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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안종필 평전]
⑰동아일보 광고탄압
'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편집자 주]
1975년 2월 어느 날이었다.새벽 예배를 다녀온 이광자는 어김없이 6시 반쯤 약국에 들어섰다.연탄난로 뚜껑을 열어 연탄불을 살피고 불구멍을 조절했다.추운 겨울이라 많이 나갔는지 온장고에 쌍화탕이 비어 있었다.박스를 뜯어 쌍화탕을 채워 넣고,선반 위에 올려둔 약들을 눈에 담으며 물량이 충분한지 살폈다.약국 앞을 지나가는 청소부를 불러 쌍화탕 한 병을 건네며 인사했다.이른 아침인데도 약을 사러 몇몇 손님들이 다녀갔다.날씨가 포근했던지 안종필은 아들을 깨워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야구공 주고받는 소리가 약국 옆 골목길을 깨웠다.안종필이 공을 던지면 초등학생 아들이 껑충 뛰어올라 야구 글러브로 받았다.안종필은 가끔 원바운드로 세게 던지거나 아들 키를 훨씬 넘겨 공을 던졌다.그럴 때면 민영이는 “아빠,잘 좀 던지세요!”라고 인상을 쓰며 뒤로 빠진 공을 주우러 골목을 뛰어갔다.안종필은 뒤뚱거리며 달리는 아들을 보며 허허거렸다.
“우리 아들 추울텐데….” 이광자는 야구를 하는 아들이 감기가 들까 걱정했지만 그러려니 했다.이런 풍경이 새삼스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안종필은 아침에 일어나면 아들한테 나오라고 해서 야구공 던지기를 하곤 했다.그런 모습을 이광자는 흐뭇하게 바라봤다.한바탕 야구공 주고받기를 끝낸 두 사람이 약국 안으로 들어왔다.민영이는 쪼르르 연탄난로 쪽으로 달려와 난롯불에 언 손을 쬐고 있었다.“민영이 야구 실력이 늘었어.이제 제법 공을 잘 받아.” 안종필은 뜨거운 차를 호로록 마시며 이광자에게 말했다.“우리 민영이 그러다 야구선수 되는 거 아냐?” 이광자가 아들을 보고 찡긋 윙크하자 민영이 얼굴이 활짝 퍼졌다.
“잠꾸러기 우리 예림이는 일어났을까?” 안종필은 혼잣말하며 약국 안쪽 살림집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안종필은 아들과 야구공 주고받기가 끝나면 딸을 깨워서 동네를 산보하고 아침을 먹었다.딸이라 하면 죽고 못 사는 안종필은 딸을 구슬려 삶는데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당시 예림이는 피아노를 배우고 있었다.아침잠이 많은 편인 예림이를 깨우려고 안종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예림이가 피아노를 안 치니까 새들이 오지 않네.네가 일어나 피아노를 치면 새들이 오늘 나올 거야.” 그렇게 살살 굴리면 예림이가 늘어지게 기지개하며 일어났다.예림이는 한창 피아노 치기에 흥미를 붙이고 있었다.예림이가 다섯 살쯤 먹었을 때였나.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안종필 가족은 소공동 신세계백화점을 찾았다.흥겨운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장난감을 한두 개 사서 집에 돌아왔는데,예림이는 선물 포장을 뜯을 생각도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예림이는 백화점에서 들었던 캐럴을 치고 있었다.배운 적이 없는 곡을 치자 이광자는 깜짝 놀라 물었다.
“예림아,이 곡 어떻게 알아?”
“아까 백화점에서 들었잖아.그대로 옮겨봤지.”
