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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와 고고학자가 다시 쓰는 인류사
기존 이론과 통념 뒤집은‘모든 것의 새벽’
‘농경→잉여→계급→국가’사회진화론 폐기
신자유주의 넘어설 새로운 사회 상상력
인류학은 인간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한다.연구 대상과 범위가 사회학·역사학·정치학 같은 인문사회과학은 물론,고고학·지리학·진화생물학까지 넘나든다.크게는 생물로서의 인류를 연구하는‘형질 인류학’과 인류가 형성하는 문화와 사회 구조를 연구하는‘문화 인류학’으로 대별된다.인간에 한정한‘빅 히스토리’라 할 만하다.
미국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와 영국 고고학자 데이비드 웬그로가 함께 쓴‘모든 것의 새벽’은 인간에 대한 지금까지의 학계 통설을 부인하고‘다시 쓰는 인류 역사’(책의 부제)를 제안한다.지난 30여년간의 인류학과 고고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인류 문명 전반에 걸친 기존 신화와 통념을 전복하고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 대한 전혀 다른 독해를 펼친다.최소한 한 세기 이상에 걸쳐 확립되고 인용된 사회과학 이론과 최근 몇십년 새 각광받는 빅 히스토리 계열의 인류사를 뿌리부터 뒤엎는 주장이 참신함을 넘어 도발적이고 혁명적이다.
책이 나온 계기와 과정도 독특하다.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사회·경제적 불평등’이 학계의 첨예한 화두로 떠올랐다.두 지은이도 불평등의 기원과 해결책을 주제로 가볍게 대화를 나누던 게 인류사 전체로 확대됐다.10년에 걸쳐 방대한 주제를 넘나든 지적 탐험이 900쪽(번역본 기준)이 넘는 책으로 열매를 맺었다.그러나 책(원저)의 출간을 한 해 앞둔 2020년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59살로 세상을 떠나면서,두 학자의 우정 어린 협업이 그레이버에겐 유작이 됐다.그레이버는 2011년 미국의 신자유주의 폭주에 저항한‘월가를 점령하라’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지은이들은 불평등의 기원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영장류와 인간의 진화 역사상 어떤 무리(집단)도 평등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지 않았고 항상‘우두머리 수컷’지도자는 있었기 때문이다.따라서‘불평등의 기원’을 묻는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우리는 어쩌다 폭력과 지배를 기초로 하는 하나의 사회적 형태에 전 지구적으로 고착되어 버렸는가?”
오늘날 불평등 담론의 대부분은 장자크 루소의‘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년)의 변주들이다.과거 인류는 수렵·채집인으로 소규모 무리를 지어 평등하게 살았는데,신석기 시대인 약 1만2000년 전께 농업혁명으로 도시와 문명이 생겼으며,잉여 생산물은 사유재산과 계급의 분화를 낳았고,가부장제와 관료제와 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졌다는 게 뼈대다.엥겔스의‘가족,사유재산,국가의 기원’(1884년)도 거의 같은 맥락이다.앞서 1651년 토머스 홉스는‘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은 본디‘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표현되는‘자연상태’에 있다며,절대적 지배권력인 국가의 불가피성과 그 폭력성을 통제하기 위한‘사회계약’을 주창했다.
