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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 단상.처가 반대 극복,요즘 텃밭에서 농작물 함께 가꾸는 재미에 빠졌습니다【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며칠 전 5월 5일,이날은 어린이를 위한 날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나는 34년 전 5월 5일에 결혼했다.올해 5월 5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 34주년 기념일이었다.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공교롭게도 어린이날과 겹쳐서 매년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공휴일이다.
국가적인 축하를 받는 기분이 드는 데다 웬만해서는 잊고 지나칠 일이 없어서 좋았다.덕분에 그동안 결혼기념일을 잘 챙기는 남편으로 살 수 있었다.아들딸이 어릴 때는 우리 가족 모두에게 5월 5일은 특별한 날로 여겨지면서 즐거운 하루를 보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우리 부부는 1963년생 토끼띠,동갑내기이다.세는나이로는 63세인데,공식적인 만 나이를 이야기할 때는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하다.나의 주민등록상 출생 연도는 1964년으로 되어 있어서 나이를 말할 때마다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이게 된다.
예전에는 자녀를 출산한 이후에 곧바로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한 부모가 많아서 실제 생년월일과 맞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모든 게 부족하고 미비했던 시절이라 출생 신고도 제때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다.그런데 아내는 우리 세대에서는 보기 드물게 정확하게 생년월일이 등재된 경우라 공식적으로는 나보다 연상이다.가끔 누나와 결혼한 연하남이라며 아내의 장난기 있는 놀림을 받는다.
연애 시절 처가의 반대를 극복한 용기
나는 25살 때 아내와 만나 연애를 했다.첫눈에 반해서 따라다녔다기보다 우연히 만날 기회가 많아지면서 연애 감정이 싹트게 된 것이다.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사랑도 깊어졌다.당시에는 미혼 여성들이 대부분 20대 중후반에 결혼했던 시절이라,처가에서는 아내가 혼기를 놓칠까 봐 맞선 상대를 알아보는 낌새가 있었다.
처가에서도 내가 아내와 연애 중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나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처가의 가족들은 아내가 나와 헤어질 것을 종용했고,나는 아예 사윗감에서 배제됐다.그 당시에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고학생 신분이라 여러 가지 사정상 결혼할 상황은 아니었다.처가에서 우리의 만남을 반대하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그렇다고 아내와 순순히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아내를 향한 사랑은 이미 가슴 깊숙이 자리를 잡았고,아내와 평생을 함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아내로부터 날벼락같은 소리를 들었다.처이모의 소개로 아내가 맞선을 보고 왔다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피가 거꾸로 솟았다.내가 아내에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지 못해서일까.내 마음과는 달리,아내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나의 현실적인 상황은 좋지 않았고,처가의 반대도 심하니 아내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우리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뭔가 특단의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큰마음을 먹고 아내와 함께 처가를 찾아갔다.아내의 부모님 앞에서 따님을 사랑하니 평생 책임지겠노라고 패기 있게 말씀드렸다.대학을 졸업하는 동시에 취업을 하고,취업 후 1년의 여유를 주면,결혼 준비까지 끝낼 테니 그때까지만 지켜봐 달라고 했다.긴장이 됐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났는지.그때는 아내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간절함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나의 확신에 찬 용기가 통했는지 처가의 반대는 누그러졌고,흔들리던 아내의 마음도 안정을 찾았다.
맨손으로 시작한 신혼.고부 갈등은 고난이도 숙제였다
그 이후 나는 약속한 대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했고,월급을 모아서 결혼 자금을 마련하여 주변의 축하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맨손으로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생활,부족한 게 많았지만 하나하나 이루고 쌓아가는 재미와 성취감 속에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아들딸을 낳아 기르면서 세월은 흘러갔다.
첫아들을 낳았을 때의 기쁨,아프리카 킬 룰렛둘째로 딸이 태어났을 때의 또 다른 환희,셋방에서 셋방으로 전전하며 이사를 다니다가 우리집을 처음 마련했을 때의 뿌듯함을 잊을 수가 없다.부모님이 한 분씩 돌아가실 때의 걷잡을 수 없었던 슬픔,아이들을 키우고 성장 과정을 지켜보면서 겪었던 즐거움과 어려움이 인생의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 간다.
우리 부부의 인생 여정에서 가장 힘든 고비는 지금도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아있다.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고부 갈등',이건 우리 부부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고난이도의 숙제였다.성격이 완고하신 어머니와 어머니를 어려워하는 아내 사이에서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어머니도 당신의 불만을 나에게 말씀하셨고,아내도 어머니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었다.
모두 내가 감당할 몫이었지만,때로는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싶었다.아내가 어머니에게 나름대로 성의껏 노력을 다한 것을 안다.어머니가 좀 더 일찍 아내에게 마음을 여시고 딸처럼 대해 주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그래도 어머니가 생전 말년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간 것은 두고두고 눈물짓게 한다.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리 부부의 삶은 오늘에 이르렀다.
"여보,당신 나와 결혼한 거 후회하지 않아?"
"후회할 리가 있나.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가끔 아내는 뜬금없이 이렇게 묻는다.한결같이 나의 대답은 똑같다.후회한 적 없다고.
그냥 듣기 좋으라고 건성으로 하는 대답이 아니다.때로는 아내의 물음이 의아할 때도 있지만 한 번씩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여자의 마음이라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내가 후회하는 것처럼 보여서 그러는 건가 싶어 스스로를 되돌아보기도 한다.
성격 다르지만,맞추며 하나 되어가는 부부의 인생길
간혹 아내와의 성격 차이로 일상생활에서 티격태격할 때도 있기는 하다.아내는 눈치와 행동이 빠르고 민첩해서 무슨 일이든 미루지 않고 재빠르게 처리한다.나는 느긋하고 꼼꼼하여 아내의 행동을 따라가지 못한다.급히 외출할 일이 생기거나 시간에 쫓기는 가정사를 처리할 때는,아내는 재촉하기에 바쁘고 나는 너무 서두르지 말라며 응수한다.
급할 때는 성격이 나오지만 오래가지는 않는다.인생길을 같이 가면서 서로의 성격을 맞추는 지혜를 터득하며 산다.우리 부부의 삶의 토대는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결혼하면 엄마 아빠처럼 살고 싶어요.엄마 아빠처럼 살 수만 있다면 결혼하고 싶은데."
올해 30대로 접어든 미혼 딸에게서 한 번씩 듣는 기분 좋은 칭찬이다.아마도 자식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엄마 아빠가 성격이 상반되는데도 크게 싸우지 않고 맞추어가면서 항상 서로를 먼저 생각하고 아껴주는 모습에서 따뜻함을 느꼈다니,오히려 부모로서 고마울 따름이다.딸의 눈에 비친 엄마 아빠의 삶이 아름답게 보인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고 콧날이 시큰해진다.
부모님은 다 돌아가시고 아들딸이 외지로 떠나간 지금,우리 부부는 다시 신혼처럼 둘만 남아서 살고 있다.은퇴 이후 우리 부부는 과거 어느 때보다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틈틈이 집주변 하천변을 산책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마트에서 이것저것 물건도 고르며 장보기를 즐긴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는 텃밭에서 농작물을 함께 가꾸는 재미에 빠져서 심신의 건강도 챙기고 있다.신혼 시절 단칸방에서는 미래를 설계하며 가슴이 부풀었다면,지금은 과거를 회상하며 추억에 젖으면서 행복한 노후를 꿈꾼다.이제 가장 큰 소망은 남은 인생을 아내와 함께 건강하게 백년해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