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마지막 도박 - 2025년 실시간 업데이트
[차 권하는 의사 유영현의 1+1 이야기] 27.티벳‘수유차’와‘사부의전’
고려 26대 충선왕은 티벳에서 3년가량 유배 생활을 한다.그는 고려 충렬왕과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태어났다.충렬왕이 쿠빌라이의 사위가 된 사연은 충렬왕의 아버지인 고려 24대 왕 원종의 제안 때문이었다.원종은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면 고려 국가의 위상도 보호받고 고려 왕실도 원 황실에 의해 보호받겠다고 판단하였다.
이 정치 지정학적 판단은 사뭇 옳았다.원 황실이 변함없이 고려에 우호적이지는 않았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들과는 달리 유리한 조건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다.
충선왕은 중국 땅 심양에 거주하면서
고려를 교지로 다스렸다는 점 때문에 당대와 후대에 걸쳐 비판을 받았다.그러나 그의 전지정치는 다른 의미가 있다.충선왕은 원의 권력 투쟁기 때 중요한 역할을 하여 5촌 조카들인 3대 무종과 4대 인종의 즉위에 공을 세웠다.
그는 무종과 인종이 재위하는 동안 큰 권력을 누린다.심양왕과 고려왕을 겸하였고 후에 심왕(瀋王)으로 승격된다.충선왕이 심양과 고려를 동시에 다스리는 위상으로 고려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충선왕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학문에 정진한다.원나라와 고려의 학자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교류하였다.
1320년 원나라 인종이 사망하며 충선왕은 위기에 처한다.원 황실은 무종 아들 지지파와 인종 아들 지지파로 갈라진다.충선왕은 무종 아들을 지지하였지만,권력투쟁의 승자는 인종 아들이었다.충선왕은 인종 아들 지지파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리고 티벳 유배 명령이 떨어진다.불경 공부를 명분으로 내린 유배 명령이었다.토번(티벳국의 옛 이름) 살사결이 유배지였다.북경에서 1만 5천 리 떨어진 곳이었다.그리고 약 3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북경으로 돌아와 2년 만에 사망한다.
그의 장엄한 일생 중 티벳에서의 유배 생활에만 현미경을 대고 쳐다보면 흥미로운 1+1 이야기가 나온다.우선 충선왕은 티벳에서 어떤 차를 마셨을까?티벳의 차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충선왕이 티벳에 머무는 동안 강전으로 만든 수유차 (酥油茶,수여우차)를 마셨겠다고 추측할 수 있다.
티벳인들이 음용하는 차를 수유차(酥油茶,수여우차)라 부른다
이는 차종을 의미하지 않고 차를 마시는 방식을 의미한다.차를 삶아 차즙을 내고 치즈를 섞은 뒤 끓는 물과 소금을 첨가한다.이를 기다란 차통에 옮겨 닮고 다시 야크 버터나 치즈를 넣고 차통 속에서 피스톤처럼 움직이는 막대기를 이용하여 위아래로 수십 번 저어서 섞어준다.다시 찻주전자로 옮겨 뜨겁게 가열한 다음 각자의 찻그릇에 담아 마신다.버터와 치즈 향 그리고 차가 어울려 진한 향을 낸다.
버터는 수유차의 핵심 성분으로 수유차는 흔히 "버터차"로 불린다.수유차는 고산지대 티벳인에게는 기호 음료라기 보다는 영양음료에 해당한다.고산지대에서 생존하기 위한 고지방과 고단백을 수유차로 공급받는다.
수유차는 높은 열량을 공급해 줄 뿐만 아니라 찻잎이 가지고 있는 알칼로이드,비타민과 미네랄 등 미량의 원소를 티벳인에게 공급해 준다.그러니 티벳인들은 수유차 없이는 하루도 못산다고 흔히 말한다.티벳인들이 하루에 평균 30~40잔을 마신다고도 한다.
수유차에 들어가는 차종의 대표는 강전이다.이 차는 쓰촨성 감자현 강정 지역에서 생산되는 전차이기 때문에 강전이라 불리게 되었다.쓰촨성에서 티벳인들을 위하여 생산되어 티벳어로 포장되는 강전은 티벳 장족들이 마신다 하여 장차(藏茶)라고도 불린다.
다른 흑차 벽돌차에 비하여 모서리가 잘 다듬어지지 않고 무성의하게 제작되며 큰 잎과 줄기가 사용된 저렴한 차가 대부분이다.티벳인들이 수유차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차가 강전이다.
