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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DJ탄생 100년「다시 만난 김대중」은 KBS 광주총국이 김대중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아 준비한 기획 연재물입니다.월 1회 제작해 '뉴스 7 광주전남'과 '광주전남 9시 뉴스'에서 보도하고 있습니다.이번 디지털 기사에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정책과 2000년 이뤄진 6·15 남북공동선언을 다룹니다.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정세현 전 장관의 인터뷰 가운데 방영되지 못한 부분을 담았습니다.
1971년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이른 아침부터 구름 떼 같은 인파가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유세가 있는 날이었습니다.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김대중의 연설을 듣기 위해 차도까지 점령했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장충단 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우선 공무원과 공공 단체 직원들에게 가족 동반으로 전원 야유회에 참가토록 했다.불참자는 결근으로 처리했다.고궁도 무료로 개방했다.(중략) 서울 시내에 있는 모든 극장은 무료로 입장시켰다.제발 장충단공원에는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그런데도 장충단에는 시민들이 몰려왔다.기적 같은 일이었다.연단에 올라서니 온통 사람의 물결이었다.나는 생애 최고의 열정을 불태워 연설을 시작했다.-「김대중 자서전」 중에서
그해 대선에서 김대중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94만 6천9백 28표 차로 지고 맙니다.자서전에는 선거 부정과 지역감정 조장 등으로 '선거에서 이기고 투개표에서 진 선거'로 기록돼 있습니다.대통령이 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선 후보로서 김대중이 제시한 대중 민주 주체론 (대중 정치· 대중 경제·대중사회)와 외교안보 통일분야의 3단계 통일방안,4대국 안전보장론은 국민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장충단 유세는 당시 김대중이 선보인 정책선거,대안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폭발적인 반응이 드러난 현장이었습니다.(대선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김대중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끌어내며 대한민국 민주화 세력의 정치적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 김대중,남북교류를 제안하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 역사적 한 장면인 장충단 유세 현장,100만 인파 속에 대학원생 정세현이 있었습니다.훗날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내며 김대중의 햇볕 정책을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 정책으로 계승한 인물입니다.장충단공원을 찾은 청년 정세현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대학원을 들어갔어요.71년에 입학을 했어요.그런데 그해 4월 18일 날 오후 2시인가 장충단에서 김대중 후보가 연설하게 돼 있는데 미리 갔지.얘기를 들어보자.김대중 후보가 통일 문제에 관해서 얘기를 하리라는 기대를 하고 간 건 아니고,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기회가 오면 나도 정치판에 한 번 뛰어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김대중의 연설,대중연설을 잘한다는데 기법을 배우자 하는 취지로 간 겁니다.그런데 듣는데 깜짝 놀랐어.지금 국제 정세가 60년대 말로부터 미-소간에도 자기들끼리 물밑으로 대화하고 또 지금 중국과도.중공이라고 그랬지.중공과도 물밑으로 하는 거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는 남북 간에도 교류해야 되는 거 아니냐.말하자면 냉전이 어떤 점에서는 사실상 끝나가고 있는 그때는 이제 화해라고 그랬어요.미-중 화해 또는 미-소 데탕트라 그랬는데 데탕트,또는 미-중 화해 이런 분위기를 타고 우리 남북 간에도 교류 협력을 해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아 바로 그 (대학교) 학과장 선생이 말씀하셨던 분단 국가에서 국제 정치를 배우고 가르치는 이유는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얘기가 바로 이런 얘기구나.국제 환경을 봐가면서 남북 교류를 해야 된다.그러면서 이제 기자 교류,로또 1등 갯수스포츠 교류,이산 가족 상봉을 제안하더라고.그리고 남북이 그런 교류,왕래할 수 있도록 주변 4대국 미·일·중·러가 교차 승인을 해달라 뭐 그런 얘기를 하는 거야.내가 그걸 보고는 솔직한 얘기로 저 사람 정치인,정치인인데 아니 대학 교수보다 유식하다.어떻게 현 국제 정서,판세를 저렇게 소상하게 읽어내며,그걸 이용해서 남북 간의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교류 협력을 하자는 얘기를 하느냐.참 대단하다.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죠."
