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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슈탕네트,50년전 한나 아렌트 개념 비판
아이히만,“전쟁 기계의 톱니였을 뿐” 변명했지만
그의 나치즘 신봉과 철저한 공모 입증 자료 넘쳐나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유대인 1030만명 죽였어야”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로 유대인 학살 실무를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가운데 정면)이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글항아리 제공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로 유대인 학살 실무를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가운데 정면)이 196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글항아리 제공 1960년 5월 11일,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집행의 핵심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정보국 모사드 요원들에게 체포됐다.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한 지 꼭 15년 뒤,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은신 가옥에서였다.아이히만은 이스라엘로 압송돼 집중 신문을 받고 예루살렘 법원 특별재판소 법정에 세워졌다.1961년 4월에 시작된 재판은 그해 12월까지 이어졌다.아이히만은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이스라엘 최고법원이 1962년 5월 28일 원심판결을 확정했다.아이히만은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벤즈비 대통령에게 사면을 청원했지만 거부됐다.6월 1일 자정을 갓 넘긴 시각,교수형이 집행됐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나는 히틀러가 만든 절멸 작동기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일 뿐”이라며 학살 책임을 부인했다.“나는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 맡겨진 일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강변했다.“군인으로서 복종에 헌신하는 삶이 안락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그렇게 사는 방식은 생각할 필요를 최소화한다”고도 했다.

1961년 4월 한나 아렌트(뒷줄 맨 오른쪽)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이스라엘공영방송 녹화 테이프 갈무리,위키미디어 코먼스
1961년 4월 한나 아렌트(뒷줄 맨 오른쪽)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이스라엘공영방송 녹화 테이프 갈무리,위키미디어 코먼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미국에 망명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1906년생 동갑내기인 아이히만의 재판 참관기를 미국 잡지‘뉴요커’에 연재했다.아렌트는 대량학살자 아이히만이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을 변론하는 것에 충격을 받고 그 이유를 곱씹었다.이른바‘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개념이 그렇게 탄생했다.악마적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명령만 따를 경우 누구라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논리다.아렌트는 연재 기사들을 바탕으로 1963년‘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함에 대한 보고서’란 책을 출간했다.영어 단어‘Banality’는‘평범함,따분함,시시함’이란 뜻이다.

앞서 1960년 6월 아렌트는 절친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이히만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니 나치 범죄를 이해하는 데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다”며 “나는 유혹에 빠졌다”고 털어놨다‘악의 평범성’은 지금까지도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관용구로 곧잘 인용되지만,아이히만의 범죄 동기를 과소평가하거나 오인하고 피해자들을 모욕한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l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이동기·이재규 옮김,글항아리,4만8000원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l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동행복권 파워볼 중계이동기·이재규 옮김,글항아리,4만8000원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가 쓴‘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2011)은 아렌트가 꼭 50년 전 주장했던‘악의 평범성’논리를 정면 반박하고‘대량 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책의 부제)을 드러내 아이히만의 악행과 간교함을 폭로한 책이다.슈탕네트는 “아렌트의 책이 처음 출간됐을 때 많은 독일인은‘악의 평범성’이란 용어가 책임을 은폐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다”며 “아렌트가 너무 성급하고 무엇보다 위험”했다고 지적한다.실제 아렌트는 문제적 저서에 “아이히만의 행동은 정신 나간 유대인 혐오 사례가 분명히 아니며,광신적 반유대주의 또는 세뇌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며 “적어도 그를 진단하고 난 뒤의 (혼란에 빠진) 나보다도 더 정상적이었다”고 썼다.

아이히만,그리고 아렌트의‘악의 평범성’에 대한 새로운 평가는 아렌트의 저술 이후 수십 년간 수집된 자료와 선행 연구 덕분에 가능했다.그리고 “무엇보다 아이히만 스스로 열심히 말하고 다니며 글을 썼기 때문”이다.아이히만과 관련된 문서와 기록,진술서는 히틀러나 괴벨스를 포함한 나치 전범들 모두의 것보다 더 많다.슈탕네트는 곳곳에 흩어진 그 많은 기록을 샅샅이 검토해 악의 평범함 뒤에 숨은 반인륜적 범죄자의 민낯을 드러내 보인다.끈질긴 탐사 저널리즘,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학술 논증,흥미롭고 유려한 글쓰기가 어우러진 성과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실무 지휘한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1942년 무렵 사진(왼쪽).1950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 은신처로 숨어들 당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만든 위조 여권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실무 지휘한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1942년 무렵 사진(왼쪽).1950년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 은신처로 숨어들 당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만든 위조 여권.위키미디어 코먼스
아이히만은 독일 패전 뒤 전쟁포로로 잠깐 심문을 받던 중 탈출해,독일 북부 산간 마을에서 오토 헤닝거라는 인물로 버젓이 전원생활을 즐겼다.이어 1950년 6월‘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이름의 위조 신분증을 이용해 아르헨티나로 숨어들었다.2년 뒤에는 아내와 아들 삼형제까지 합류했다.아이히만은 이스라엘로 붙잡혀 온 뒤 쓴 자술서‘나의 도주’에 아르헨티나를 은신처로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남아메리카의 이‘약속의 땅’에서 몇몇 좋은 친구가 저를 돕기 위해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들에게 저는 편히,자유롭고 떳떳하게 제가 친위대 중령 아이히만이란 걸 말할 수 있었다.”