티벳인들이 수유차에 사용하는 차는 강전 만은 아니다.미생물을 이용하여 발효한 차를 총칭하여 흑차라 부른다.티벳인들은 다양한 흑차들을 수유차로 만들어 마신다.윈난성 보이차,후베이성 청전차,호남성 복전차 등이 사용된다.강전 역시 미생물 발효차로 흑차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충선왕은 티벳의 유배지에서 강전과 같은 흑차로 만든 수유차를 들었다고 추측하면 맞을까?이런 추측은 아마 틀렸을 것이다.
필자가 차에 대한 일차 사료 모두를 훑을 처지가 아니고 민간에서 벌어진 차 제작에 대하여 사료들이 정확히 서술하였다고도 볼 수 없지만,신규슬롯사이트 fifa22흑차는 대개 명나라 시대가 되어서 제작되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충선왕 시대 때에는 흑차가 본격 제작되기 전이었다.
원나라 시대 대부분 차는 녹차였다.당송 시대에 이미 티벳에서는 차가 성행하였다.심지어 차와 말을 바꾸던 무역에서 당시의 티베트 제국이 경제적으로 피폐하게 되었다 해석할 정도로 차는 티벳의 필수품이었다.
그 시절의 티벳 차는 녹차를 의미한다
기록에 의하면 티베트 제국에서는 절강(浙江),호광(湖廣),카지노 전대협안휘(安徽)의 녹차들을 마셨다.충선왕은 그가 고려와 원나라에 머물 때 마셨던 녹차를 티벳 유배 중에서 마셨을 가능성이 높다.
흑차가 명대에 시작되었지만,수유차의 역사는 이보다 오래되었다.12세기쯤부터 티벳에서는 수유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나온다.그렇다면 충선왕은 티벳에서 녹차로 만든 수유차를 마셨을 가능성은 높다.
사실 고려시대와 원나라 시대 때의 녹차는 떡차 형태로 뭉쳐 만든 녹차로 조금씩 떼어내어 끓여 마셨다.충선왕 시대 때 티벳의 차가 녹차로 끓인 수유차라는 필자의 상상이 틀렸다면 지적을 달게 받겠다.네 추측이 맞다면 충선왕은 아주 진하고 고소하며 조금은 비린 밀크티 비슷한 수유차로 이국에서의 서러움을 달랬을 것이다.
충선왕이 티벳 유배 중 어떤 의학 체계의 혜택을 받았을까?8세기경 체계화된 티벳 의학은 현재까지도 주민의 보건의료를 담당하는 당당한 의학 체계이다.당송의학에 뿌리를 둔 고려와 원나라의 의학 체계와는 구별된다.이웃의학과 접촉이 없지 않았으나 고산지대에 분리되어 고유한 의학 체계를 유지한 덕에 유럽에서 중의학,아유르베다와 함께 3대 동양의학의 하나로 인정한다.
티벳 의학은 종교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하여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다는 기본 개념을 가지고 발전하였다.중의학 황제내경이나 한의학 동의보감 위치를 차지하는 의서는 사부의전(四部醫典)이다.
사부의전,그리고 티벳 의학
티벳 의학에서는 Lung(바람),업 카지노 먹튀 디시Tripa(짜증,담즙),Peken (냉정,점액)이라는 3가지 정신적인 요소가 인체 생리학의 기본 요소라 본다.질병은 계절,cpu 슬롯방식기호,환경,섭생,음식과 같은 외적 요인들이 3가지 정신적인 요소 간의 균형을 깨뜨린 상태라고 설명한다.특정 요소를 질병의 원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여러 요소의 불균형으로 설명하는 점에서 분석적이 아닌 전체적인 관점을 중시하는 의학이라 볼 수 있다.
질병을,해탈을 향해가는 과정으로 본다든지,의사가 아닌 라마승에 의한 정신적인 치료가 시행되는 등 정신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종교적 의학이라는 특징도 가진다.예방과 위생을 중시하는 등 인위적인 치료법보다 자연적인 방법을 선호한다.
사부의전은 의사의 덕목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의서에 의료행위자의 덕목을 상세히 기술하여 강조한 점은 기릴 만하다.의사는 지식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생명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며 의학적인 도덕에 의한 위임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며,환자에 동정심을 가지고 의료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의료인의 덕목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다른 의학과 비교된다.유배지에서 아플 때마다 충선왕은 이런 가르침을 받은 티벳 의사들의 따뜻한 돌봄을 받았을 것이다.녹차 수유차와 따뜻한 티벳 의사들 덕에 충선왕은 유배지에서 건강하게 돌아왔다.
유영현 원장(오디오칼럼 1+1이야기 https://www.youtube.com/@yhyoo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