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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 만루]
남극대륙 첫 단독 횡단
산악인 김영미 대장
남극 설원을 홀로 걸었다.영하 30~40도의 추위도,눈보라를 동반하는 강풍도,빛이 난반사돼 온통 하얗게 보이는 화이트아웃도 이 여성 산악인을 꺾지 못했다.혼자 먹고 혼자 자면서 동력 없이 두 다리로 남극대륙을 가로질렀다.
김영미(45) 대장이 한국인 최초로 남극대륙 단독 횡단에 성공했다.지난해 10월 26일 출국한 그는 11월 8일(현지 시각) 남극대륙 해안가 허큘리스 인렛(남위 80도)에서 무게 100kg 썰매를 끌고 대장정에 올랐다.49일 만인 12월 27일‘남위 90도 남극점’을 지났고,해를 넘겨 1월 17일 마침내 길의 끝인 레버렛 빙하에 닿았다.69일 동안 걸어서 1786㎞.참고로 서울~부산이 약 400㎞다.
지난 20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김 대장은 작지만 단단해 보였다.2004~2008년 7대륙 최고봉 한국 최연소(28세) 완등 기록을 세운 이 산악인은 “에베레스트부터 남극까지 극과 극을 달리는 사람,김영미입니다”라고 소개했다.외롭게 남극대륙을 걷는 동안 가끔 자동 응답기에 남긴 말들은 소셜미디어(SNS)에‘남극에서 온 편지’로 올라와 인기를 모았다.
김 대장은 “내 인생의 미래 에너지까지 가불해 쓰고 싶을 만큼 힘든 여정이었다”며 “산에서 배우고 경험한‘인내’들을 매일 쏟아냈다”고 말했다.“제가 걷는 길을 먼 곳에서 마음으로 동행해 주신 분이 많았어요.남극의 깨끗하고 맑은 기운을 담아 각자 삶의 무대에서 내딛게 될‘한 걸음의 용기’를 응원하겠습니다.”
한국인 첫 남극대륙 단독 횡단
김 대장은 2014년부터 노스페이스 소속이다.신사업부 과장.트레일 러닝이나 제품 테스트를 하며 피드백을 준다.회사 밖에서 산악인으로 하는 일이 더 많다.그는 “출근하지 않고 산에 오르거나 극지를 탐험하는 것도 업무의 하나”라고 했다.
-남극대륙을 세계에서 네 번째로‘걸어서’단독 횡단에 성공한 소감이라면.
“좋은 사람들,따뜻한 사람들의 응원을 생각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많은 것들을 견디면서 나아갔어요.다치지 않고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서,그리고 긴 여정을 잘 마무리해서 기쁘고 행복합니다.”
-남극의 기운인지 표정이 밝네요.
“너무 멀쩡해 보이는지‘남극 다녀온 거 맞아?남산 갔다 온 것 아냐’라고들 해요(웃음).고산 등반하면 얼굴이 타고 피부가 벗겨지거나 상해서 오거든요.”
-강행군을 마쳤는데 회복은 다 끝났나요.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어요.남극에서 겪은 일을 주변에서 자꾸 물어보시니까‘몸은 서울에,마음은 남극에’죠.엑스트라 푸드로 뱃살을 비축하며 6~7㎏ 체중을 늘려서 갔습니다.체력 소모로 살도 많이 빠졌는데 지금은 찌우기 전보다 3㎏ 적어요.”
-남극에서 온 마지막 편지에‘쌀밥 한 숟가락에 시원한 김장 김치를 찢어 올려 먹고 싶다’고 썼는데.
“아직 못 먹었어요.식탐이 강하지는 않아요.먹고 싶다는 건 음식에 대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손맛,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더라고요.강원도 평창(계방산) 고향에서는 아직도 김치를 땅속에 묻고 꺼내 먹어요.인터뷰 마치고 가면 오늘 저녁에 먹게 될 것 같습니다.”
-69일 동안 남극에서는 뭘 드셨나요.
“썰매 무게를 줄여야 해 건조식을 먹어요.파스타나 치킨 커리 등 서양식이 많죠.마장동에서 소고기를 사서 식당에 조리 맡긴 후 동결 건조해 가져갔어요.”
-매일 같은 메뉴라니 질리겠습니다.
“그거라도 실컷 먹었으면 좋겠어요(웃음).입맛이 없을 때를 대비해 고추장 500g을 가져갔는데 반찬은 그거 하나였어요.운행할수록 썰매 무게는 감소하지만 체력이 소진되고 눈의 저항도 심해 가볍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짊어진 인생의 무게가 변하지 않듯이 썰매도 똑같구나 생각했어요.”
