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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유해 뿌려진 언덕에 산불 덮쳐

오두막 남았지만 할매들 집 22채 피해

포기하지 않는 새싹처럼 “하느님 제발…”

지난 3월25일 경북 의성에서 넘어온 산불이 안동시 일직면 조탑마을로 옮겨붙었다.고 권정생 작가의 생가 오두막(주황색 지붕)은 무사했으나 뒤편‘빌뱅이 언덕’은 불에 탔다.작가가 저녁마다 올라가 노을 보길 좋아했
지난 3월25일 경북 의성에서 넘어온 산불이 안동시 일직면 조탑마을로 옮겨붙었다.고 권정생 작가의 생가 오두막(주황색 지붕)은 무사했으나 뒤편‘빌뱅이 언덕’은 불에 탔다.작가가 저녁마다 올라가 노을 보길 좋아했던 언덕엔 2007년 그의 유해가 뿌려졌다.김진수 선임기자 바람은 여전히 세찼고 아직도 불 냄새가 났다.

봄을 쫓아온 산불이 겨울을 벗고 있던 언덕을 덮쳤다.언덕 숲에 의지해 살아가던 생명들도 불에 타거나 쫓겨났다.재가 된 나무들이 손끝에서 부서졌고,타고 남은 가지엔 새들도 앉지 않았다.

4월15일.불탄 언덕에서 불탄 마을이 내려다보였다.경북 의성에서 시작된 산불이 3월25일 안동으로 건너오며 시 전역으로 번졌다.바람에 올라탄 불덩이가 폭탄처럼 날아다니며 언덕과 마을에 떨어졌다.마을 초입에서 보수공사 중인 5층 전탑(1963년 보물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문화재)은 불을 면했으나 그 탑에서 이름을 얻은 조탑(造塔)마을은 60여가옥 중 22채가 전소 또는 반파됐다.언덕 쪽으로 올라가는 고샅길 집들은 새까만 잿더미였다.뜨거운 불길에 지붕이 녹아내렸고 벽들은 대포에 맞은 듯 무너졌다.타지 않고 남은 건 집의 기억뿐인 터를 보며 동화 작가 박기범은 부식되지 않는 먼 나라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참 이상했어요.마치 20여년 전 거기,이라크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누런 흙빛들도,무너진 형상도,냄새도,두려움도 얼마나 비슷하던지.그 이상한 착시,기시감,울렁거림….불이 지난 곳들은‘전쟁터와 다름없는’이 아닌,말 그대로 진짜 전쟁터였어요.”

‘문제아’(1999)‘어미개’(2003)와‘새끼개’(2003)‘미친개’(2008) 등을 쓴 박기범은 미국의 침공이 시작되던 2003년 이라크로 들어가 아이들 앞을 지키는‘인간 방패’가 됐다.서로를 파괴하는 세계에서 글쓰기의 무력감에 시달리던 그는 나무를 공부하는 목수가 됐다.숭례문 복원과 석가탑 보수 현장에서 일을 배운 뒤 지금은 문화재 보수 기술자(감리회사 대표)로 전국을 다니고 있다.그는‘문제아’를 출간한 20대 후반부터 언덕 아래 사는 작가를 만나러 왔다.그는 처음부터 작가를 “할아버지”라고 불렀고,작가는 36살 어린 그를 오랫동안 “선생님”이라고 불렀다.그가 “그냥 기범이라고 해주시면 안 돼요?” 부탁한 뒤에야 작가는 “그렇게 부르는 순간 상하관계가 돼 싫다”면서도 비로소 “기범아” 하고 불렀다.수많은 방문객들로 힘들어하며 “제발 오지 말라”고 부탁했던 작가도 유독 박기범이 오는 건 막지 않았다.강원도 삼척 목수학교에서 기숙하던 2007년 박기범은 건강이 악화된 할아버지를 매주 찾아와 안부를 물었다.“전화를 받고 삼척에서 도계,태백,봉화를 지나 안동의 빈소까지” 정신없이 차를 몰았던 그날(2007년 5월17일)처럼 지난 3월 말 마침 산불이 시작된 의성에서 문화재 현장을 살피고 있던 그는 가속 페달을 밟아 조탑마을로 달려왔다.마을을 지나간 불이 개천 너머 송리에서 아직 살아 있었다.할머니들을 도와 박기범도 불을 껐다.

