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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본 세계사] 로마의 종말로 무너진 시장경제,이슬람교도가 살려
● 중세는 이슬람 통해 하나로 연결된 시대
● 1000년 이상 유라시아 핵심 교역로 구실한 실크로드
● 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다른 손에 칼 든 무장 세력
● 아바스왕조,군사 팽창주의 대신 상업 발전 지향
● 인도양 항로 개발‘이슬람 대항해 시대’개막
● 인도 숫자‘아라비아’도 이슬람 통해 세계로 전파
로마는 중동의 파르티아 제국을 통해 중국의 한나라와 교역했다.초원길인 실크로드를 통해서였다.여기에는 소그드(Sogd)인의 역할이 컸다.소그드인은 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사마르칸트 일대)를 근거지로 한 이란계 스키타이 유목민으로,유라시아를 횡단하며 실크로드 교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중국에서 건너온 대표적 상품은 비단이었고,중국으로 건너간 상품은 황금·포도주·유리 제품 등이었다.실크로드,즉 비단길은 이때부터 1000년 이상 유라시아의 가장 중요한 핵심 교역로가 됐다.
중세 유럽을 흔히 암흑의 시대라고 말한다.적어도 경제·문화적 측면에서는 그랬다.신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시대였다.게르만족의 남하,이슬람 세력과 마자르족 등 외세의 침략으로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에도 버거웠다.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스스로 농노가 돼 영주 밑으로 들어가 영주의 토지를 경작하는 봉건제와 장원(莊園) 경제가 성행했다.중세 전반기,즉 십자군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유럽에서 시장경제는 크게 위축돼 있었다.
하지만 위 이야기는 유럽에 국한된다.유럽의 동쪽,중동 상황은 전혀 달랐다.중세에 세계사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 중동이었다.7세기 초에 발원한 이슬람교도들은 100년 남짓 되는 기간에 중동·북아프리카·이베리아반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인도와 중국까지 아우르는 이슬람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겼다는 것은 이미 유럽보다 중동의 비중이 커졌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중세에는 이슬람 세계를 통해 세상이 하나로 연결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유럽이 잠시 십자군전쟁을 통해 서아시아를 차지하기는 했지만,중세 내내 이슬람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이슬람 제국이 구축한 상업 네트워크 속에 편입돼 있었다.쉽게 말해 지중해는 이슬람 상업 네트워크의 한 귀퉁이에 불과했다.
중세 중동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고대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가 시작될 무렵,중동에는 이란인이 세운 사산왕조 페르시아(224~651)가 파르티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패권을 잡았다.사산왕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와는 달리 무역보다 전쟁에 치중했다.로마는 그동안 실크로드를 통해 안정적으로 비단을 확보했지만,사산왕조가 건국되면서 비단 수입은 불안정해지고 가격도 폭등했다.사산왕조가 비단 유통을 직접 관리하고 전시에는 로마와의 교역을 차단했기 때문이다.고대 로마가 망하고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이러한 적대행위는 계속됐다.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는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피해 중앙아시아 소그드인과 직거래 루트를 개발했다.
사산왕조의 적대적 정책으로 인해 유럽과 아시아를 이어주는 육상 교역로가 좁아지자,이를 대신해 유럽에서 아시아로 통하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아라비아반도 서해안인 홍해 연안 지역인 히자즈를 거쳐 인도양에 이르는 해상 교역로였다.히자즈의 중심 도시인 메카는 이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이때 세계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난다.이슬람교의 창시다.이란이 주도권을 잡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아랍인들이 성장해 이슬람 제국을 세우게 된 배경에는 바로 해상무역으로 인한 부의 축적이 있었다.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번영은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했고,이는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이슬람을 창시하는 배경이 됐다.
이렇게 610년 메카의 상인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된 이슬람교는 급속도로 세를 확장했다.622년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 세력이 박해를 피해 메디나로 이동하지만 세력을 키워 630년에 다시 메카를 점령하고 정권을 장악한다.이슬람교는 한 손에 코란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든 무장 세력이었다.무함마드가 죽은 뒤 한동안 정통 칼리프 시대(632~661)가 이어졌다.642년 이슬람 군대는 니하완드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대파했고,651년에는 사산왕조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다.