"남북 교류 문제도 김일성이가 전쟁을 포기하고 파괴 분자를 보내지 않는다면,그 전제가 선다면 우리 동포끼리 소식이라도 알아보고 체육경기에도 나가고 기자도 왔다 갔다 하자,뭐가 나쁘냔 말이야.세계에서 같은 동족끼리 자기 부모 형제간이 살고 계시는지 죽었는지 알아보지도 못하고 편지도 못 하는 나라는 박정희 정권 치하의 대한민국뿐이란 말이야.(중략) 아까도 말했지만,국제 정세는 지금 급속도로 변하고 있어요.
(중략) 나는 박정희 씨에 대해서 이 자리를 통해서 내가 말하고 싶습니다."대통령을 하려면 좀,공부 좀 하라"고.국제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가,조그마한 국내 정치에만 악용하려고 하지 말고 크게 아세아와 세계를 내다보며 50년과 100년의 앞을 내다보고,국가의 운명을 생각하는 대통령학을 좀 공부하라고 내가 권하고 싶어요." - 1971년 장충단공원 연설 ( 자료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파격적이었어요.그때 그 바로 그 장충단 연설 때문에 그 당시에 박정희 정권에서 김대중 후보를 빨갱이로 찍은 거야.지금이 어느 때인데 남북 교류를 얘기해.김대중 후보는 국제 정세가 이렇게 바뀌고 있으니까 우리도 그 흐름을 올라타서 남북 간의 교류 협력을 강화해서 이산가족 상봉도 하고 이런 식으로 나가야 되는 거 아니냐.말하자면 박정희식의 대북정책은 지금은 끝내야 된다는 얘기를 하니까 자기의 대북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김대중을 빨갱이로 낙인찍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해 8월 12일 날 이산 가족 상봉 사업을 하기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하자는 제안을 적십자 총재가 발표하게 돼요.김대중 후보가 4월 18일 날 장충단에서 했던 그 이산가족 상봉 사업도 하자는 아이디어를 가져가 버린 거야.그러니까 자기 걸로 만든거야.놔두면 계속 이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의 소위 그.말하자면 말 펀치가 쎄니까.계속 그걸 이슈화 해가지고 정부를 공격해 들어올 테니까.그걸 낚아채서 내 거로 만들어버리고 내 정책으로 하자.그래서 그해 가을에 이산 가족 상봉을 위한 적십자 회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으로 돼버렸는데… 아이디어 자체는 장충단에서 나왔었습니다."
■ 최초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3단계 통일론'
1971년 장충단 연설이 의미를 갖고 회자 되는 이유는 당시 김대중이 제시한 '3단계 통일론' 의 탁월함 때문이기도 합니다.북한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나아가 주적으로 삼는 당시 국내 정치 풍토를 생각할때 '3단계 통일론'은 당시로써는 낯설다 못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 질 수준의 제안이었습니다.김대중 이전에도 이후에도 평화 통일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정치인이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김대중은 한국형 통일 모델을 제시한 최초이자 유일한 정치인,로또 1등 갯수한반도 평화 통일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3단계 통일론을 얘기했죠.대단한 거죠.그때 그 3단계 통일방안을 내놓을 때 처음 내용은 이거예요.3단계 통일 방안이라는 것이.일단 남북 간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두 국가로 그대로 말하자면 투 코리아.두 국가로 공존하고 그 대신 싸우지 말고 협조할 수 있는 것은 협조하자.그걸 이제 좀 유식한 말로 하면 남북 간의 국가 연합 형태로 공존을 하자.그 양반이 그때는 공화국 연방제라는 표현을 썼어요."
"공화국 연방,공화국끼리.대한민국도 민주공화국,북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그러잖아요.2개 공화국이 공조를 하는 식으로 해서 나가자.그게 이제 학술적으로 말하면 정부론에서 말하는 국가 연합입니다.그런데 이제 김대중 대통령은 공화국 연방제라는 표현을 써가지고,로또 1등 갯수북한이 말하는 연방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그래서 그것도 이제 빨갱이로 몰릴 수 있는 소지가 있었죠.남북 간에도 연방으로 가기 전에 국가 연합 형태로 먼저 가자.국가 연합 형태는 지금 유럽연합 그 다음에 동남아 국가연합.아세안 더 크게는 연영방이라는 게 있어요."