조탑마을 입구에서 작가의 오두막으로 올라가는 고샅길 주변 집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불폭탄’에 맞아 폐허가 됐다.김진수 선임기자
조탑마을 입구에서 작가의 오두막으로 올라가는 고샅길 주변 집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불폭탄’에 맞아 폐허가 됐다.김진수 선임기자
“폭삭 무너진 집들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르고,허리가 꼬부라진 할매들이,정말 기역 자로 꼬부라진 할매들이 양동이로 물을 퍼다 잔불을 잡고 있었어요.하늘 위로는 헬기들이 부다다다 바쁘게 오가는데,이미 화마가 지나간 마을에는 더 이상 인력 지원이 되질 않는 건지,주불을 잡는 데 온 인력이 투입돼 잔불에는 더 손을 나눌 여력이 없는 건지,할매들 몇 분이 걷기도 힘들어 보이는 몸으로 불을 끄고 계셨거든요.그날도 바람이 많아서 큰바람이 닥치면 바로 다시 활활 살아날 것만 같았어요.”

그 불이 언덕을 태웠다.

“하늘이 좋아라 노을이 좋아라.해거름 잔솔밭 산허리에 기욱이네 송아지 울음소리.찔레 덩굴에 하얀 꽃도 떡갈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도.하늘이 좋아라 해 질 녘이면 더욱 좋아라.”

‘할아버지 작가’권정생이 저녁마다 올라가 노을 보길 즐겼던 언덕.좋은 노을을 보며 시(1986)를 짓고 제목으로까지 붙인 언덕.떡갈나무 숲에서 불어오던 순한 바람이 어느새 메마르고 난폭해져 18주기를 두 달도 안 남기고 그 언덕을 불살랐다.

빌배산 자락에 안겨‘빌뱅이 언덕’이었다.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빌배산이 나왔고 빌배산엔 작가 부모의 산소가 있었다‘별 보는 산’이라고도 했고,“원래 이름인‘비룡봉’을 편하게 부르다보니 빌배산이 됐을 거”라 짐작하는 주민도 있었다.날아오르는 용을 누르지 않도록 묘지에 석물도 쓰지 않는다는 산엔 전설이 있었다.산이 계속 자라 마을로 넘어오자 사람들이 근심했다.힘센 장수가 큰 돌을 어깨에 짊어지고 나타났다.장수가 돌로 산 앞을 막았고 기가 꺾인 산은 자라길 멈췄다.산이 멈춘 끄트머리가 빌뱅이 언덕이었다.장수가 놓은 돌을 권정생은 “고인돌”이라 불렀고,고인돌을 마당에 품고 지은 집이 그의 오두막이었다.돌에 앉아 마을 입구를 내다보다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언덕으로 올라가 숨는다”고 할아버지는 박기범에게 말하곤 했다.유언에 따라 유해 절반(나머지 절반은 부모 산소에)을 언덕에 뿌렸다.몇 해 전까지만 해도 “나무 사이에서 굵은소금처럼 눈에 띄었던”(박기범) 뼛가루가 바람이 걷어가서인지 불이 태워버려서인지 더는 보이지 않았다.언덕을 훑고 간 불이 오두막은 남겨뒀다.

누군가 급하게 사 온 호스(오른쪽 아래)로 물을 뿌려둔 덕분에 오두막은 산불을 견딜 수 있었다.김진수 선임기자
누군가 급하게 사 온 호스(오른쪽 아래)로 물을 뿌려둔 덕분에 오두막은 산불을 견딜 수 있었다.김진수 선임기자
“저 멀리서 보니까 불이 오두막을 지나서 송리 쪽으로 밀고 들어가길래 여기도 재가 된 줄 알았지.”

마을 주민 이태희(76)가 오두막 평상에 앉아 굽은 허리를 쉬며 말했다.