정통 칼리프 시대를 이은 우마이야왕조(661~750)는 군사 패권 국가였다.무함마드의 먼 친족인 무아위야가 칼리프로부터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는 전권을 위임받은 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새 왕조를 세운 것이다.우마이야왕조의 가장 큰 공적은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반도를 이슬람 세계에 편입한 것이다.계속된 공격에도 동로마 제국이 무너지지 않자 서유럽 쪽에서 공격하고자 원정에 나섰는데,뜻밖의 결과를 얻은 것이다.기독교인 전유물이던 지중해에 이슬람 세력이 진출함으로써 지중해는 이후 가톨릭,이슬람,동방정교회 등 다양한 이문화(異文化)가 교류하는 바다로 변모했다.두 번째 공적은 화폐를 통일해 제국의 통치 기반을 세운 것이다.5대 칼리프,압둘 말리크가 정복 전쟁으로 얻은 금은을 이용해 디나르 금화,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디르함 은화,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폴리스 동화로 화폐제도를 정비했다.금·은본위제를 도입한 것이다.이로써 알라의 이름을 새긴 유라시아 광역 화폐가 출현했다.주화에는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라는 코란의 문구가 새겨졌다.
우마이야왕조는 100년을 넘기지 못한 채 무너지고,아바스왕조(750~1258)가 뒤를 이었다.처음에는 쿠파에 수도를 두었으나 아바스왕조 2대 칼리프 만수르는 옛 바빌로니아 수도 바빌론 인근에 바그다드를 건설해 수도로 삼았다.10만 명을 동원해 5년간 완성한 도시였다.아바스왕조는 군사 팽창주의를 버리고,상업을 통한 제국의 발전을 지향했다.우마이야왕조가 아랍인의 이슬람왕조였다면,아바스왕조는 이슬람교도들의 왕조였다‘아바스 혁명’을 통해 이슬람교는 민족을 뛰어넘는 세계 종교로 거듭났고,이슬람에 황금시대를 가져왔다.
아바스왕조는 인도양 항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이 시대에는 육로보다 바닷길이 더 성행했다.인도양은 이슬람의 바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지중해·서아시아 중심의 경제에서 인도양·유라시아 중심의 대규모 경제로 바뀐 것이다.이슬람 상인의 활약으로 인도양을 중심으로 동아프리카에서 인도,동남아시아,중국 남부에 이르는 해역을 연결하는‘이슬람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됐다.이슬람 상인들이 삼각돛을 한‘다우(dhow) 선박’을 이용해 상품을 대량으로 실어 날랐다.중동-인도-중국을 잇는 이슬람 상업 네트워크가 형성된 것이다.아바스왕조는 상업을 촉진하기 위해 시장세를 징수하지 않았다.동양의 비단,도자기,향신료,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의 벌꿀,호박,모피,노예가 주요 교역 상품이었다.
아바스왕조 시대 이슬람은 경제,문화 모든 영역에서 유럽을 압도했다.바그다드는 200년 동안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상징이자 교역의 중심지였다‘신드바드의 모험’등을 담은‘아라비안 나이트’는 이 시대에 아랍어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인도의 바람’이란 뜻의 신드바드는 바로 바그다드 출신 상인이었다.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번성한 것도 바그다드와의 연결성 때문이었다.바그다드는 이른바 세계의 십자로라 불리며 수많은 상인과 물자가 모여들었다.아바스의 번성기에는 큰 전쟁도 없었다.11세기 셀주크튀르크가 술탄이 돼 다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기 전까지 세계는 대체로 경제 번영을 중시한 평화의 시대였다.
아바스왕조 시대는 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676~935)에 해당한다.신라는 통일 후 당나라,놈놈놈 토토 리뷰일본,이슬람(아라비아)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다.이슬람 상인들은 울산항으로 들어와 보석,향료,모직물,유리그릇 등을 팔았다.이렇게 통일신라가 이슬람 상인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해상왕 장보고의 역할이 컸다.당나라에서 활동했던 장보고(?~846)는 귀국 후 청해진을 설치해 무역 활동을 주도했다.삼국유사에 나오는 헌강왕(?~886) 때의‘처용’이 신라를 왕래하던 아라비아 상인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으로 보면,당시 많은 아라비아 상인이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아바스 시대의 쇠락을 불러온 것은 페르시아계 부와이왕조였다.945년 바그다드를 점령해 실권을 잡은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부활에 집착한 나머지 이슬람 세계의 통합에 실패했다.이베리아의 우마이야왕조와 이집트의 파티마왕조가 정통성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이슬람 세계에 3명의 칼리프가 병존한다.부와이왕조는 셀주크튀르크(1040~1157)가 바그다드를 차지하면서 무너졌다.시아파인 부와이왕조를 싫어한 아바스 칼리프(종교 지도자)가 셀주크 군대를 끌어들여 정권을 바꾼 것이었다.이슬람 세계의 술탄(정치 지도자)이 된 투으룰은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원정을 시작하면서 중동과 유럽의 평화가 깨졌고,결국 십자군전쟁이 발발한다.셀주크 제국은 오래가지 않아 반란과 내란으로 자멸한다.그 후 살라딘이 아이유브 왕조를 세우고 이슬람 제국을 부흥시키지만 살라딘이 죽은 후 이슬람 제국은 서서히 쇠퇴했고,결국 1258년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한다.
