 대중투쟁사>에 그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그 때문이다.<대중투쟁사>는 "원산의 고명걸(원산 명성학원)은 가가호호를 방문,한글책을 나눠주다가 '너희들이 뭘 가르치느냐'는 시비에 매까지 맞았다"고 알려준다.
1934년 9월 8일자 <조선일보> '매까지 맛고 가가호호 방문'에 따르면,여름방학을 맞이한 고명걸은 같은 학교 장복성·채석진과 함께 집집마다 방문해 한글 교재를 배포했다.그러다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만나면 시간을 따로 정해 한글을 가르쳤다.
초등학생인 고명걸은 한글 교사의 능력은 물론이고 세일즈맨의 능력까지 과시했다.1934년의 문자보급운동을 정리한 1973년 10월 16일자 <조선일보> 4면 특집에 따르면,이 신문사가 참가자 5078명에게 교재 발송을 완료한 시점은 1934년 7월 6일경이다.
이날 이후에 교재를 받고 운동 참여를 준비했을 고명걸은 장복성·채석진과 함께 7월 24일까지 수강생 80명을 모았다.위의 1973년 특집에 따르면,평북 용천,토토 초보황해도 해주,노 리밋 시티 슬롯충남 아산,전남 부안 등지에서는 경찰의 불허처분으로 문자보급운동이 중지됐다.문맹 퇴치를 돕는 측면이 있어 묵인됐던 운동이 민족주의 성격이 농후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현지 경찰이 자체 단속에 나선 결과다.이렇게 일경들이 감시의 눈길을 번득이는 속에서 고명걸과 친구들은 무려 80명을 모았다.
학원을 차려도 될 정도의 수강생들을 모은 고명걸은 원산불교포교소와 교섭해 장소를 빌렸다.이를 계기로 한글 수업이 포교소의 정식 강좌가 됐다.이때가 7월 25일이다.이 강좌는 8월 20일까지 계속됐다.
고명걸과 친구들은 상당수의 수강생들을 한 달 이내에 졸업시켰다.위 1934년 기사에 실린 고명걸·장복성·채석진의 활동 보고서에는 "해득한 사람은 먼저 졸업식이고 해득치 못하는 아이들만을 최후까지 갈으켯습니다"라고 적혔다.한글을 다 배운 학생은 다음날부터 나오지 못하게 하고,나머지 학생들에게 집중했던 것이다.어린 세 교사의 집중과 열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문자보급운동 참여자들에게 강조된 표어 중 하나는 기미독립선언문 공약 3장에 나오는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를 연상케 한다.1973년 특집에 따르면,"최후의 1인까지 퇴치할 각오를 가지자"라는 표어가 각 참가자들에게 강조됐다.고명걸의 보고서에 나오는 "해득치 못하는 아이들만을 최후까지 갈으켯습니다"라는 대목은 그가 그 표어를 가슴 깊이 간직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시련과 고초
근 2개월에 걸친 세 친구의 활동에는 시련과 고초가 따랐다.가가호호 방문 중에 얻어맞는 일도 있었다.활동 보고서에서 고명걸은 "교재를 논아주다가 매까지 마젓습니다"라며 "너이들이 무엇을 갈으겟느냐는 것이 리유엿습니다"라고 말했다.어린 것들이 뭘 가르치겠다고 이러고 다니냐며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고명걸·장복성·채석진 외에도 두각을 보인 어린이 활동가들이 있다.교복 차림의 학생 사진과 함께 실린 1934년 8월 28일자 <조선일보> 4면에 따르면 서울 수송공립보통학교 5학년인 12세의 신동영은 3주일 만에 100명의 한글 터득을 도왔다.그는 나흘 정도 간격으로 졸업생들을 배출했다.고명걸 등은 수강생 80명을 다 모아놓은 뒤에 강좌를 개설한 반면,신동영은 한 강좌를 열어 졸업생을 배출한 뒤 새로운 강좌를 여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여름방학 중에 함북 청진에 와서 한글을 전파하는 신동영을 보고 지역 사람들은 '게 새끼(거이 새끼)'란 말을 했다."저것이 다 남을 가르치다니"라며 "거이 새끼는 난 날부터 기어다닌다더니 아무개 자손은 나는 날부터 선생이야"라고 칭송했다.
술과 돼지고기를 들고 숙소를 방문한 학부모들이 "신 선생님" 하며 술을 권하자,위 기사에 따르면 신동영은 "조고마한 것이 무슨 술을 먹습닛가?"라며 사양했다.그러자 학부모들은 "조고마한 것이 선생은 엇더케 하느냐?"고 대꾸해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
고명걸·장복성·채석진과 '신 선생님'은 1919년 3·1운동 즈음이나 그 이후에 태어났다.이들은 3·1운동에 놀란 일제가 한국인들의 합법적 민족주의 활동을 마지못해 허용해주던 시기에 한글보급운동을 벌였다.곳곳에서 일경들이 감시하는 속에서도 우리글을 전파하겠다며 여름방학을 고스란히 민족에 바친 존경할 만한 어린이 혹은 청소년들이다.
이들에게 한글을 배운 아이들은 거의 다 3·1운동 이후에 태어난 세대다.3·1운동 백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이 3·1운동을 절절하게 대하고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인양 애착을 갖게 된 데는 이 세대의 역할도 적지 않다.이 세대가 부모나 선배들이 겪은 3·1운동의 기억을 다음 세대에 절절하게 전달해주지 않았다면,오늘날의 우리가 이 운동을 찡한 마음으로 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 세대가 3·1운동을 소중히 기억하고 독립의 가치를 귀중히 여긴 데는 일경의 감시 속에서도 그 세대에 접근해 한글을 가르쳐준 고명걸·장복성·채석진·신동영 등의 역할도 컸다.우리글을 배워야 한다며 후배들을 독려한 이 학생들을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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