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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을 기리며

빈소에 놓인 고인의 영정.장석 시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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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일 선생(1934~2025·2·24)의 삶은 여정이었다.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구석구석을 살피고,분단 국가의 통일을 염원하며 남북을 오갔다.학문의 열정으로 세계를 답파한 여로는 상세히 알려진 것이고,통일의 열망으로 하루에도 수백 번 넘나든 남북의 길은 가려진 것이었다.햇빛 속에서든 달빛 아래서든 걸었다.소걸음으로 천리가 아니라 수만리를 걸었다.선생이 걷지 않고 뛴 것은 아마도 두 번 정도였을 것이다.한 번은 보이는 곳에서,벳 계열슬롯검증사이트다른 한 번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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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중국 시안 서문 밖 실크로드 시발 기념비 앞에 선 정수일 교수.당시 고인은 30여년 만의 답사에 어린아이처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실크로드는 물류 통로 이전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닦여진 길”이
2005년 중국 시안 서문 밖 실크로드 시발 기념비 앞에 선 정수일 교수.당시 고인은 30여년 만의 답사에 어린아이처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실크로드는 물류 통로 이전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로 닦여진 길”이라며 “옛적 미지의 인간들 사이의 감정과 사상을 나눈 흔적들을 새삼 더듬는 것은 답사의 또다른 기쁨”이라고 말했다.이종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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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톈안먼(천안문) 앞에 선 고인.이종근 선임기자
2005년 톈안먼(천안문) 앞에 선 고인.이종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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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지금까지 선생은 평생을 묵묵히 걸어왔다.뭔가 조금 남은 것이 있는 듯한데,걸음을 멈추고 말았다.천지 수면의 마지막 절반처럼,해 질 무렵에서 일몰까지를 남겨 두었다.그 과제를 선생의 뒤에 남은 모든 사람에게 물려주었다.선생이나 선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선생의 죽음은 결코 불행이 아니다.

차병직/변호사·법률신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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