산불 직후 박기범이 도착했을 때 누군가 급하게 사 온 호스로 오두막에 물을 뿌리고 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덕분에 불을 견딘 산수유나무와 느티나무,앵두나무,슬롯 검증사이트 uiux두충나무가 한 뼘 마당에서 봄기운을 뿜었고,창호지 찢어진 방문 안에선 사진 속 작가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깥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1937년 일본 도쿄 변두리 헌옷장수집 셋방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권정생은 거리 청소부였던 아버지가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 고물상에 팔려고 쌓아둔 헌책들을 읽으며 글을 익혔다.해방 이듬해 부모를 따라 귀국했으나 지독하게 가난했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냈고 1947년 조탑리에 정착한 뒤에도 가난을 못 이긴 아버지의 부탁으로 집을 떠나 거리 생활을 해야 했다.학력의 전부인 초등학교 졸업 뒤 나무장수,고구마장수,담배장수,상점 점원 등으로 생계를 도왔고 19살 때 평생을 괴롭힐 결핵에 걸렸다.친구들이 같은 병으로 모두 세상을 떠난 뒤 혼자 살아남아 1968년부터 일직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지냈다.그 방에서 여름엔 장마철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개구리와 놀고 겨울엔 이불을 파고드는 생쥐에게 음식을 나눠주며 슬프지만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1986년 산문‘나의 동화 이야기’)는 동화들을 썼다.글을 써서 모은 돈으로 1983년 마을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오두막을 지었다.마을에서 가장 후미진 땅이었다.오두막 옆은 상여를 보관하는‘곳집’이었고 그곳에선 “귀신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소문”(2001년 산문‘자유로운 꼴찌’)이 돌았다.번지도 없던 시절 봉투에‘빌뱅이 언덕 오두막’이라 쓰면 집배원들이 알아서 편지를 전해주던 집에서 “3년 만이라도 살아준다면 지은 값은 하겠다고 생각”(2003년 산문‘백성들의 평화’)했으나 작고할 때까지 24년을 살았다.“규창이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를 보면 “거기 으슥한 데 혼자 어떻게 사냐”고 걱정(‘자유로운 꼴찌’)했지만 작가의 부탁을 받고 오두막 부지 매입을 돕고 마을 후배들을 지휘해 집을 지은 사람은 규창이 아버지 이태희였다.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작가를 “집사님”이라고 불렀다.

작가가 1968년부터 1983년까지 종지기를 하며 지냈던 일직교회.김진수 선임기자
작가가 1968년부터 1983년까지 종지기를 하며 지냈던 일직교회.김진수 선임기자
“중학생 때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집사님 문간방을 드나들었어요.둘이 책상다리를 하고 앉으면 무릎이 닿았어.언젠가 집사님이 부르시더니‘사람 안 다니는 데로,그래도 연탄배달은 되는 곳으로 집터를 알아봐 달라’고 하시는 거라.이 하천부지(오두막 옆으로 개천이 흘렀다) 땅 주인을 찾아서 집사님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흔쾌히 팔더라고.마을 경지 정리하면서 나온 흙을 경운기로 실어다 교회 마당에서 흙벽돌을 찍어 오두막을 지었어요.구들 놓으면서 연탄가스 새지 않도록 특히 신경 썼는데 집사님 사시면서 다행히 가스 고생은 안 하셨지.”

그 작고 궁벽한 오두막을 작가는 한껏 뽐냈다.“아저씨네 방 궁궐 같다”며 부러워하는‘생쥐 귀신’에게‘빌뱅이 아저씨’는 “시렁 밑 구석에 놓인 텔레비전”을 켜고 화면을 이리저리 돌려 “어질어질 정신이 나갈 지경”으로 만든 뒤 “옛날 임금님 궁궐에도 이런 건 없었을” 것이라며 자랑(1986년 동화‘30억의 잔치’)했다.“폭 3m에 너비가 5m인 오두막을 다시 2m와 3m짜리 두 칸으로”(이태희) 나눈‘궁궐 같은 방’앞에서 작가는 폐목재로 짠 평상에 앉아 세계를 내다봤다.베트남과 캄보디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눈물 흘리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 시체는 아랫마을 이태희군에게 맡겨 주십시오.”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언장에 작가는 이태희의 이름을 적었다.자신의 죽은 몸을 맡기고 유해를 언덕에 뿌려줄 사람으로 그를 지목했다.그는 작가가 마을에서 마음으로 가장 의지한 사람이었다.두 사람은 띠동갑이었다.오두막을 지을 때 권정생은 46살,이태희는 34살.권정생이 70살로 숨을 거뒀을 때 이태희는 58살.이제 “집사님”이 눈 감았을 때보다 “태희군”의 나이가 6살 더 많았다.부모 산소를 거쳐온 유해 절반을 그가 받아 빌뱅이 언덕에 뿌리고 절했다.