지은이들은 이런 선형적 사회진화론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게 아니라 17~18세기 유럽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목적론적 사고방식이라고 비판한다.그러나 현대 학자들도 이젠 거의‘신화’가 돼버린 도식적 설명에서 자유롭지 않다.유발 하라리는 2011년 저작‘사피엔스’(번역본은 2015년,김영사)에서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가‘인지혁명→ 농업혁명→ 산업혁명→ 과학학명’의 발전 단계를 거쳐왔다고 말한다‘총 균 쇠’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인간에게 유의미한 사회적 평등은 원초적인 소규모 무리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단언했다.진화심리학자 로빈 던바는 인간 집단이 대략 150명(던바의 수)보다 규모가 커지면 혈족의 연대감이 사라지고 갈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인류사에‘농업혁명’도 없었다.혁명은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과 변화를 뜻하는데,중동의‘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농경으로의 이행은 최소 3000년에 걸쳐 이뤄졌다.오늘날 남미의 한 부족을 비롯해 세계 여러 곳에선 전업농이 아닌‘취미 농사’가 수렵 채집과 오래 공존했다.농경이 반드시 인구 증가 및 계급 분화와 직결되거나,반대로 수렵채집 사회가 꼭 소규모 평등사회인 것도 아니었다.오늘날 튀르키예 중부 평원에 기원전 7400년께 정착한 차탈회위크 사람들은 한때 5천명 인구가 농작을 하고 가축도 기른 소도시를 이뤘지만 중앙 권력은커녕 공동체 시설이나 도로도 없었다.반면,북미의 칼루사족은 농경·목축과는 거리가 먼 수렵·채집·약탈 경제였지만 유럽의 왕에 비견할 절대 권력자와 조직된 전투 집단이 있었다.
지은이들은 국가의 형성에도 전형적 기원은 없다고 말한다.최초로‘국가’를 체계적으로 정의한 사람은 19세기 독일 법철학자 루돌프 폰 예링이었다.그는 “국가란 주어진 영토 안에서 강제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독점권을 주장하는 기관”이라고 했다.이런 정의는 현대 국가에는 잘 들어맞지만,고대 바빌론이나 그리스 도시국가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더 유연한 설명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나왔다.국가의 출현은 신흥 지배계급의 재산권 등 사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정의도 “국가가 자애로운 기관이 될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는 한계를 보였다.20세기 들어 사회과학자들은 사회적 복잡성이 커지면서 만사를 조정할 통치 기구의 등장이 필연적이었다는 논리를 편다.여기서 지은이들은 다시 질문을 던진다.“국가 없이도 군주제,귀족제,노예제,가부장적 지배 형태가 있을 수 있고 복잡한 관개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답한다.“분명히 그랬다.”
17~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는 근대 민주주의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했고,룰렛 시간19세기 프랑스 혁명은 자유·평등·박애를 외쳤다.그러나 아메리카 신대륙과 조우한 유럽인들은 미개한 야만인으로 여겼던 그 땅의 선주민들이 문명사회의 자신들보다 앞서 민주주의와 자유,평등의 이념을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다.오늘날 멕시코시티 인근에서 기원전 100년께부터 약 700년간 존속한 테오티후아칸은 해와 달의 피라미드를 짓고 인구가 10만명(보수적 추정치)에 이를 만큼의 대도시였지만,그만한 규모의 사회에 당연히 있을 법한 왕의 흔적과 신전,경기장,복잡한 달력 관련 제의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대신 풍부한 그림과 공예품을 남겼는데,어디에도 지배-피지배 관계를 묘사한 것은 없다.
18세기 초 프랑스인 라옹탕이 캐나다의 웬다트 부족연합에서 발견한 핵심적 차이 중 하나는 “그들 사회에는 부를 타인에 대한 권력으로 전환할 명백한 방법이 없는 반면(부의 차이가 개인의 자유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함),프랑스에서는 소유에 대한 권력이 곧바로 인간 존재에 대한 권력으로 바뀔 수 있었다”는 점이다.
지은이들은 “우리의 먼 선조들에게서 당연한 전제”였던 근본적 자유 세 가지에 주목한다.자신이 먼 땅에서도 환영받을 것을 알기에 언제든 소속 공동체를 떠날 수 있는‘이동’의 자유,타인의 명령을 무시하거나 불복할 자유,완전히 새로운 사회관계를 형성하거나 선택할 자유다‘자유’야말로 지은이들의 진정한 관심사이자 책을 관통하는 핵심 열쇳말이다.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진짜 수수께끼는 족장이나 왕(여왕)이 처음 등장한 게 언제인가가 아니라,그들을 웃음의 대상으로 치부하여 궁정에서 몰아낼 수 있는 것이 언제부터 불가능해졌는가”이다.옮긴이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잃은 것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평등이 아니라,그 가능성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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