"영국이 옛날에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던 캐나다·호주·뉴질랜드·말레이시아·아프리카의 많은 영국 식민지 국가들 전부 다 묶어서 영연방이라는 식으로 묶어놨어요.다 별개 국가지만 협의체인 그 국가연합 체제 연방이라는 단어를 써서 그렇지,합의하는 것은 공동 보조를 취하고,합의 안 된 것은 각자 하게 되어 있는데 그런 단계에.그러니까 국가의 연합 단계를 먼저 거쳐서 미국과 같은 연방제로 건너간 다음에 최종적으로 통일하자.3단계로 통일을 하자는 거죠."
"그때 내가 이 사람이 진짜 독학을 했다는데.나는 이제 그 양반이 70년대 초에 그걸 내놓을 때 놀랬지만.내가 이제 석사 과정 다니고 박사 과정 다니는데도 뭐 미국에서 정치 공부해 온 사람들한테 배웠지만,전혀 그런 상상력을 발휘 못 했는데 이 양반 외국 사례를 이미 연구를 해가지고 3단계 통일안을 내놓는 걸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 점에서 앞서가는 정치인이었고 바로 그 70년대 초에 3단계 통일 방안을 내놨기 때문에 89년에 노태우 정부에서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으로 재포장이 된 거고,그것을 김영삼 정부에서 '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으로 다시 또 리노베이션을 해가지고 내놨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를 물려받은 정권교체지만 '남북 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의 원뿌리는 김대중 자신의 3단계 통일방안이었기 때문에 그걸 그대로 계승했고.노무현 정부에서 그것을 계승했고,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부인당했지만 사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그걸 계승했었죠.70년대 초에 그 3단계 통일 방안을 내놓는다는 것은 참 선각자 중의 선각자였다는 얘기예요."
■ 서독의 '동방정책'을 모델로 삼다.
"3단계 통일방안을 내놓고 이제 통일의 단계로만 얘기했지만,공화국 연방제라고 하는 1단계로 가려면 남북 간의 교류 협력이 먼저 선행돼야 된다는 생각을 동서독 사례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냈던 것 같아요.독일에서는 1969년에 사회민주당이 집권하면서 기독교 민주당이 만들어놓은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경제 부흥의 성과를 소위 사회 복지를 늘리는 쪽에다 쓰면서 거기서 남는 돈을 동독으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추진했던 동방정책의 핵심이에요.동방정책은 서독의 동쪽에 있는 동독과 동독의 배후 국가인 소련까지도 같이 서독이 가지고 있는 넉넉한 경제력으로 끌어안는다는 그런 프레임이거든 동방정책이.근데 69년부터 시작해서 한 10년 동안 쭉 그것이 진전되고 그러면서 이제 7·80년대 초로 넘어오면서부터는 동독의 민심이 서독으로… 저쪽으로 넘어가는 게 좌우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도였지요."
"결국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하신 것은 98년인데 아시다시피 69년에 브란트 수상이 시작한 동방정책,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대동독 퍼주기 정책'이 동독 민심을 흔들어서 그들의 마음이 서쪽으로 나오게 만들었고,그로부터 20년 후인 89년 11월 9일 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만 2년 된 10월 3일 날 동서독이 선거 방식으로 통일해 버리지 않았어요.그걸 봤기 때문에 98년에 집권한 김대중 대통령으로서는 3단계 통일 방안은 통일이 임박했을 때 써먹을 방안이고,말하자면 공화국 연방제라고 하는데 1단계를 쓰기 전에는 동서독식 접근을 해야 되겠다.우리가 경제적으로 북한보다 월등하게 우위에 있으니 이 여력을 좀 북한한테 주자.그것이 나중에 2000년 6·15 정상회담에서는 '민족 경제 공동 균형적 발전'이라고는 표현으로 열 글자로 압축이 되지만…"
"민족 안보의 유일한 기초는 내정개혁이다.우리가 자유·번영·희망의 국정 개혁에 성공한다면 민주 이념에 찬 정예 국방이 스스로 완성될 것이며 세계 각국의 존경과 신임 속에 국제적인 발언권이 강화되고 북괴는 스스로 침략을 단념하게 될 것이다.이는 바로 서독이 걸어온 길이며,우리도 아세아의 서독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책대결의 장을 열다 」(김대중 전집 II)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3단계 통일 방안을 제안했던 DJ가 대통령이 되면서는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서 양 독일 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 시키고 동독과 서독의 민심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어서 통일로 넘어가는 단계를 거치는.그러니까 국제 정세를 읽어내고 그것을 자기의 정책으로 만들어 내는 데 있어서 내가 볼 때는 학자 이상이에요."