-실례지만 배설은 어떻게 하나요.
“남위 89도에서 90도 구간은 보호구역이라 배변 봉투에 수거해 와요.나머지는‘오픈 토일렛’이죠.어디든 일을 보는 곳이 화장실입니다.”
-이번 남극 횡단 성공의 의미라면.
“제가 사실 마흔이 넘으면서 그만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을 좀 했어요.그런데 이번에 자신감을 얻었습니다.또 한 번 도전을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먹고 돌아왔어요.”
산악부에서 체력이 제일 약했다
1999년 강릉대 입학 후‘재미 삼아’산악부에 입회했다가 그 세계로 들어갔다.너무 힘들어 그만둘까 했지만‘1년은 버티고 결정하겠다’고 마음먹으면서 결국 산꾼이 됐다.
-흔한 질문이지만 산이 왜 좋았나요?
“체력이 제일 약한 사람이 저였어요.산이 좋았다기보다 산악부 사람들이 좋았습니다.산에 다니면 도인처럼 누더기옷 입고 술도 안 마시고 이슬처럼 맑은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랐지요(웃음).과거에 느껴보지 못한 정 때문에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어요.”
-만년 설산 첫 등정을 남극에서 했더군요.
“산악부 선배님이 운영하는 노스페이스 강릉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용호 토토사이트박영석 대장님의 히말라야 다큐멘터리를 종일 틀어놓았습니다.그걸 제가 진지하고 재밌게 보니까 선배님이 박 대장님께‘지방에 있는 여성 산악인 한번 키워보면 어떻겠느냐’고 저를 소개한 거예요.박 대장님 추천으로 2004년 오은선 선배와 함께 남극 최고봉 빈슨 매시프(4897m)에 올랐지요.”
-귀국 후 인생이 달라졌나요?
“다음 해에 박영석 대장님은 북극에 가셨어요.당시 스폰서가 LIG손해보험 구자준 회장님이었는데,강원랜드 슬롯머신 가격같은 시즌에 북극과 남극 등반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식사 자리를 만들어주셨습니다.돌아가는 길에 박 대장님과 차를 같이 탔는데‘등반을 계속하고 싶다면 내 사무실로 와라’하셔서‘열심히 하겠습니다’(웃음) 그렇게 해서 7대륙 최고봉 완등의 첫발을 뗀 거예요.”
7대륙 최고봉 등정은 순조로웠다.2005년 5월 24일 북미 데날리(매킨리)를 시작으로 그해 여름 유럽 엘브루즈에 이어 겨울 남미 아콩카구아를 등정하고,2006년 오세아니아 칼스텐츠,2007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에 이어 2008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뤄냈다.한국 여성으로선 오은선씨에 이어 두 번째이자 최연소 완등.

김영미는 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루트 등반 때는 친오빠나 다름없는 오희준과 이현조 두 선배의 주검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그래도 고산등반을 접지 않았다.2008년 에베레스트 재도전에서 성공하고 2009년 박영석 대장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대에 합류,로체 정상에 올라섰다.그해 여름 가셔브룸2봉 원정에 나섰다.당시 14좌 완등 레이스 중인 고미영이 낭가파르바트 등반을 마치고 오면 함께 정상 공략에 나설 계획이었다.그런데 베이스캠프로 내려왔을 땐 하산길에 고미영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영석 대장은 2011년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돼 결국 산이 되셨습니다.고미영 등 여러 산악인의 비극을 마주했을 텐데,그렇게 목숨 걸고 길을 떠나는 까닭이 뭡니까?
“죽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그 누구보다 살고자 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고 저는 생각해요.어린 나이에 낙폭이 큰 일을 경험하게 돼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었습니다.인생의 시작과 끝을 마음대로 결정할 순 없지만….”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요.
“누군가에게 없는 소중한 삶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거잖아요.그들에게 간절하게 필요한 내일이 오늘 나에게 있으니까 이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진짜 가슴 뛰고 두근거리는 삶을 살자고.”
-가슴 뛰게 하는 건 높은 산에 있었군요.
“그때가 인생의 기로였어요.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고,내게도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걸 강하게 느꼈습니다.그러나 돌아가거나 피하지 않고 정면돌파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실내암장 운동과 산악스키에 몰두했고 마라톤에도 도전했다.자전거 실력도 인정받아 2014년 독일을 출발해 폴란드~발틱3국~러시아~카자흐스탄~몽골~중국~러시아~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팀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대장정 1만5000km’에 참가했다.