안종필도 놀라는 눈치였다.평소 이광자가 예림이에게 피아노 전공을 시킨다고 하면 별로 탐탁지 않아 했다.그랬던 안종필은 딸이 신나게 캐럴을 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안종필은 출근하며 이광자에게 오려낸 신문기사를 건넸다.슬쩍 보니 영자신문이었다.영어 단어를 우리말로 옮겨 적은 대목도 있었다.안종필은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를 다룬 외국 언론 기사를 책상에 두고 가곤 했다.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래도 그렇게까지 하겠어라고 이광자는 반문했다.그럴 때면 안종필은 답답했던지 이렇게 쏘아붙였다.“국내 언론은 엉터리다.외국 신문에 이렇게 기사가 나오는데,제발 무식하게 말하지 말고,바로 알아라…”
◇“비밀경찰이라는 유령의 적과 싸우고 있다”
안종필이 주고 간 신문기사는‘한국 신문의 유령의 적(Korean Newspaper’s‘Phantom Enemy’)’이라는 제목의 워싱턴포스트 1월20일자 기사였다.사설면에 게재된 이 기사는 광고란을 백지로 실은 동아일보 지면도 실었다.기사를 쓴 돈 오버도퍼 기자는 1975년 1월14일 철야농성에 들어간 동아일보 사원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당시 보안사는 현역군인이 동아일보에 격려광고를 냈다는 이유로 광고국장 등 3명을 14일 저녁 연행했고,이에 항의해 동아일보 직원들은 철야농성을 벌였다.돈 오버도퍼는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태를 이렇게 보도했다.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 가운데 하나인 동아일보는 남한의 비밀경찰이라는‘유령의 적’과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다.지난 12월 중순부터 주요 광고주들은 하나둘씩 예정된 광고를 돌연 취소하더니 마침내 광고 취소 통고가 밀려들기 시작했다.12월 중순 광고해약 작전이 시작되자 동아일보의 광고란은 사시와 언론자유 슬로건이 한쪽 구석에 실린 채 많은 지면이 백지로 드러났다.이와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광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자유언론을 격려하는 몇 줄짜리 광고가 몰려들었다.많은 광고가 보복의 위험 때문에 익명으로 났다.그러나 용기 있고 현명한 격려광고들은 삽시간에 국내의 화제가 되었다.동아일보를 질식시키려는 이 움직임은 젊은 기자들은 물론 경영진이나 편집자들의 태도를 경화시켰다.그들은 봉급의 자진삭감을 감수할 태세도 갖추고 있다.어떤 사람들은 만약에 필요하다면 언론탄압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런 보수없이 일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1974년 10월24일 이후 자유언론을 실천하려는 기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변화가 서서히 나타났다.야당과 재야의 민주화운동이 비중있게 실리고,각계의 민주화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전파를 타고 보도됐다.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반격의 칼을 빼 들었다.광고탄압이었다.최초 징후는 12월16일에 나타났다.
이날 오전 한 기업 홍보담당 간부가 동아일보 광고국에 전화를 걸어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한 광고배정을 신중히 알아서 하라”는 사장의 지시가 있었다고 말했다.오후엔 또 다른 회사의 홍보담당 간부가 찾아와 “이유를 묻지 말아달라”며 광고 동판을 회수해갔다.12월20일에는 한일약품이 사장의 지시라며 광고 동판을 찾아가더니 대한생명보험은 동아일보 제호 아래 돌출광고 게재 중단을 요청했다.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가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은 12월24일이었다.1년 중 광고가 가장 많이 들어오는 이날 하루 동안 롯데그룹,오리엔트시계,미도파백화점,카지노 시즌27화 다시보기일동제약,종근당,한국바이엘,태평양화학 등 동아일보 광고 수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대형 광고주들이 “해약 이유를 묻지 말아달라”며 한꺼번에 광고계약을 철회했다.광고탄압 시작 한 달여만인 1975년 1월23일까지 떨어져 나간 광고는 평상시 광고의 98%에 달했다.광고해약 사태는 동아방송,신동아,여성동아로 확대됐다.
12월25일 오전 편집국에서 긴급총회가 열렸다.편집간부들도 참석했다.이날 총회에서 기자들은 회사 측에 “광고계약의 전면적 철회 경위를 즉각 신문과 방송에 자세히 보도하고 철회된 광고면을 백지 그대로 제작할 것”을 건의했다.국민들도 이런 실상을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12월26일자 동아일보에‘동아일보 광고 무더기 해약/ 새 수법의 언론탄압으로 규정’이라는 광고해약 사태 보도와 함께 2개면에 걸쳐 백지광고를 게재했다.2면 광고란은 기사로 채우고 4면과 5면은 신동아 발매광고와 여성동아 매진사례 광고가 활자만 귀퉁이에 작게 찍힌 채 나머지는 백지로 냈다.하루아침에 광고가 사라지자 한국기자협회,신민당,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각계에서 박 정권의 광고탄압에 대한 항의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권력의 광고탄압에 쏟아진 격려광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동아일보 편집국에 격려전화가 쇄도하고,독자들이 성금을 보내주기 시작했다.기자들은 성금을 그대로 받기가 미안했다.국민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 않겠는가.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격려 광고’였다.문화부에서 종교계를 담당하던 서권석의 제안이었다.최초의 격려 광고 주인공은 원로 언론인 홍종인으로,12월28일자 2면과 12월30일자 1면 광고란에‘언론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실었다.