■ 햇볕정책의 꽃 '남북정상회담'
"햇볕 정책이라는 것이 내용상으로는 그들이 필요한 쌀도 주고 농사짓는데 필요한 비료도 주고 하지만 그렇다고 현금을 주는 건 아니에요.먹을걸 주고 입을걸 주고 그 다음에 또 금강산 관광비로 현대에서 현금을 주기는 했지만 어쨌건 남쪽에서 돈이 들어가고 정부 차원에서는 쌀과 비료만 줬지만 그렇게 남쪽의 경제적 여력이 북한으로 들어가면서 북한 민심이 녹아내리고 남북 간의 화해 협력 분위기가 현저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다가오는 것을 나는 일선에서 정말 체험을 했고 김대중 대통령도 이제 그런 걸 보면서 매우 흐뭇해하셨지요."
"2000년 6월 6일 날 이었어요.정상회담은 그때 이제 6월 13· 14 ·15 그렇게 끝났지.정상회담 일주일을 앞두고 사전 준비 차원에서 모의 회의를 했어요.모의 회담.그전에도 남북 간에 무슨 체육회담,경제회담을 하면 경제인·체육인들이 남북 접촉 경험이 없잖아요.국제대회에서 온 선수와 같이 북한 사람들의 회담 전략·전술 회담에서 보여주는 이상한 돌발 행동… 이런 거 전혀 감이 없단 말이야.그런데 익숙해지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소위 모의 회담인데 남쪽 대표단 앉혀 놓고 북 접촉경험이 많은 사람이 북측 대표가 돼가지고 남쪽 회담 대표들을 괴롭히는 거예요.받아칠 수 있는 능력도 키워주고 돌발 상황 대처 능력도 키워주고 대체로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알고 나가라 하는 교육을 시키는 건데."
청와대 충무실에서 모의 남북 정상회담을 열었다.두 차례 정상 회담을 상정하고 예행연습을 했다.북측 김정일 위원장 대역은 김달술 전 남북대화사무국장이,김용순 대남비서 역은 정세현 전 통일부 차관이 맡았다.우리 측은 임동원 국정원장,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이기호 경제수석이 참여했다.북측 대역들은 북한 말씨까지 흉내 내며 날카롭게 질문을 했다.연방제,주한 미군 문제 등을 따지듯 물었다.연습은 5시간이나 걸렸다.모의 정상 회담에서 나눈 문답은 실제 평양 회담에서 대부분 재현되었다.
-「김대중 자서전」중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공부를 무지하게 많이 했더라고.우리가 돌발 질문 같은 걸 많이 해요.막 공격을 하고 그럼 그때 이제 대처를 하는 걸 보고.내가 이제 악역을 했는데 내가 김용순 역을 맡았으니까.'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면은 뭐 미군부터 철수시키고 그 다음에 말씀을 하셔야지.그렇게 좋은 말씀 많이 하시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은 그대로 놔두고 하자는 말입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미군 철수에 대해서 답변을 내놓는데 원고 없이 얘기를 하는 거야.그런 걸 보면서 김정일을 만나도 절대로 말싸움이 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치인들이 대개 고려연방제다,미군철수,국가보안법 철폐라는 것이 북한이 단골로 항상 내놓은 이른바 선행 조건인데 그런 거에 대해서 정치인들 잘 몰라요.연방제가 뭔지도 몰라 연방제는 공산주의 통일방안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어요.그런데 그런 거에 대해서 소상히,학자처럼 유식하다니까.아까도 얘기했지만 3단계 통일안 연방제에서 소위 공화국 연방이라는 국가라는 형태가 있고.그 다음에 미국식의 진짜 연방이 있고,그리고 통일로 가자는 얘기를 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미국 철수도… 미군이 있는 이유는 당신네들이 남침을 했기 때문이다.이런 식으로 시작을 해가지고 지금 여기 미군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중국이나 소련이 체제 개혁이 일어나면서도 동아시아에 있어서 군사적인 변란이 일어나지 않고 질서가 유지 된다는 식의 얘기를 하면서."미군 내보내고 싶으면 당신네가 잘해야 돼."그런 식으로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은 결국 언젠가는 나갈 거예요."라고 대응하는 거 보고 그때 같이 갔던 양반이 70년대 남북 대화에 이제 경험이 많은 베테랑.말하자면 박정희 정권에서 중앙정보부 북한 국장,남북대화 사무국장을 지낸 분이니까 박정희 아니 김대중 후보를 빨갱이로 모는데 앞장을 섰던 분이에요.우리 둘이 이제 청와대 걸어나오면서 "어이 정 차관,오늘 보니까 DJ 빨갱이 아니네 DJ 빨갱이 아니야.밖에서 빨갱이라 하는데 오늘 보니까 빨갱이 아니더라고." 그만큼 김대중 빨갱이론에 찌들어 있던 중앙정보부 출신이 빨갱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 정도로 설득력 있고,그 내용이 깊이가 있더라 이거예요.나는 그 힘이 그분이 독학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3단계 통일방안의 완결판 6·15 남북공동선언
"6·15공동선언은 첫 번째 항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두 번째 항이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 제안이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그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하겠다.세 번째가 이산가족 상봉.네 번째가 민족 경제 균형적 발전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식으로 돼 있어요."