에베레스트부터 남극까지
김 대장은 남극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다.남극점(2840m)도 거대한 빙산이다.수직의 세계에서 오는 추락의 위험은 벗어나지만 히말라야만큼 극한 환경을 가진 장소.2008년 에베레스트 등정 때 가져간 태극기도 챙겨갔다.
-왜 하필 남극이었나요.
“10여 년 전에 제가 아무것도 못 하고 좀 쫄아 있었어요.한 걸음이라도 내디디려면 가장 단순한 기술을 선택해야 했습니다.그래서 2013년부터 남극 자료를 준비했어요.너무 멀고 돈이 많이 드는 게 문제였죠.”
-그래서 2017년에 꽁꽁 언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종단(724㎞)부터 도전했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했어요.수직은 날씨와 환경에 따른 전략과 기술이 필요하지만 수평은 기본에 충실하기만 하면 됩니다.기계적인 루틴을 얼마나 잘해내느냐가 중요하죠.반복에서 오는 만족감도 있습니다.바이칼 호수를 종단할 때 한 소설가가 제게 묻더라고요.”
-무엇을요?
“자전거도 있고 차도 있는데 왜 고행의 길을 택했나요?그래서 되물었어요‘제 표정에 그런 괴로움이 보이나요?그럼 한 줄이면 되는데 왜 길게 소설을 쓰세요’라고.각자의 꿈을 구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통쾌하네요.남극에 위험 요소는 없었나요?
“수직에 비하면 위험한 것보다는 어려운 것이 많아요.혼자고 도와줄 사람이 없고 하루 12시간씩 바람에 노출된 상태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초반에는 짐이 무겁고 오르막이라 하루에 20㎞씩,골프게임칩남극점 이후로는 30㎞씩 걸었어요.스키는 신고 있을 뿐 탈 수는 없었고요.”
-작년 11월 8일 남극에서 운행을 시작할 때 마음가짐은.
“덤덤했어요.남극점까지는 2023년 (아시아 여성 최초로) 무보급 단독 도달에 성공한 적이 있거든요.이번엔 여정이 더 길다 보니 길의 끝에 서는 순간만 상상했습니다.”
-혼자 가는 게 리스크가 더 적은가요.
“그렇더라고요.팀으로 가면 어느 날엔 A가 쓰러지고 어느 날엔 B가‘도저히 더 못 걸으니 헬기를 불러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컨디션이 좋아도 내 페이스대로 갈 수가 없어요.외롭지 않고 서로 의지가 되지만 불화가 생길 수도 있고요.”
-미래 에너지까지 가불해 쓸 각오였다고요?
“제 인생에서 미래 에너지까지 당겨쓸 기회는 흔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그래서 더 소중한 여정이었지요.(몇 년 치를 가불했는지 묻자) 되게 웃긴 게,잘 끝나니까 안 피곤해요.보람이 큽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녹음해 갔다
김 대장은 위도 1도를 넘을 때마다 전화(자동 응답기로 넘어가 녹음된다)해 지난 4~5일의 여정을 정리하며 생존 신고를 했다.그 말들이‘남극에서 온 편지’로 SNS에 게시됐다.동시에 GPS로 실시간 위치가 확인되면서 지도에 좌표가 달라붙었다.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하얀 캔버스 남극에서 제가 1786㎞를 걸어서 그린 그림”이라며 웃었다.
-옛날 삐삐처럼 음성 메시지를 남기는 방식이었군요.
“여정 초반에 음식 문제로 구토와 설사를 했는데,누군가의 위로나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누구에게 전화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어요.사실 그런 전화를 받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남극을 혼자 걷다 보니 누군가와 얘기하는 기분만으로도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었지요.”
-덜 춥고 바람이 거의 없는 날엔‘선물을 받았다’고 표현했는데.
“날씨가 안 좋다고 해서 안 걷는 건 아니잖아요‘그래,남극답구나’받아들이지 않으면 온종일 힘들고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듭니다.텐트 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강하게 불던 바람이 잠잠해지면 얼마나 고마운지.”
-시야가 잘 보이지 않을 땐 음악을 들으면서 신나게 걸었다고요?
“싸이의 흠뻑쇼,댄스 가요 등 여름 컬렉션으로 준비했습니다(웃음).유튜브에서‘동기 부여 노래’로 검색하니 플레이리스트가 있더라고요.내려받아 갔죠.”
-2년 전엔 남극에서 나침반이 고장 나 막막했다고 하셨는데 이번 횡단에서 가장 힘든 상황이라면.