1975년 신년호는 1면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언론탄압에 즈음한 호소문,지엠·코리아가 전면광고를 내기로 했다가 해약한 8면에 한국교회여성연합회의‘알리는 말씀‘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의 격려광고 등을 실었다.그 뒤로 시민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지기 시작했다.1월10일쯤부터 동아일보 지면은 기사와 논설을 빼면 격려광고로 도배되었다.종교계와 사회단체,정당은 물론이고 개인 단위 격려 광고가 가족,친목 모임,단체로 퍼져나갔다.광고탄압에 맞서 싸우는 동아일보 격려에서 민주회복과 언론자유 염원,유신정권을 질타하는 내용 등 광고 문안도 다양했다.격려 광고란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함성이 울려 퍼지는 광장이었다.
“술 한잔 덜 먹고 여기에 내 마음을 담는다”는 택시기사,“동아일보 배달원임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는 배달원,“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여백을 산다”는 밥집 아줌마,“썩은 이를 뽑자!”는 젊은 치과의사들,“나는 조용히 미치고 있다”는 대학교수,“동아일보 읽는 재미에 세상을 산다”는 서점 주인,“강산이 변할지라도 동아 너만은 변하지 말라”는 30년 애독자,“점심을 먹지 않고 그 돈을 동아에 드린다”는 수영선수,“언론의 자유 그것이 무엇이기에 나도 갖고 싶다”는 구두수선공.깨알처럼 실린 격려광고에 대해 영국 가디언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신문을 펼쳐 들고 첫 번째로 읽는 정치적 개인칼럼”이라고 평가했다.
그때 모든 동아일보 기자들이 그랬듯 안종필도 신바람이 났다.기사를 편집하는 일보다 신문 하단의 격려 광고를 읽는 게 더 재미있었다.학교 졸업 후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몇몇 친구들이 전화해 성금을 내겠다고 했다.자유언론과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온몸으로 느낀 안종필은 이 무렵 광고탄압 사태를 다룬 외국 언론 기사가 나오면 바로바로 이광자에게 보여줬다.
당시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에 대해 이광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남편은 백지 광고 사태를 다룬 외국 기사를 약국 책상에 놓아두곤 했어요.내가 허투루 볼까 싶어 영어 단어 밑에 우리말도 적어 줬어요.뉴욕타임스도 있었고,워싱턴포스트도 있었죠.내가 안 믿으니까 외국 신문에서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는 걸 알라는 뜻이었죠.저한테 소식통이 돼준 거죠.남편이 구해 준 신문을 읽고 시민들이 동아일보를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국민 성원이 빗발치자 기자들의 과격함을 비판하던 일부 간부는 물론 사주까지 고무되어 자유언론실천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2월8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부장급 이상 간부들이 결의문을 통해‘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지지하고 나섰다.편집국,출판국,방송국의 국장 이하 부차장 이상의 전 간부와 화백,논설위원,해설위원,미국 중고차사이트심의위원 96명이 채택한 결의문은 1975년 2월8일자 동아일보 1면에 광고로 실렸다.일선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대해 편집국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공개적으로 지지를 공표한 것은 처음이었다.
독자들의 격려광고와 성금이 계속 늘었으나 광고해약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동아일보사는 점점 위기를 맞고 있었다.박정희 정권은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집권 공화당 간부들은 자유언론실천에 앞장선 기자들을‘홍위병’이라 불렀고,공화당 정책위의장 박준규는 “동아일보는 기자들이 지배하고 있다”며 문제 기자들 제거를 암암리에 비치고 있었다.
[참고자료]
◎ 동아투위,『자유언론 40년』,2014,다섯수레
◎ 동아일보사 노동조합,『자유언론실천운동백서』,1989,동아일보사 노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