"소위 남측의 연합 제안은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총재 시절에 내놨던 3단계 통일방안에서 첫 번째 공화국 연방제,학술적으로는 국가연합 그것을 남북연합이라고.남측의 연합 체계,연합제 안이라고 표현한거고,그걸 따라서 북한에서 낮은 단계 연방제라는 표현을 쓴거예요.낮은 단계 연방이 국가의 연합 개념이니까 남측의 통일 방안과 북측의 통일방안이 같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자고.그게 김대중 대통령이 제안하는 3단계 통일방안이 거기서 완전히 남북의 합의 2번째 원칙으로 들어간거죠."
"이산가족 상봉사업은 71년 장충단 연설에서 얘기했던 것이 이제 다시 또 강조된 거고.그 다음에 네 번째 그 경제 균형적 발전도 햇볕 정책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남쪽의 경제적 우위를 북한과 비교할 때 이렇게 차이가 있는데 잘 사는 남한이 북한을 도와주는 식으로 해서 북한 경제가 올라오도록 만드는 그걸 민족 경제 균형적 발전이라고 표현한거예요.그거는 햇볕 정책을 다른 말로 표현한 거지.그래서 6·15 공동선언은 김대중 햇볕 정책의 결정판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 뿌리는 70년대 나왔던 3단계 통일방안에서 시작된다."
■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 어떻게 읽어야 하나
"지금 대북 지원을 퍼주기라고 하는 사람들은 통일되면은 분단 체제하에서 구축된 기득권이 없어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분단 체제 하에서 구축된 기득권이라는 게 많아요.말하자면 미국의 무기상들과 연계된 뭐 장성 출신들 많아.그 다음에 분단돼 있기 때문에 반공 시절에 누렸던 부귀영화 때문에 자식들이 미국 유학도 갔다 오고.무슨 박사도 되고 와서 교수도 되고 장관도 가면서 말하자면 지배계급으로 올라간 거 아니냐.지배계급의 카르텔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남북 화해 협력이 일상화되면 자기들의 존재 이유가,존재 기반이 벌어진다는 것 때문에 끝까지 핑계 대면서 퍼주기는 안 된다."
"그걸로 핵무기 만들었다고 그러는데 핵무기는 우리가 준 것은 정부에서 준 것은 쌀과 비료밖에 없어요.쌀하고 비료밖에 없어.쌀로는 핵무기 못 만들어요.비료로 미사일 못 만들어.북한은 미국 의회조사국에서도 2005년에 이미 리포트를 냈지만,미국이 아무리 막아도 북한은 군복 바느질하고 그 다음에 초보적인 무기 만들어가지고 그것도 없는 나라들한테 팔아서 1년에 한 15억 달러씩을 벌어 쓴다.그래서 그걸 가지고 이제 다시 재투자해서 계속 힘든데 핵 개발 할 수 있는 자재를 사 오고.그 다음에 또 핵 기술 기술자들 보너스 주고 그런 식으로 해서 핵을 만든다."
"그런 식으로 설명하니까 국회에서 그래도 쌀을 팔아서 무슨 핵무기.불행하게도 핵무기의 원료는 우라늄입니다.우라늄은 북한에 최대 매장량이 있어요,전 세계적으로.이 무슨 불행이야.그러니까 땅에 묻혀있는 평안북도 박천 이쪽에 많이 있다는데.그거 캐가지고 저농축 3% 정도 3,4% 해가지고 연료봉 만들어서 발전기에 넣어놓고 물 끓여 가지고 발전한 뒤에 한 2,3년 있다 꺼내서 식혀가지고 화학 처리하면 그 속에서 플루토늄이라는 원자탄,원자력 원료가 나와요.
