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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충혼탑 건립 추진…전몰자 많게는 46명으로 늘어날 듯
(서울=연합뉴스) 홍준석 기자 = 5일 오후 4시께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문화관 대강당 '서울대학교 재학생 한국전쟁 참전 전몰자' 추모비 앞에 국화가 놓여 있다.2024.6.6.
(서울=연합뉴스) 홍준석 기자 = 서울대 법학과 1학년생이던 장정근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갑종 장교로 지원해 7사단에 배치됐다.그는 소대장으로서 강원도 양구 전투를 치르던 1951년 11월 27일 21세 나이로 순직했다.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학도호국대에 지원해 정훈장교로 복무하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생 김세환은 24세이던 1951년 8월 2일 강원도 고성에서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그해 3월 28일 태어난 딸의 백일잔치를 보기 위해 휴가를 나왔다가 부대에 복귀한 직후의 일이다.
두 인물은 서울대 관악캠퍼스 문화관 대강당 로비 벽면에 있는 흑요암 추모비에 이름이 새겨진 29인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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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9명은 '서울대 재학생 한국전쟁 참전 전몰자'다.
[서울대학교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상황은 1951년 경북 영천 고향 집에서 괴한의 저격으로 사망한 김성칠 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의 일기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1950년) 6월 28일 낮에는 학교 깃대에 인공국기가 나부끼게 되었고 (중략) 7월 1일 학교는 이미 인민군이 들어와서 그 일부분을 쓰고 있고 연구실에는 아직도 들지 아니하였으나 책은 내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생들은 학업에 열중할 수 없었다.일부는 펜 대신 총을 들었다.
피란길에 나섰다가 자발적으로 참전을 결정한 서울대생을 포함한 서울 시내 각급 학교 학생 200여명은 수원에 모여 '비상학도대'를 조직했다.
이 중 일부는 1950년 6월 29일 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아 한강선 방어 전투에 투입됐고,전투부대가 아닌 지원부대에 배치된 학생들은 현역으로 입대하거나 국방부에 학도대원으로 구성된 전투부대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을 전후해서는 여성 학도의용군도 조직됐다.이들은 각 전투부대에 합류해 행정,간호,알나스르fc선무(점령지 민심을 진정시킴) 업무를 담당했다.
[서울대학교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대는 한국전쟁 당시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동문 학생들을 기억하기 위해 1996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홍두승 사회학과 명예교수 주도로 '전몰 추모비'를 세웠다.
이후 서울대는 매년 현충일을 앞두고 학내 추모비와 국립서울현충원을 차례로 참배하며 전몰자 넋을 기려왔다.
올해는 지난 5일 오전 8시 40분께 유홍림 총장과 보직교수 등 34명이 추모식에 참석했다.
추모비를 처음 만들 당시 홍 교수는 미등록 제적자 명단과 전쟁기념관 전사자 명부를 비교하고 제보로 받은 전사 통지서를 통해 전몰자 명단을 채웠다.
그렇게 처음에는 27명이었던 전몰자 명단은 2014년 29명으로 늘어났다.
추모비를 제막할 당시에도 재학생 전몰자가 43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던 만큼,서울대는 국가보훈부와 협조해 전몰자를 추가로 파악할 계획이다.학교 차원에서 제보받은 사례를 포함하면 명단은 많게는 46명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는 전몰자 넋을 기리기 위해 충혼탑을 건립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서울대 관계자는 "학내 구성원 의견을 묻고 예산을 마련해 가능한 한 빨리 충혼탑을 건립하겠다"며 "명단을 확인해 완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