‘좋은 친구들’이란 체포와 처벌을 피해 은신한 나치 잔당들이었다.그중에는 학살극을 주도한 친위대(SS) 최고 책임자 하인리히 힘러의 참모장,네덜란드 출신의 나치 부역자이자 친위대 언론인단 대원 빌럼 사선도 있었다.사선은 아르헨티나에서 나치 잔당들의 대필 작가이자 선동가로,토론 모임을 조직하고 녹음과 타이핑으로 기록을 남겼다‘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은 낮에는 토끼 사육사로 일하고,일과 후에는 바이올린 연주와 와인을 즐겼으며,저녁 시간에는 독서와 집필에 미친 듯 몰두했다.사선이 매주 아이히만과‘좋은 친구들’을 초대해 “독일과 세계의 발전을 두고” 의견을 나눈 자리는 학술 세미나처럼 진지했다.모두 나치의 우월성과 최종해결(대량학살)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새 시대의 전망을 더듬는 내용이었는데,젠토토 선발투수아이히만은 자신의 활약상을 자랑스레 떠벌였다.1957년 4월부터 10월까지 사선이 녹음한 것만 25시간 분량,녹취록은 1300쪽에 이른다.

폴란드 오시비엥침(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에 있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안쪽에서 출입문을 바라본 모습.유대인들은 열차의 화물칸에 빼곡히 실려 이 수용소로 수송됐다.조일준 선임기자
폴란드 오시비엥침(독일어로는 아우슈비츠)에 있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안쪽에서 출입문을 바라본 모습.유대인들은 열차의 화물칸에 빼곡히 실려 이 수용소로 수송됐다.조일준 선임기자
오늘날 아이히만의 아르헨티나 문서들은 3개의 문서고에 나뉘어 있다.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의 집필 생산성은 놀랄 만한 수준(…),그 원고들을 죽 늘어놓는다면 250킬로미터의 장애물 경주 트랙이 만들어진다”고 썼다.아이히만은 은신 망명지에서도 그만의 전쟁을 수행하며 과시욕에 사로잡혔는데,지은이의 말마따나 “빛을 쫓으면 눈에 띄”는 법이다.나치 전범을 추적하던 이스라엘 정보기관의 촉수에 포착됐을 뿐 아니라,그가 남긴 방대한 기록 중 예루살렘 재판 당시 확인된 일부는 고스란히 그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됐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생각 없는 성실한 관료’로 위장했지만,실상은 마지막 순간까지 나치즘을 신봉한 확신범이자 노련한 자기변호인이었다.그는 이마누엘 칸트의 도덕철학으로 자신을 정당화해 재판부와 방청객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나는 항상 칸트 철학의 애호가였으며,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려 노력했다”는 것이다.칸트의 정언명령은‘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도덕법칙이다.

아이히만에게 재판은 자신과 세상을 감쪽같이 속인 가면극이자 냉소적인 기만극이었다.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쓴‘다른 이들이 말했고,이제 내가 말할 차례다’(1956년)라는 저술에서‘책임’문제를 언급했다.“나는 법 앞에서,내 양심 앞에서 죄가 없다고 생각하며,내 부하들도 그렇다.우리는 모두 제국중앙보안청이라는 기계의 작은 톱니였고,전쟁 중에는 전쟁이라는 살인 모터의 거대한 동력 전달 장치의 작은 톱니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도덕’에 대해서도 도발적인 자문자답을 내놨다.“기독교 도덕,윤리적 가치의 도덕,전쟁의 도덕,전투의 도덕 등 여러 도덕이 있다.어떤 것일까?(…) 소크라테스도 사형 선고를 받아들이며 법과 질서를 따르지 않았던가?소크라테스의 지혜는 국법에 굴복한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색출과 체포,수용소 수송 업무를 하던 나치독일의 옛 제국중앙정보청 유대인 사무국 건물(현재는 호텔로 사용중) 앞 버스정류장에 홀로코스트 추념 게시판이 설치돼 있다.위키미디어 코먼스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색출과 체포,수용소 수송 업무를 하던 나치독일의 옛 제국중앙정보청 유대인 사무국 건물(현재는 호텔로 사용중) 앞 버스정류장에 홀로코스트 추념 게시판이 설치돼 있다.위키미디어 코먼스
아이히만이 탐욕을 부린 것은 부나 사치가 아니라 사망자 숫자였다.1957년 9월께 열린‘원탁 모임’에서 그는 “우리가 1030만명의 유대인 중에서 (600만명이 아니라) 1030만명을 죽였다면 나는 만족스러워할 것이고(…) 우리 피와 민족에 대한,또 민족들의 자유에 대한 우리 의무를 완수한 것일 겁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것이 나의 동기임을 이해해야 합니다”라고 큰소리쳤다.

슈탕네트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악의 평범성 테제가 크게 성공한 이유는 오용되기 쉬웠기 때문”이라고 짚었다.앞서 원저 서문에선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보러 예루살렘으로 출발하기 전에 절친에게 남겼던 말을 인용하며‘미지의 것에 끌리는 유혹’을 경계하라고 말한다.“흥미로울 것 같아.끔찍하리라는 사실을 뺀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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