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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구도,삶과 마주하는 여행

석양에 물든 덕숭산과 수덕사[사진/백승렬 기자]
석양에 물든 덕숭산과 수덕사[사진/백승렬 기자]

(예산=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가요 '수덕사의 여승' 때문이기도 하지만 충남 예산에 있는 수덕사를 모르는 중장년층은 별로 없다.

그러나 수덕사는 세속적인 장소가 아니며 여승만의 절도 아니다.

비구(남자 승려)와 비구니(여자 승려) 100여명이 지금,이 순간에도 수행에 매진 중인 큰 도량이다.

해인사,통도사,송광사와 함께 조계종 4대 총림으로 꼽힌다.

예술과 구도,삶과 마주하는 여행

근현대 선지식으로 선불교를 중흥시킨 만공(1871~1946),문인·여성운동가·불교 사상가였던 김일엽(1896~1971),'서예적 추상' 화가로 한국보다 유럽 화단에 더 알려졌던 고암 이응노(1904~1989) 등 큰 인물들의 족적이 새겨진 곳이다.

뜨거운 햇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내외국인이 수덕사를 찾고 있었다.

하루 이틀 숙식하며 사찰 체험(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방문객도 적지 않았다.

수덕사 스님들의 아침 발우 공양[사진/백승렬 기자]
수덕사 스님들의 아침 발우 공양[사진/백승렬 기자]


수덕사는 수목이 울창해 여름이 싱그럽다.능인선원이 있는 정혜사로 올라가는 1천80 계단이 놓인 계곡 옆길은 나무 그늘이 짙어 뜨거운 태양을 가려준다.

구도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 나서는 여행은 쉼이 없다.

덕숭산(해발 495m) 골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내리는 수덕사는 여름에 떠나기 좋은 여행지였다.

600년을 이어온 덕산온천,추사 김정희 고택,덕숭산과 가야산(678m)을 아우른 덕산도립공원,낚시 명소 예당호수,윤봉길 의사 기념관,안면도 등이 가까이 있다.

내포 문화 중심지 덕숭산 수덕사

예산,홍성,당진,서산 지역이 내포(內浦) 문화권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내포란 바다나 호수가 육지로 휘어들어 간 지역을 일컫는다.

물길을 통해 내륙 깊숙한 곳과 바다가 연결됨으로써 물산 교류가 활발하고 문화가 꽃피던 곳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 임진과 병자의 두 차례 난리도 여기에는 미치지 않았다.땅이 기름지고 평평하다.생선과 소금이 매우 흔하므로 부자가 많고 여러 대가 이어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고 했다.

덕숭산 정상[사진/백승렬 기자]
덕숭산 정상[사진/백승렬 기자]


내포 지역 중심 산은 가야산이다.

조선 최고 명당으로 꼽혔던 남연군(흥선 대원군 아버지) 묘가 자리 잡은 곳이 가야산이다.

가야산 일원으로 통칭하기도 하는 덕숭산은 차령산맥 끝 줄기로,높지 않지만,수려한 계곡과 기암괴석이 선경을 연출한다.

충남의 명산으로 꼽히는 가야산,오서산(790m),용봉산(381m) 가운데 덕숭산이 있다.

수덕사는 백제 시대 창건돼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백제 불상으로 이름난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서산 마애여래삼존불상이 내포 지역에 있다.

수덕사 본찰에서 1천80 계단을 올라 정혜사를 거쳐 덕숭산 정상까지 가는 데는 편도 1시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거리는 약 2㎞이다.

만공 스님이 수행했던 소림 초당,그가 세웠던 관음보살입상,이란 페르시아만공의 제자들이 세운 만공탑 등을 도중에 볼 수 있다.

동방 제일 선원과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방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인 경허(1849~1912)의 제자로,선불교의 중흥을 이끈 만공 월면 선사가 주석했던 수덕사는 한국 제일의 선원으로 꼽히며 덕숭총림으로 불린다.

총림이란 선원(참선 도량),강원(불교 대학),율원(불교 대학원),염불원(염불 도량)을 모두 갖춘 도량을 말한다.

견성암[사진/백승렬 기자]
견성암[사진/백승렬 기자]


수덕사에서는 최고 어른인 방장 달하 우송 대종사를 비롯해 스님들이 아침 발우 공양을 하고 있었다.

새벽 예불 후 본찰의 모든 스님이 오전 5시 반에 함께 하는 발우 공양과 공양 후 마당 쓸기 울력은 산사의 고요와 활력을 느끼게 했다.

만공이 세운 정혜사 능인선원에는 비구승 수십 명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용맹정진 중이었다.

정혜사 옆 돌계단을 지날 때는 저도 모르게 발소리마저 죽이게 된다.

범하기 어려운 경건과 적막이 암자를 감싸고 있었다.

덕숭산 정상 가까이에는 만공이 말년에 수행하다 입적했던 토굴이었던 전월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내포 신도시를 내려다보는 전월사는 작고 소박하지만 정갈한 암자였다.

전월사[사진/백승렬 기자]
전월사[사진/백승렬 기자]


인류사와 마찬가지로 종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남녀 성차별 역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에서 비구니의 참선은 만공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마음 닦기에 남녀가 따로 없다고 생각한 만공은 비구니에게 참선의 길을 열어 주었으며,그 결과 지어진 것이 최초의 비구니 선방인 견성암이다.김일엽이 참선 수행한 곳도 견성암이다.

