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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친구에게 손절당한 뒤 섭식장애
아토피로 피했던 음식 마구 먹고 토해
자기혐오·두려움 밖으로 쏟아내는 행위 섭식장애를 가진 분들의 “느끼고 싶지 않아서 먹는다”는 말은 나에 대한 혐오,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욕망에 대한 수치심 같은 감정을 밖으로 쏟아내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롭다는 뜻이기도 합니다.게티이미지뱅크
저는 식이장애를 갖고 있습니다.폭식하고 토한 지 2년 정도 됐습니다.당시 오랜 친구에게 손절을 당했습니다.짜장면을 먹으러 가자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했던 다음날,친구는 제게‘너랑 있으면 항상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어야 해서 싫다.나만 양보하는 걸 이제 안 하기로 했다’고 문자를 남겼습니다.
저는 아토피 탓에 어려서부터 먹는 것을 까다롭게 가려왔습니다.엄마는 항상 제 피부를 점검하며 몸에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분해서 먹였습니다.일반 과자를 처음 먹어본 것은 폭식을 하기 시작한 이후입니다.두부과자,쌀빵,효소음료 같은 게 제 간식이었습니다.저의 아토피도 이유였겠지만 영양사인 엄마의 직업병도 심했습니다.
손절을 당하고 처음에는 그동안 진짜라 믿었던 우정이 다 거짓이었다는 생각에 배신감이 들고 화가 났습니다.하지만 몇달 뒤,그 친구 말이 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저는 어려서부터 늘 단짝과만 친하게 지냈습니다.내성적인 성격이라 소수를 깊게 사귀는 거라 생각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학교 앞 떡볶이도,급식 최애 메뉴인 돈가스도,유행하는 과자도 안 먹는 저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친구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우리가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건 그 친구가 제게 맞춰줬기에 가능했던 거였습니다.
제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은 뒤,닥치는 대로 먹기 시작했습니다.과자,빵,튀김,라면같이 그동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음식을 마구 욱여넣습니다.배고프거나 맛있어서 먹는 건 아닙니다.그냥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하지만 먹고 나면 아토피가 심해질까 봐 다 토해냅니다.제가 건강했던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김유민(가명·23)
먹는 것에 진심이었던 한 선배는 언젠가 제게 밥을 사주며 맛없으면 삼키지 말고 뱉으라고 강조했습니다.그때는 웃어넘긴 10년도 더 된 그 말이 아이를 키우면서 종종 떠오릅니다.제 아이가 그 말을 매일 몸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아이들은 참 솔직하게도 입에 안 맞는 건 뱉어냅니다.좋아하는 건 눈치 볼 것 없이 더 달라고 하고 싫어하는 건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배도 안 고픈가 걱정될 만큼 안 먹다가 배가 고파지면 소나기밥을 먹습니다.쾌락 원리를 충실히 따르는 방식으로,배고픔과 포만감이라는 지극히 원초적인 감각의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는 방식으로 무엇을,언제,얼마만큼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아마 유민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몸의 신호에 따라 몸 안으로 들일 것과 안 들일 것을 결정했을 이 시기에는 먹는 것들이 다 맛있었을 것이고 유민님을 배부르게 했을 겁니다.음식이 만족감 그 자체였을 거예요.그러다 아토피와 함께 음식의 의미가 서서히 바뀌게 된 것 같습니다.음식은 만족감이 아닌 나를 아프게 할지 모르는 잠재적 위험이 되었습니다.이제 유민님에게 음식은 회개이자 처벌이 된 듯합니다.친구가 먹고 싶어 했던,유민님으로서는 피부 장벽이 바스러질 거란 두려움을 넘어서야만 삼킬 수 있었던 음식들을 괴로울 때까지 안으로 밀어 넣으며 유민님을 벌주고,그렇게 친구 마음을 다시 되돌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생을 거쳐 변화한 것은 음식의 의미만이 아닙니다.몸과의 관계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모든 태초의 몸은 생명력으로 가득합니다.감각하고 느끼고 욕망하는 몸은 살아 있는 나의 일부,나 그 자체로 경험됩니다.그러다 몸은 조금씩 나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몸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자꾸 생겨나기 때문입니다.유민님의 경우에는 무엇이 아토피에 좋고 나쁜가 하는 영양학적 지식이 응급하게 전경으로 떠오르면서 몸 자체의 감각과 욕구는 빠르게 배경으로 물러난 것 같습니다.몸과 유리된 채로 긴 시간을 통과하며 몸은 이제 유민님의 일부라기보다 외부 대상이 되었습니다.결함이 있고 개조가 필요한,목표에 맞게 통제되고 바로잡혀야 하는‘몸뚱어리’로 전락한 셈이지요.
사막화된 몸은 둔감하고 마비된 특성과도 이어집니다.섭식장애가 있는 분들은 감정과 욕망을 잘 느끼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어쩌면 유민님도 친구에게 버려졌다는 슬픔과 배신감,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혼란감이 너무 커서 폭식과 구토라는 강력한 마취제가 필요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폭식 뒤 느껴지는 무겁고 둔한 몸의 감각은 모든 감정적 괴로움을 뚜껑 덮듯 덮어버립니다.구토 역시 감당하기 힘든 것을 밖으로 내버리는 상징적인 행위입니다.구토를 하고 나면 텅 비워진 배 속과 함께 감정이 게워진 느낌,머리가 멍해진 느낌이 들 수 있고,그렇게 고통도 일시적으로 비워낼 수 있습니다.섭식장애를 가진 분들이 자주 말씀하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서 먹는다”는 말은 나에 대한 혐오,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욕망에 대한 수치심 같은 감정을 밖으로 쏟아내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롭다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치유는 느끼고 욕망하는 몸을 다시 되살리는 데서 시작됩니다.이건 단순히 몸을 사랑하는 것과 다릅니다.몸의 언어에 주목하고 내가 몸 안에서 살고 있다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을 뜻합니다.다르게 말하면 몸과 감정,몸과 욕구 사이의 연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감정과 욕구에 동반되는 생리적 반응을 느끼고,이를 통해 나를 이해하는 것이지요.다양한 감정과 욕망을‘먹고 싶다’로 치환하지 않고 그 자체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오랜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지만 이 연습은 분명 황폐해진 몸을 내가 깃들여 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으로 다시 피워낼 것입니다.
박아름 심리상담공간 숨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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