몽골 제국은 13~14세기 유라시아 전역에 걸친 광활한 지역을 통치했다.몽골의 통치 아래 100년 이상 평화가 유지되고 경제가 번성하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시대가 열렸다.몽골 제국이 중화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상업 네트워크를 통합하면서,대륙의 초원길(비단길)과 인도양의 바닷길이 하나로 연결됐다.몽골 제국의 황제들은 중개무역의 이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상업을 보호했다.통상로의 안전을 보장하고 상권의 정비와 치안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유라시아 전체에 역참제가 도입됐다.칸발리크(大都,오늘날 베이징)를 중심으로 주요 도로에 10리마다 참(站)을 두어 필요한 물자와 말을 제공하도록 했고,주요 도시 통과 때 내는 통행세도 폐지하면서 제국의 교통과 물류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구축됐다.
몽골 제국은 많은 민족을 포괄하는 개방적인 제국이었다.원나라의 제2계급이 서방에서 온 사람들을 지칭하는 색목인(色目人)이었다는 사실은 몽골 제국의 개방성을 여실히 보여준다.제5대 칸이 된 쿠빌라이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유통 기구를 구축했는데,그 주축이‘오르톡(Ortogh)’이라 불린 이슬람 상인 조직이었다.몽골 제국의 상업과 경제를 이슬람 세력이 뒷받침한 셈이다.

교초를 본받아 서아시아의 일칸국도 지폐 발행을 시도했다.하지만 상인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중동 지역에서 시장(상인) 세력의 영향력이 강했음을 말해 주는 사건이다.원나라는 세입을 은으로 거두었고,윈난(雲南) 지방에서는 대규모로 은광을 개발했다.중국에서는 지폐를 화폐로 사용했기 때문에 은은 이슬람 세계로 흘러갔다.이슬람 세계의 무역과 경제 규모가 급속히 확대되면서 중세 내내 은의 부족 현상은 계속됐지만 다행히 어음의 융통과 원나라에서 넘어온 은 덕분에 경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이제 중세 유럽의 시장경제 질서에 대해 알아보자.중세 후반에 들어서자 유럽의 교역망이 다시 살아나고 이슬람의 글로벌 상업 네트워크와 연결됐다.지중해의 레반트 무역 네트워크와 북유럽 한자동맹 네트워크가 그것이다.유럽인의 지중해와 발트해 교역망은 전 세계로 연결된 이슬람의 상업 네트워크 교역망의 일부에 불과했다.
유럽에 처음 생긴 교역망은 바이킹이 개척한 것이었다.바이킹은 지금의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있는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덴마크 지방에 살던 북방 게르만족인 노르만인(Nord,북방의 사람)이다.앞에 용머리가 있는 바이킹의 배‘랑스킵’(Langskip,영어로 Longship)은 바이킹의 상징과도 같다.몽골 제국이 전쟁으로 확장된 영토를 통해 교역을 확대했듯 바이킹도 약탈과 동시에 교역을 통해 세력을 넓혀나갔다.
이슬람에서 아바스왕조가 급성장할 때 바이킹은 북유럽과 이슬람의 중간상인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바이킹은‘덴마크 바이킹’과‘스웨덴 바이킹’으로 나뉘는데,덴마크 바이킹은 북해에서 대서양 쪽으로 향했고,스웨덴 바이킹은 강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다.바이킹은 조선(造船)과 항해 기술을 보유했기 때문에 유럽 북부 해상권을 주도했다.해운 비즈니스를 독점한 바이킹은 해안의 항만도시를 정비했고,유럽 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이슬람 세력과 교역을 한 것은 스웨덴 바이킹이었다.발트해에서 흑해,카스피해와 동방을 오가며 모피와 노예를 실어 날랐고,근동이나 중앙아시아의 향신료,비단,은화 등을 북해와 발트해 시장에 팔았다.바이킹은 이슬람의 상업 네트워크 연계 속에서 성장했다.12세기 해상으로 예루살렘을 향하는 십자군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로마 교황은 바이킹을 지중해로 불러 이탈리아 남부에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게 했다.지중해 진출을 노리던 바이킹에게 절호의 기회였다.바이킹의 해양 기술은 베네치아,제네바 등 이탈리아 도시에 전해졌고,이는 북부 이탈리아가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렇듯 바이킹은 10세기 무렵부터 남하해 남쪽의 서유럽 국가들과 섞였다.영국을 침략해 앵글로색슨족과 함께 영국의 주류가 됐고,프랑스를 침략해 프랑스 공신인 노르망디공이 됐다.그렇게 프랑스의 왕실과도 섞였다.이탈리아 쪽으로 남하해 시칠리아왕국을 세웠고 동쪽으로 가서는 슬라브족과 함께 러시아의 지도층을 형성했다.힘세고 덩치가 큰 북방의 바이킹은 이렇게 유럽 각지로 퍼져 그들과 동화됐다.

