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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애 주연 연극‘헤다 가블러’
입센 원작 속 인물 현대적 재해석
/LG아트센터
“이 집엔 죽음의 냄새가 있어요.까맣게 마른 꽃다발 같은.나한테 주어진 소명이 하나 있긴 해요.여기서,죽도록 지루해하는 거.”
강서구 LG아트센터 서울의 1400석 규모 대극장 LG시그니처홀,사방이 닫힌 잿빛 정육면체 같은 무대에 선 배우 이영애가 말했다.올해 상반기 연극계 최고 화제작‘헤다 가블러’가 7일 개막하며 베일을 벗었다.뒤틀린 냉소를 입가에 머금은‘헤다’이영애는 얼음처럼 차갑다.
‘노라’대척점의 문제적 여자‘헤다’
소중한 원고를 잃어버리고 삶의 의지까지 꺾인 옛 연인‘에일레트’(이승주)에게 죽음을 충동질하듯 총을 건넨 뒤,숨겨뒀던 바로 그 원고를 불살라버리는‘헤다’(이영애)의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워서 더 공포스럽다./LG아트센터‘현대 연극의 아버지’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 원작 연극의 주인공 헤다는 시대를 100년은 앞서간 복합적 캐릭터.보는 사람에 따라‘여자 햄릿’이거나‘악녀’혹은‘마녀’였다.애초에 남편의 아내로 규정돼 살기를 거부하다 파국을 맞는다는 점에서,
도박 참는법남편의 아내로 살다 독립적 개인으로 각성하는 입센의 또 다른 연극‘인형의 집’주인공‘노라’와는 거울에 비쳐 좌우가 뒤바뀐 것처럼 캐릭터의 성격이 역전돼 있다.
가블러는 결혼 전의 성(姓)으로,결혼 후의 이름은 헤다 테스만.연극의 제목부터 헤다가 한 남자의 아내이기보다는 독립적 개인,남편과는 차원이 다른 상류 계급이었던 아버지의 딸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LG아트센터의‘헤다 가블러’는 입센의 원전 대신 영국의 연극연출가·영화감독인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을 사용했다.19세기 말 노르웨이 상류사회라는 원작의 배경은 사실상 지워졌으며,여성을 향한 구시대적 억압보다 개인의 심리와 선택에 더 집중한다.욕망하고 분노하는 헤다의 모습도 더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헤다는 이름난 장군의 딸이었지만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교수가 될 학자 테스만과 사랑 없는 결혼을 하며,권태 속에서 몸부림치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이며 학자로서 남편의 경쟁자인‘에일레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대극장 무대 위에서도,이영애는 이영애
32년 만의 연극 무대라지만,이영애는 이영애.그것이 사람이든 의자든,꽃이든 피아노든,이영애는 순식간에 자신의 연기 자장(磁場)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색깔로 물들일 줄 아는 배우다.그 카리스마는 극장 스크린이냐 라이브 무대냐의 문제에 좌우되지 않는다.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걸어들어와 무대 맨 뒤편 가운데 의자에 자리를 잡는 순간부터,무대도 객석도 살짝 턱을 치켜올리고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차가운 시선에 사로잡힌다.여린 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운이 안개처럼 공간을 채우는 듯하다.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색색깔 풍선을 하나로 묶어 무대 위에 붙잡아둔 굵고 흰 줄은 이영애‘헤다’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처럼 팽팽히 당겨져 있다.남편과 시고모를 포함한 세상의 하찮은 존재들에 대한 경멸도,끈적하게 치근덕대는‘수컷’들과의 심리 게임도,어쩌면 유일하게 사랑했을지도 모를 한 남자를 다시 자신의 통제하에 두고 디오니소스적 자유의 목줄로 매어두고 싶은 욕망도,모두‘헤다’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다 부질없고 부질없다.
이영애 카리스마 든든히 받치는 베테랑 배우들
'헤다'(이영애·왼쪽)는 학창 시절 2년 후배였으나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테아'(백지원)가 옛 연인 '에일레트'(이승주)가 학자로 재기하도록 돕고 있었다는 걸 알고 그녀를 이용해 다시 에일레트를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려 한다./LG아트센터 무엇보다 이 연극의 강점은 아직은 라이브 연기가 낯선 이영애의 무대 위 카리스마를 든든히 뒷받침하는 베테랑 배우들의‘합(合)’이다.이영애의 연기 결이 살짝살짝 흐트러질 때조차 함께한 배우들이 내공으로 너끈히 받아 안는다.남편‘테스만’김정호,헤다에게 추근대는‘브라크 판사’지현준,옛 연인‘에일레트’이승주,에일레트가 학자로 재기하도록 돕는 헤다의 학교 후배‘테아’백지원 등 모두 대극장 연극 경험이 풍부하다.