쌀 팔아 가지고 하려면 중국에 싣고 가야 되는데 배보다 배꼽이 커.비료를 팔아서 어떻게 비료를 팔아 쓴대.비료 속에 또 질소성분이 있는데 이런게 또 폭탄 원료래요.질소·인산· 칼륨 비료 3대 연료인데 그 속에 있는 핵 폭약이 될 수 있는 질소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비료를 화학분해를 한다.그거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무식한 소리 에요."
■ 위기의 남북관계,햇볕정책의 메시지는
" 동북아의 국제 정치 구조가 한때는 미소 대결 속에서 냉전 시대죠.냉전 체재하에서 남북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이룰 수밖에 없었는데 냉전이 끝난 뒤에 김대중 대통령이 됐단 말이에요.90년대 초에는 미소 냉전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의심하고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북한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미국한테 밀리지 않도록 완충 지대로서 북한을 쓰려하고.중국도 마찬가지고.미국도 남한을 될 수 있으면 혈맹으로,소련이나 중국이 미국을 통해서 가해오는 압박을 완충시키는 그런 전진기지로 쓰려고.그 주변 국가들 전부 다 자기네 실속 챙기느라고 바쁜 와중에 남북 간의 관계가 좋아지니까.그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끌려가지 않고 우리가 그들한테 이렇게 하면 안 돼.그렇게 하지 마.중국한테도 발언권이 있고,러시아한테도 발언권이 있고,미국한테도 발언권이 있더라 이거예요."
"남북이 대결 상태에 있으면 미·일이 하자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북한도 남북이 대립 상태였으면 일단 중국 러시아 편에 설 수밖에 없어요.언제 미국한테 당할지 모르니까 그러나 남북이 사이가 좋아지면 둘이 손잡고 그야말로 민족,같은 민족끼리 같은 입장에 서서.'이러지 마 너무 이렇게 간섭하면 안 되지' '네 실속 보다는 우리 실속도 좀 챙기자'는 얘기를 할 수 있는 남북이 각각 그러더라 이거야.그게 햇볕 정책의 어떤 실질적인 효능이었습니다."
한국은 4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데,자칫 잘못하면 찢기고 당할 수 있지만,잘만 하면 우리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4대국이 서로 협력하려 할 것입니다.말하자면 색시 하나를 두고 신랑감 넷이 프러포즈를 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그것이 외교입니다.
- 1998년 11월 중국방문,베이징에서 동포들과 간담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중에서
"남북한의 교류 협력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고,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면 학술적으로는 남북 연합 거기로 넘어가는 거예요.그러면 남북이 연합,일정 연합 형태의 소위 그 협조 관계를 구축을 해 놓으면 미국이나 중국이 싸우는데 우리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일 수 없게 되는 거예요.그렇게 되면 더욱더 우리 남과 북 동시에 자국 외교의 자국 중심성이 커질 수밖에 없고,그걸 통해서 결국 오히려 우리 문제는 우리가 해결하는데 중국과 미국이나 러시아 일본을 수단으로 쓸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거죠."
"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그야말로 한글 창제를 했던 세종대왕 같은 분으로 이제 기록이 되는 거지.그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대한민국 역사에 70년대에 3단계 통일방안을 내놨고,또 국제 정치의 흐름을 타고 남북에도 교류 협력을 하자는 얘기를 했고,갖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그걸 굽히지 않고 대통령이 돼서 평화정책 ·햇볕정책을 추진한 결과 남북이 한 때는 남북의 주인이라는 시절이 있었는데.그 이후에 정치적인 성향이 다른 사람들의 대통령이 돼가지고 잠시 쉬었지만… 다시 세상이 바껴가지고 이제 남북 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될 수 있다면 그때 그 분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가 지금 이렇게 국제적으로도 위상이 높아졌다라고 기록되겠죠."
“평화라는 것은 이만하면 됐다는 완성은 지금까지 있어 본 일이 없습니다.그러나 평화는 그 완성을 향해서 우리가 계속 노력하는 것,그것 자체가 평화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그런 사람이 많고 그런 나라가 많을수록 평화는 더 확대돼 간다.종국적으로는 세계평화를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그런 희망을 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 2000년 KBS다큐멘터리 <올해의 평화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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