이러한 북유럽의 교역망에도 불구하고 중세 유럽 교역망의 핵심은 지중해의 레반트 무역 네트워크였다.레반트 지역은 지리적으로는 그리스와 이집트 사이의 동지중해 연안 지역을 말하지만‘레반트 무역’에서의 레반트는 이탈리아 상업권을 말하는 것으로 지금의 그리스,튀르키예,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를 포괄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상인의 활동에 돛을 달아준 사건이 십자군전쟁이었다.십자군전쟁 전에도 이탈리아 상인들의 활동이 있었지만,십자군전쟁을 계기로 이들은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다.유럽인들이 예루살렘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서유럽과 중간 지점에 거점도시가 필요했는데,베네치아·피렌체·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이 그 물류 기지 역할을 했다.십자군전쟁 당시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십자군들에게 선박 운송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성장했다.이들의 배는 갤리(galley)선이었다.배의 양쪽에서 선원들이 노를 젓고,바람이 불 때는 돛을 이용하는 노와 돛을 같이 활용하는 배를 말한다.페니키아,그리스,로마 시대부터 사용한 배의 형태다.
그러나 이탈리아 도시들을 강력한 국가로 만들어준 것은 레반트 무역이었다.이탈리아 상인은 지중해 내부의 중간상인으로 이슬람 상인의 거대한 상업 네트워크에 편입돼 움직였다.레반트 무역을 하면서 이탈리아에 환전상들이 생겼다.은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 뱅크(bank)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방코(banco)로 환전상의 가판대를 이르는 말이었다.이탈리아 상인은 십자군을 파견하는 왕과 제후를 고객으로 삼아 돈을 빌려줬는데,은 거래에서 선대 이자로 이익을 챙기는 롬바르드 상인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14세기 롬바르드 상인 중 일부는 영국으로 이주해 은행가로 변신했다.런던의 금융 중심지 시티 오브 런던의 롬바드가(Lombard Street)는 그렇게 해서 생겼다.13세기에 들어서 유럽의 각 도시에 시장이 생기자 이탈리아 상인(특히 제노바 상인)은 이슬람 상인의 환어음 기술을 도용해 어음으로 결제하기 시작했고,이러한 신용결제 방식은 이제 유럽에서도 통용됐다.

이슬람 상인으로부터 이탈리아로 전해진 것은 환어음 기술만이 아니었다.아라비아 숫자와 복식부기도 이슬람 세계로부터 전파됐다.아라비아 숫자는 원래 힌두교 신자가 사용하던 인도 숫자가 7~8세기에 이슬람 세계로 넘어와서 아라비아 숫자가 되어 이탈리아로 전파됐다.이슬람 세계를 매개로 인도의 숫자가 전 세계인의 숫자로 거듭난 것이다.복식부기도 마찬가지다.이슬람 세계에서 쓰이던 부기는 1340년 제노바에서 복식부기로 자리를 잡았다.자산,이익 등의 개념도 이때 등장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경제성장과 부의 축적,그리고 이슬람 세계와의 교류와 소통이 14세기 르네상스 운동의 원동력이 됐다.르네상스는 유럽 문명사에서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문예부흥 운동으로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사상,예술을 본받아 중세의 신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 한 것을 말한다.이슬람 황금시대에 바그다드와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그리스 고전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졌고,이것이 유럽에 전파된 것이다.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시작해 점차 서유럽으로 퍼져갔다.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기나긴 유럽의 중세 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이슬람 세계의 변방에 불과하던 유럽에 거대한 변혁의 바람이 불었다.세계의 중심이 동방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는 근세(近世)가 도래하고 있었다.

● 1965년 출생
● 서울대 경제학과,美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 행정고시 제35회
● 前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
● 前 한국은행 감사
● 現 서울과기대 대외국제부총장
● 저서 :‘역사는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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