LG아트센터 이현정 센터장은 제작 발표회 자리에서 “우리 무대 위엔 빌라도,햄릿,
토토 은행 등기라네프스카야가 있다”고 한 적이 있다.지현준은 뮤지컬‘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의 빌라도였고,이승주는 지난해 연기 경력 60년을 넘나드는 연극계‘전설’들이 단역 출연을 마다치 않았던 연극‘햄릿’의 주역 햄릿이었다.백지원은 국립극단의 체호프‘벚꽃동산’에서 주인공 귀부인 라네프스카야를 맡았던 배우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로펌 대표 변호사‘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아이유)의 해녀 이모로도 낯익다.
묵직한 분위기에 숨통 틔우는 차진 농담도
'헤다'의 남편이자 선량한 학자 '테스만'(김정호·오른쪽)은 코믹 연기의 달인답게 '고모'(이정미)와 함께 극의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거워질 때 마다 유머로 관객이 숨 쉴 공간을 열어 탄탄히 극을 받친다./LG아트센터‘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키리에’등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을 거둔 연극을 다수 만든 전인철 연출가는 부조리한 블랙 유머로 묵직한 분위기에 숨통을 틔운다.헤다의 고통은 단순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나 결혼 생활의 권태가 아닌 실존의 한계,갇혀 있다는 감각에서 나오는데,자칫 답답해질 수 있는 흐름에 차진 농담들을 심어 놓았다.
예를 들어 시댁 고모의 모자를 두고‘하녀 것 같다’고 티격태격하다 고모가 돌아갈 때 헤다가 “오늘,예쁘세요” 하면,남편이 쫓아나와 “예쁜 건 헤다죠” 하고 외친다.브라크 판사는 처음 등장할 때 제 손으로 개선 행진이라도 하는 양 금가루를 허공에 뿌리며 들어서고,집 뒷문으로 도둑처럼 숨어들다 헤다가 쏜 총에 맞을 뻔하기도 한다.놀라는 브라크를 향해 헤다는 천연덕스럽게 묻는다.“맞았어요?” 관객은 폭소를 터뜨리며 숨 쉴 공간도 함께 얻는다.
무대 뒤편 가득 채운 이영애 클로즈업 영상
/LG아트센터 현대 연극에선 배우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무대에 올라 다른 배우를 촬영하고 그 영상이 실시간으로 무대에 영사되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이 영상 활용도 전인철 연출의 특기 중 하나‘헤다 가블러’역시 대극장 무대 뒤편을 배경막 삼아 이영애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가득 채우는 영상 활용이 영리하다.
덕분에 헤다가 “유일하게 날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며 장군이었던 아버지가 물려준 아름다운 권총을 껴안고 볼에 비비며 쓰다듬을 때,옛 연인 에일레트와 숨 막히는 대화를 나눌 때,그가 쓴 걸작 원고를 불태워 버릴 때,관객은 배우 이영애의 섬세한 표정 연기를 대형 스크린에서처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관객과 무대의 거리가 먼 대극장의 약점을 피하면서 극의 몰입도도 높이는 장치다.
억압이나 권태 넘어서는‘헤다’의 복합적 정서
멸시했던 여자에게 “넌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모르지?”라고 물을 때,“죽을 것 같애,
abs 카지노 주소이 모든 게 날 죽이고 있어”,혹은 “내가 손대는 건 모든 게 천박하고 멍청해지나 봐”라고 말할 때‘헤다’의 절망은 이영애의 여리지만 간절하게 단단한 목소리를 통해 구체화된다.그 목소리는 솜씨 좋은 암살자가 손에 들린 강철 피아노선으로 기척도 없이‘스윽’하고 목표물의 목을 베듯 관객의 마음으로 파고든다.
헤다의 절망은 단순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나 원치 않는 결혼 생활의 권태,누군가에게 휘둘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자유를 원하는 한 영혼을 가둔 실존의 감옥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온다.이영애의‘헤다’가 관객을 얼마만큼 설득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헤다의‘갇혀 있다는 감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극장 관객에게 교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이영애는 존재 자체로 이런 중층적 감각을 잘 전달할 수 있는 배우이고,최고의 베테랑 연극 배우들이 거기에 합을 맞춰가고 있다.연극은 회차를 거듭할수록 공감의 깊이를 더해 가게 될 것이다.
국립극단 박정희 예술감독이 직접 연출하는 '헤다 가블러'의 '헤다' 역 배우 이혜영./국립극단 LG아트센터는 지난해 전도연 27년 만의 연극 복귀작이었던 <벚꽃동산>에 이어 올해는 이영애의 <헤다 가블러>를 개관 25주년 기념 공연으로 직접 제작했다.
한편 8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할 예정이던 국립극단의 이혜영 배우 주연‘헤다 가블러’는 다음 주 16일로 개막이 연기됐다.국립극단은 7일 “공연 참여자의 긴급한 건강상의 이유로 1주일 연기한다”고 알렸다.
LG아트센터 제작 연극 '헤다 가블러'의 전혀 다른 분위기의 두 포스터.냉혹하고 잔인한 동시에 아이처럼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두 얼굴을 보여준다./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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