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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속살
1993년 6월7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핵심 임원 200여 명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집결시켰다.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 임원진을 모은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신경영’을 선언했다.이건희 회장은 이후 68일간 200여 명의 임원들과 유럽,글라스 노우 프로필미국,일본의 세계 일류 현장을 찾아다녔다.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드는 독일 폴크스바겐 공장,세계 최고의 비행기를 만드는 프랑스 에어버스 공장,세계 제일의 백화점 등 일류로 평가받는 곳이라면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
일류 기업이 되려면 양이 아닌 질을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그날의 선언은‘프랑크푸르트 선언’이라 불리며 삼성그룹이 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이때 이미 삼성은 디램 시장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며 호황을 누렸다.하지만 여전히 선진 시장에서는 삼성 제품이 경쟁사 대비 싸구려 취급을 받았다.적당히 잘하는 것으로는 일류가 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이건희 회장을 조급하게 했다.불량품이 나오면 즉시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시키는 라인 스톱 제도,무선전화 제품 불량률이 높아지자 불량품 15만 대를 쌓아놓고 불을 지른‘불량제품 화형식’도 이때 이뤄졌다.
녹록지 않은 현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31주년을 맞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이건희 회장이 전세계를 돌았던 것처럼 2주간 미국 전역에서 30여 건의 공식 일정을 수행원 없이 진행했다.신경영 선언 당시보다 삼성그룹은 훨씬 더 크고 훌륭한 기업이 됐지만 이재용 회장 앞에 놓인 현실은 녹록지 않다.유진투자증권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매출액은 2012년 200조원을 돌파한 이후 2023년까지 11년간 연평균 2.3% 성장했다.달러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1%에 불과한 초라한 성적표다.
좀더 세밀하게 따져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삼성전자 모바일 부문 매출액은 2013년 애플 매출액 대비 73% 수준이었다.그런데 2023년에는 22% 수준으로 떨어졌다.애플이 100점이면 삼성은 73점 수준이었는데,22점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비메모리 부문 매출액은 2011년 대만 티에스엠씨(TSMC) 대비 88% 수준이었는데,2023년에는 26%로 떨어졌다.2019년 이재용 회장은‘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선언했다.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해 설계(팹리스),위탁생산(파운드리) 등을 종합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1위에 오르겠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TSMC와의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졌다.대만의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2023년 4분기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TSMC의 점유율은 61.2%를 기록했다.삼성전자의 점유율은 11.3%로 두 회사의 격차는 49.9%포인트다.시스템반도체 비전을 선포했던 2019년 당시 TSMC의 점유율은 51.8%,글라스 노우 프로필삼성전자는 18.5%로 격차는 33.3%포인트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삼성전자의‘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메모리 반도체다.삼성전자는 디램,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분야에서 부동의 1위다.1993년 처음으로 글로벌 디램 시장 1위를 차지한 이래 한 치의 의심도 없는 1위였다.하지만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반도체에 들어가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HBM은 디램을 8~12장 쌓고 중간에 4천여 개의 이동 통로(TSV)를 뚫어서 만든 고성능 메모리다.
AI 연산은 대규모 데이터를 빠른 속도로 처리해야 한다.데이터 처리 속도의 발목을 잡는 것은 메모리다.데이터를 연산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충분히 빠르다.그런데 메모리에서 연산기에 데이터를 전달해주는 속도가 느리다.비유를 하자면 공장 설비의 조립 속도는 빠른데 부품 공급이 느려 생산 속도가 더딘 셈이다.HBM은 디램을 쌓아 올려 대용량을 확보하고 이동 통로를 여러 개 뚫어 전송 속도를 높였다.
전세계 AI 반도체 시장 점유율 90% 이상을 차지한 엔비디아 AI 반도체에는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HBM이 들어간다.엔비디아 GPU를 사기 위해 줄을 서야 하는 것처럼,글라스 노우 프로필HBM도 공급 부족 상태다.SK하이닉스의 HBM은 이미 2025년도 생산분까지 완판이 됐다.엔비디아는 SK하이닉스 외에 다른 HBM 공급사를 물색하고 있고,후보는 당연히 1위 업체인 삼성전자다.
