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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이 엄마를 본격적으로 채록하기 시작했다.최근 한국 문학과 독립영화계는 남다른‘모녀서사’로 북적인다.과거 어머니의 희생을 강조하며 사실상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만 했던 서사들이 물러간 자리에 독특한 캐릭터와 관계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새로운 모녀서사가 찾아왔다.여성 작가 혹은 여성 감독이 보여주는 어머니들은 어딘가 특이하다.자기 욕망에 솔직한 엄마,딸과‘여성성’을 경쟁하는 엄마,온라인 게임의 신부는 여자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한 거야 마나토끼딸의 성 정체성을 받아들이고자 분투하는 엄마 등등 다양한 엄마들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생동한다.
제4회 고창신재효문학상 수상작인‘단역배우 김순효 씨’의 엄마도 평범한 엄마는 아니다.나이 칠십에 단역배우로 데뷔한 사실을 남의 마음을 겪어보는 데 칠십 년이 걸린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이고,그런 세월을 지난 탓에 이렇게 배우가 될 수 있었으니 늦은 데뷔가 아쉽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좋아‘자다가도 좋아서 웃어쌓는’사람이다.이런 통찰과 마음씨는 어디서 온 걸까.사랑을 많이 받고 살아왔나?
그러나 김순효씨의 인생은 굴곡 자체다.가족을 등한시하고 노름에 빠진 남편에,챙겨야 할 어린 시동생들도 줄줄이고,심지어 남편이 낯선 고장에서 다른 여자와 이중혼인을 해 애까지 낳고 산다는 소식까지 전해진다.이 세대 여성에게 이 정도 불행한 사연은 그리 새로운 소재나 서사로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그러나 이 소설의 미덕은 김순효씨의 굴곡진 과거 극복기에 있지 않다.김순효씨가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그리하여 김순효씨의 이야기는 어떻게 두 사람,아니 세 사람의 이야기로 변신하는가,이때 이야기 자체는 어떤 방식으로 부동산이나 동산 같은 효력을 지닌‘유산’이 되는가를 보여줄 때 이 소설의 성취는 눈부시다.
미국에 사는‘나’는 아이를 가지는 문제로 남편과 갈등을 빚고 홀로 한국에 와 방송작가로 일한다.어느 날 팔순의 엄마가 불쑥 전화를 걸어와 다짜고짜 어디를 가자고 한다.좀처럼 없는 일이기에 엄마를 따라나선 딸은 난생처음 고창이라는 곳에 도착한다.일정과 행선지에 오해가 빚어지는 바람에‘나’는 계획했던 촬영 대신 임시방편으로 엄마를 모델로‘단역배우 김순효 씨’라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시작한다.카메라가 꺼진 상태에선 “경주야” 하고 딸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던 엄마가 카메라만 켜지면 딸을 깍듯이 “작가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카메라와 마이크를 매개로 딸인‘나’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인데,단지 엄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출생의 비밀’과 엄마가 평생‘잊지 못할 사람’에 관해 처음으로 들려주는 사연이기 때문이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더 이상의 줄거리는 말할 수 없지만,그가 딸에게 물려준 것은 고창 산속의 맹지만이 아니라 그 땅이 품고 있는 깊숙한 이야기,그리고 이야기의 증거처럼 자리한 세 개의 고인돌까지다.김순효씨의 이야기가 고인돌을 경유해 결국 소설이 되어 우리에게 전달된 것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존재가 바로 이야기일 수도 있음을 김순효씨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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