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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오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에서 만난 김태권(78)씨는 “요즘 뉴스를 잘 안 본다”고 말했다.독립운동에 상징성이 있는 김구 선생의 후손이 독립기념관장 후보 추천에서 탈락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김씨는 해마다 6월26일 서울‘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열리는 백범 선생 추모식에 참석한다.김씨는 “대강당에서 하던 선생의 추모식을 올해부터 소강당으로 옮겨서 하더라”고 했다.
김씨의 고향집(쇠실길 22-58) 대문 옆엔‘백범 김구 선생께서 은거하신 집’이라는 비석이 서 있다.인천 감옥에서 탈출한 뒤‘김두호’라는 이름으로 숨어 다닐 때였다.그는 1898년 5월(음력) 종씨였던 고 김승묵(호 광언)의 집에서 40여일 동안 은거했다.후손 김씨는 “맨 왼쪽 끝 방에서 선생이 지내셨다고 들었다”고 전했다.떠날 때‘동국역대’라는 책에 시를 적어 건넸던 백범은 1946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신분으로 쇠실마을을 다시 찾았다.
은거 기념관 한쪽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김씨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정근의 딸이 백범 선생의 장남과 결혼할 정도로 인연이 깊다”고 설명했다.두 집안의 첫 매개가 된 것은‘동학’이었다.황해도 해주 출신인 백범 김구 선생은 17살 때 동학농민혁명(1894~95)에 참여해‘아기 접주’로 이름을 떨쳤다.안태훈 진사는 동학농민군‘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김구 선생에게 “어느 한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고 제안했다.김구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안 진사의 자택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김구 선생은‘백범일지’에 안중근 의사와의 인연을 기록했다.“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도 사격술이 제일로,도박 50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재주가 있었다.… 안 진사는 당시 빨간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어뜨린 8,도박 509세의 정근·공근에게는‘글을 읽어라‘써라’독려하면서도,도박 50맏아들 중근에게는 공부 않는다고 질책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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