삼성전자,2019년 HBM 조직 해체
하지만 삼성전자는 준비가 안 돼 있다.삼성전자는 2019년 HBM 개발 조직을 해체했다.HBM은 성능이 뛰어나지만 비싸다.따라서 굳이 HBM 시장이 커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후발주자인 SK하이닉스는 그나마 HBM이라도 팔기 위해 생산했지만 1위인 삼성전자는 작은 시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갑자기 AI 반도체 시장이 확대되고 HBM 수요가 폭증하자 SK하이닉스는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HBM 개발 투자를 하지 않았던 삼성전자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한 5년 전 판단이 아니다.시장이 확인된 지 1년이 넘게 지나도록 다른 기술도 아니고 삼성전자가 제일 잘하는 디램 분야에서 아직까지 품질을 완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삼성전자는 모든 경쟁자가 두려워하는 빠른 추격자였다.애플이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처음에는 옴니아처럼 부족한 제품이라 하더라도 빠르게 출시하며 대응했고 결국 갤럭시 시리즈로 세계 출하량 1위를 쟁취했던 기업이 삼성전자다.
최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대만 타이베이 그랜드하이라이호텔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전자는 어떤 인증 테스트에도 실패한 적이 없고,HBM 반도체가 탑재될 것”이라고 말했다.이에 앞서 〈로이터〉는 삼성전자 HBM이 엔비디아의 품질 테스트에서 탈락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삼성전자는‘순조롭게’진행되고 있다고 반박했지만 시장은 삼성전자의 능력을 의심한다.그런 와중에 엔비디아의 CEO가 테스트 실패설을 부인해준 것이다.
발언 이후 삼성전자 주가는 3% 넘게 급등했다.젠슨 황 CEO의 발언을 차분하게 살펴보면 협력업체를‘공치사’하는 것에 가깝다.젠슨 황 CEO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3곳 모두 HBM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라며 “삼성과의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지만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엔비디아 입장에서 SK하이닉스가 독점적으로 HBM을 납품하는 현재의 구도는 달갑지 않다.복수의 회사에서 HBM을 공급받아야 공급량을 늘리면서 가격도 낮출 수 있다.젠슨 황의 발언은 삼성전자 HBM의 품질이 납품될 정도로 높아졌다는 것이 아니라,열심히 해서 품질 테스트를 통과하라는 의미다.굴욕적이다.
패키징 문제?디램 설계 문제?
삼성전자 반도체를 총괄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의 수장이 교체됐다.디램 사업을 총괄하다 2017년 삼성에스디아이(SDI)로 자리를 옮겼고,이후에는 실질적으로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올드보이,글라스 노우 프로필전영현 부회장이 복귀했다.삼성전자 HBM의 어떤 부분이 엔비디아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디램을 쌓아 올리는 패키징에 문제가 있다는 설이 있고 일각에서는 HBM을 구성하는 삼성전자 디램 자체의 문제라는 관측도 나온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부 패키징의 문제라면 개선에 이렇게까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라며 “디램 설계 자체의 문제라면 생각보다 개선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삼성전자가 디램을 잘 못 만든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는다.전영현 부회장이 내부적으로 “디램 설계 기술력을 끌어 올려야 한다”고 강조한다고 한다.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삼성전자의 위기는 가장 근간이 되는 기술력을 축적하는 프로세스와 에너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기인한다.완벽하지 못함을 스리슬쩍 덮어뒀던 안일함이 누적돼 문화가 된 것이 문제다.2024년 1분기 삼성전자는 6조6천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완연한 메모리의 봄을 맞았다.2024년 삼성전자의 실적은 매우 좋을 것이다.하지만 2,3년이 지나면 좁아진,혹은 역전이 됐을지 모를 기술력의 차이가 삼성전자를 근간부터 흔들 것이다.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31년 만에 아들 이재용 회장은 아버지와 비슷한 행보를 하고 있다.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삼성전자의 현재에 관한 위기의식을 명확히 인지한 행보이길 기대한다.그래야 한다.
권순우 <삼프로TV>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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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스 노우 프로필,윤지웅 한국정책학회장(경희대 행정학과 교수)는 “빅테크 규제는 자국 이익 극대화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각 국가 사정에 맞춰 시행되고 있는 것”이라며 “유럽의 경우 세계 시장과 경쟁할 수 있는 디지털 경쟁력을 보유하지 못한 데다, 따라갈 수 있는 요인도 적어 ‘규제 일변도’ 방향으로 정책이 마련되고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