견성암에는 4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 중이었다.

수덕사에는 견성암 외에도 환희대,선수암,극락암 등 비구니 암자가 셋 더 있다.

수덕사를 여승 사찰로 오인하는 데는 이처럼 비구니 암자가 많은 데 따른 것일 터다.

견성암은 비구니 사찰의 종가로 일컬어진다.

의친왕이 만공에게 선물한 거문고[사진/백승렬 기자]
의친왕이 만공에게 선물한 거문고[사진/백승렬 기자]


치열한 삶을 살다 간 위인들…만공,김일엽,이응노

조선의 억불 정책,일제의 탄압으로 쇠락하던 불교가 쇄신과 부활의 전기를 맞은 것은 만공에 힘입은 바 컸다.

만공은 1937년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면전에서 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화하려는 총독부의 종교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광복 다음 날 그가 정혜사 뜰에 떨어진 무궁화 꽃송이에 검은 먹을 묻혀 쓴 '槿花筆 世界一花'(근화필 세계일화) 글씨는 편액,만공탑 서각 등으로 남아 있다.

'근화필'은 끝이 돌돌 말린 무궁화 송이로 썼다는 뜻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은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만공에게 고려 공민왕이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진 거문고를 선물했다.

전월사에는 그가 앉아 거문고를 뜯곤 했던 좌선대가 남아 있다.

거문고는 수덕사 성보 박물관에 전시돼 있었다.

지식인,작가,언론인,종교인,1세대 여성운동가로,이란 페르시아부모를 여의고 거듭된 결혼과 이혼 등으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김일엽은 30대 중반에 만공에게 절필을 다짐하고 불자의 길에 들어서 40여 년 수도했다.

깨달음을 얻어 더는 세속에 얽매이지 않게 된 그는 1960년대 법문집과 수필집인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서'를 잇달아 발간했다.

이응노 화백의 암각화[사진/백승렬 기자]
이응노 화백의 암각화[사진/백승렬 기자]


그의 저작은 큰 반향을 일으키며 많은 이들을 구도의 길로 이끌었다.

2014년 재미교포 연구가에 의해 번역된 '어느 수도인의 회상'은 서양 학계가 그를 불교 사상가로 주목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이 책에서 일엽은 "생(生)의 채비가 곧 사(死)의 대비"라고 말했다.

세계 여성 철학자 대회는 2018년 세계 철학자 대회를 기해 54명의 세계 여성 철학자를 1년 동안 주 단위로 한 명씩 알리는 달력을 만들었는데 김일엽은 그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수덕사를 방문할 때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입구에 자리 잡은 수덕 여관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화가 고암 이응노 화백이 1944년 구입해 1959년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그가 떠난 뒤에는 부인이 여관을 운영했다.

지금은 고암 기념관,사적지로 지정돼 있다.

수덕사 쪽에서 내려오는 개울이 집 앞으로 흘러가는 수덕여관은 소담하고 궁색하지 않은 농가의 모습을 띠고 있다.

사적지에는 고암이 조각한 암각화 2점이 남아 있다.

그는 1967년 간첩 조작 사건인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1969년 프랑스로 다시 떠나기 전 바위에 추상화 2점을 조각했다.

글자 같기도 하고,사람 모양 같기도 한 그림이 역동적이다.

무엇을 그린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영고성쇠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내 모습도 있다."라고 했다.

이응노는 한지와 수묵이라는 동양화 매체를 사용해 스스로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 붙인 독창적 세계를 창조했다.수덕여관 옆 선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수덕사 대웅전[사진/백승렬 기자]
수덕사 대웅전[사진/백승렬 기자]


수덕사 대웅전에 반하다

국보 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한국 건축사와 건축미학 측면에서 중요하다.

358년 창건된 수덕사의 대웅전을 1937년 해체 수리할 때 건축 연대를 명시한 묵서명이 발견됐다.

이로써 수덕사 대웅전은 현존하는 목조 건물 중 건축 연대가 확인된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공인됐다.

건축 시기는 고려 충렬왕 34년인 1308년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란 페르시아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이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가장 오래된 '3대 목조 건물'로 꼽힌다.

현재 남한에 남아 있는 고려 시대 건축물은 6개이다.

구조적 아름다움은 700여 년 세월과 더불어 대웅전을 고색창연한 빛으로 물들이는 요소이다.

대웅전은 정면 3칸,측면은 이보다 한 칸 더 많은 4칸의 특이한 구조를 가진 맞배지붕 집이다.

강한 배흘림기둥과 기둥 위의 주심포가 조화를 이룬다.

대웅전 측면[사진/백승렬 기자]
대웅전 측면[사진/백승렬 기자]


평이한 빗살문 장식의 세 쪽짜리 분합문이 이와 조촐하게 어울린다.

주심포란 지붕을 떠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에 하나만 있는 건축 기법이다.

공포가 여럿 있으면 다심포라고 한다.

대웅전 옆면은 기하학적,추상적인 미감을 간직하고 있다.

기둥과 들보가 서로 받고 받치면서 삼각형 4분할 5등분의 정제된 규격 미를 보인다.

평주와 원주가 적절하게 교차하고,부재들의 크기와 간격이 비례해 공예 미를 이룬다.

수덕사 대웅전은 무심한 듯 세심하고,소박한 듯 화려해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목조건물로 꼽힌다.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8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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