“남극점을 지나고 나니 체력이 많이 떨어졌어요.부족한 거리를 만회하려면 더 오래 걸어야 했습니다.12~17m/s의 바람이 문제였어요.몸이 휘청거릴 정도라 물도 제대로 못 마셨습니다.정신을 부여잡고 가야 했지요.그런 날에는 한국에서 녹음해온 응원 메시지를 들었어요.”
-예를 든다면.
“대학생 때 읽은 책의 한 구절을 후배가 읊어줬습니다‘뜻이 높은 사람은 쉼 없이 준비한다.보란 듯이 떠벌리지 않고 남모르게 알차게 준비한다.알피니스트란 산에 오르기 위해 평소에 몸과 마음을 준비하는 사람을 두고 부르는 이름이다…’로 흘러가요.어떤 산을 내 안에 들어앉게 하는 태도입니다.”

-살면서 종종 망각하는 초심과 연결돼 있군요.
“네,그걸 지키고 싶어서 그 문구를 가지고 다녔어요.혼자 남극에 가면 사람들 생각이 정말 많이 납니다.제 짐을 들어줄 물리적 파트너로서 사람이 아니라,제 어깨를 다독여주고 힘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죠.그래서 사람들 목소리를 녹음해 갔습니다.”
-어떤 산을 내 안에 들어앉게 하는 일이 뭔지 설명해주신다면.
“산에 있을 때만 산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산에 갈 준비를 하는 훈련을 일상 속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는 뜻이에요.마음 안에 산을 들어앉혀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이번에 남극 원정 떠날 때 어머니 말씀은.
“제가 잘 설명을 안 해요.TV에 나오는 딸 모습을 보고 상상하시겠지만,어떻게 보면 일부러 말없이 계시는 것 같아요.말린다고 떠나지 않을 것도 아니고,걱정한다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남극의 매력은‘정직함’
그가 남위 84도에서 85도로 향해 갈 때 한국 사회는 비상계엄 사태로 혼란에 빠졌다.남극대륙 횡단을 완수하고 칠레로 빠져나온 다음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럴 땐 세상에서 뚝 떨어져 있는 사람이 부럽군요.
“사실 남극에서 통화하려고 들면 다 하거든요.세상의 소음이나 잡음을 듣지 않는 자발적 고립을 택했는데 나중에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제가 특권을 누리고 왔네요(웃음).”
-길의 끝에서 감정이 북받쳤겠습니다.
“끝없는 지평선이 아니라 뭔가 사물이 보이는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거의 다 왔구나!이제 끝나는구나!세상과 가까워지고 있는 뭉클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썰매와 연결된 벨트를 푸는 순간 몸에서 에너지가 다 증발해버렸고요.”
-돌아보면 남극의 매력은 뭔가요.
“가도 가도 같은 풍경이 펼쳐지지만 지루할 틈이 없어요.요행이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기본기에 아주 충실하게 한 발 한 발 걸어나가는 여정이었습니다.남극의 매력은 그런 정직함이라고 생각해요.남극을 온전히 느끼는 방법은 인내하며 걷는 것이고요.”
-두 다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라면.
“매일 든 생각이지만 제가 봐도 기특합니다.어떻게 또 걸어지냐?걸으면서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어요.”
-남극에게도 한마디 한다면.
“남극의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걸었고 남극은 제 숨소리를 기억할 것 같아요.남극에서 있던 일을 온전히 나눌 수 있는 대상은 남극뿐이고,그 좌표의 어떤 순간을 기억해주는 존재도 남극뿐입니다.우리는 서로 말이 필요 없는 사이가 됐어요.”
-등반에서 가장 어려운 기술은 뭔가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죠.인천공항으로 귀국할 때 마중 나온 사람들의 눈빛에서 깊은 걱정과 안도를 느꼈습니다.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내 손을 잡아주는 온기를 느끼려고 먼 곳까지 갔다 왔구나 생각했어요.”
-그건 너무 비효율 아닌가요?
“하하하,그러네요.집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잊고 지낸 것들을 재발견하는 남극 탐험이었습니다.”
산악인들은 보통 사람들과 섞여 사는 도시 생활이 따분하지 않을까.“산에 가는 데 에너지를 많이 쓰다 보니 사회적으로는 미숙한 구석이 많아요.고산 등반가들끼리는 이런 농담을 합니다.우리는 해발 5000m 이하에서는 쓸 데가 없어!(웃음) 대자연에서 얻은 맑은 에너지를 사회로 가져와 순환시킨다고 생각해요.”
맑고 정직한 남극을 가슴에 품고 김 대장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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