권정생은 2005년 5월과 2007년 3월 두 차례 유언장을 남겼다.삶이 다할 때까지 세상의 낮고 약한 생명들을 보듬은‘마지막 말들’은 널리 회자되며 깊은 울림을 줬다.공개되지 않은 세 번째 유언장이 있었다.수신자는 이태희였다.

“집사님 돌아가신 뒤 정호경 신부님(동화‘비나리 달이네 집’주인공으로 작가가‘죽음 뒤’를 부탁·2012년 선종)이 전화로‘좀 보자’고 하시데요.갔더니 집사님이 나한테 유언장을 남겼다는 거예요‘태희는 내 가족보다 더 나와 친하게 지낸 사이고 달밤에도 와서 집 짓는 일을 했다.내가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쓰셨는데,아,눈물이 나더라고.”

산불을 피한 오두막 앞 평상에서 마을 주민 이태희(76·왼쪽 셋째)씨가 작가의 마지막 말들을 떠올리고 있다.그는 청년 시절 작가의 부탁을 받고 마을 동생들과 오두막을 지었고 작가의 유언에 따라 빌뱅이 언덕에 그의
산불을 피한 오두막 앞 평상에서 마을 주민 이태희(76·왼쪽 셋째)씨가 작가의 마지막 말들을 떠올리고 있다.그는 청년 시절 작가의 부탁을 받고 마을 동생들과 오두막을 지었고 작가의 유언에 따라 빌뱅이 언덕에 그의 유해를 뿌렸다.김진수 선임기자
작가가 생전 기회 있을 때마다 이태희와 몇 사람에게 남긴‘구두 유언’도 있었다.

“돌아가시기 1년 전쯤 그러시는 거라‘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뒷산에 뿌리고 오두막 안에 있는 물건들은 불태워 없애라’고‘오두막은 헐어서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터도 집 짓기 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라’고요.”

작가는 박기범에게도 뜻을 알렸다.

“할아버지는 평소‘아무것도 기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제가 체 게바라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날이었는데‘훌륭하다는 사람들을 그렇게 상품으로 만들지 말라고,기리지도 기념하지도 말라고,나 죽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고,훌륭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어렵지 않냐고,오두막도 그저 흙과 바람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요.”

산불에 타죽으며 자식들을 살린 엄마가 있었다.

“깍깍 깍깍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꿩 병아리들은 삐삐 삐삐 삐삐 삐삐 엄마 엄마 부르면서 성냥개비 같은 작은 발로 종종종종 쫓아다녔습니다.하지만 바람은 점점 거세어지면서 불길이 자꾸자꾸 가까워졌습니다.”(2008년 동화‘엄마 까투리’)

불이 다가오자 엄마 까투리는 새끼 9마리를 자신의 두 날개로 보듬어 지킨 뒤 혼자 죽는다.이태희와 함께 오두막을 지었던 마을 청년(작가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는‘가난한 집사님’장례비를 걱정하며 장롱 속 통장을 꺼내 들고 빈소로 뛰어갔다) 중 한 명이 직접 보고 들려준 이야기를 작가가 동화로 지었다.아픈 자신 때문에 아파하다 눈 감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글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에게 모든 여리고 연약한 존재들은 새끼 까투리였다.“마을 할매들한테 집사님은 자식한테도 못할 말을 하소연하던 분”(이태희)이었다.“병 들어 자식들한테 피해 안 주고 죽으려고 농약을 따로 챙겨 둔 할매들이 집사님을 찾아와 그 답답한 속을 풀어놨”다.산불이 조탑마을을 쓸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박기범은 생각했다.

“마을로 차를 몰면서‘아,오두막이 가는가보다,할아버지 유언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나보다’했어요.할아버지도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오두막보다 당신의 이웃으로 살아온 할머니들,그 가난한 이웃들의 집이 불타 가슴 아파하셨을 거예요.”

의성에서 산불이 넘어오는 동안 불의 진로를 살피며 애태웠던 이태희도‘이제 오두막과 작별하는구나’했다.

“나는요,죄책감이 있어요.살아계실 때 집사님은 너무 가난해서 원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거든.그 집사님이 나를 믿고 유언을 하셨는데 가신 뒤에도 오두막을 뜻대로 못해 드린 게 죄스러워.그래도 집사님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생각하면 이 오두막이 살아남아서 다행이에요.이렇게 있어줘도 괜찮겠다 싶어요.”

오두막의 창호지 찢어진 방문 안에선 사진 속 작가가 말 없이 바깥세상을 응시하고 있다.김진수 선임기자
오두막의 창호지 찢어진 방문 안에선 사진 속 작가가 말 없이 바깥세상을 응시하고 있다.김진수 선임기자
빌뱅이 언덕 잿더미 곳곳엔 하얀 알갱이들이 흩어져 있었다.아직 남아 있는 작가의 뼛가루인가 했는데 눈을 낮춰 땅에 붙이면 알갱이들마다 흐린 동심원이 보였다.도망치지 못하고 불에 타죽은 콩알보다 작은 달팽이들이 손끝에서 바스러지며 바람에 쓸려 날아갔다.세상의 피해 집계엔 끼지도 못하는 생명들의 참화 사이로 연둣빛 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가시에 찔리면 스무날 아프다(‘스물’의 경상도 사투리인‘시무’로 주민들이 말놀이)는 시무나무가 “결이 곱고 야물게”(이태희) 커갈 날을 기다리며 웅크린 싹을 폈다.곁에선 새로 돋은 쑥들도 뾰족했다.1946년 일본에서 건너온 작가가 한국에서 처음 먹은 음식이 쑥으로 끓인 죽이었다.거대한 불이 지나간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새싹을 밀어 올리는 연하고 순한 것들의 언덕이 어쩌면 “착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없어진” 세상에서 그나마 “가난한 사람에게도 너그”로운 최후의 “우주”(‘자유로운 꼴찌’)인지도 모른다.

그 언덕에 올라 마지막 저녁노을을 보기 두 달 전 쓴 유언장에서 권정생은 기도를 부탁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달라고요.”

기도엔 아직 응답이 없는데 언제 이뤄질지 알 수 없는 그의 기도는 40년을 훌쩍 넘겨 계속되고 있다.권정생은 빌뱅이 언덕 아래로 이사 온 그해‘처음으로 하느님께 올리는 편지’(발표는 1986년)를 써서 하늘로 부쳤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십니까?”

편지에서 그는 따졌다.이것이 진정 하느님이 원하시는 세상이냐고,나쁜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계시면 되겠냐고,집을 잃은 사람,가족을 잃은 사람,슬픈 일은 한이 없는데 심장이 얼마나 강하기에 아무렇지 않게 보고만 계시냐고,그새 돈쟁이 하느님,권력쟁이 하느님,폭력 하느님이 돼버리신 거냐고,하느님마저 힘센 사람들에게 빼앗긴 이들이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게 안 보이시냐고,제발 정신 차리시라며 하느님을 다그쳤다.부디 힘내주실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이 빌배산 밑 외딴집에 홀로 살고 있는 저도 즐겁게 아름다운 애기를 쓸 수 있게 해주십시오.여태까지 써 온 슬픈 이야기가 아닌 즐거운 얘기를 쓸 수 있게 해주십시오.오늘 밤부터 별을 쳐다보며 기다리겠습니다.”

이문영 기자

빌뱅이 언덕에서 세상의 피해 집계엔 끼지도 못하는 생명들의 참화 사이로 연둣빛 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김진수 선임기자
빌뱅이 언덕에서 세상의 피해 집계엔 끼지도 못하는 생명들의 참화 사이로 연둣빛 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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