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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리버만‘자화상,1925독일 베를린에 가면 한 번쯤 가보는 명소가 있습니다.바로 브란덴부르크 문 광장입니다.집이 브란덴부르크 문 바로 옆이라면 소위‘금수저’라고 할 수 있겠죠.우리나라로 치면 광화문 바로 옆에 집이 있는 셈이니까요.
독일의 화가 막스 리버만의 집이 바로 이곳에 있었습니다.리버만은 독일 인상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립니다.
인상주의 화풍을 도입한 그는 에두아르 마네,에드가 드가 등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했습니다.리버만은 독일의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회장을 지내며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미술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유대인이던 리버만은 한순간에 몰락했습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그는 예술 아카데미 회장직에서 강제로 사임해야 했습니다.그의 작품은 전시가 금지됐고‘퇴폐미술’로 낙인찍혔습니다.
노동자를 그렸더니 생긴 별명‘추의 사도’
리버만은 1847년 베를린에서 부유한 유대인 직물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리버만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이어가기를 바랐지만 리버만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어두운 방에서 여성들이 거위를 잡고 깃털을 뽑고 있습니다.거위들은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을 치고 있고,여성들은 굳은 표정으로 일을 이어갑니다.실내는 건초와 깃털이 흩어져 있어 지저분합니다.
이 그림은 관객들에게 충격과 당혹스러움을 안겼습니다.당시 독일에선 아카데미 미술이 이상적인 화풍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역사,종교 등 전통적인 주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이 기준에서 리버만의 그림은 아름답지 않았고,소재가 가치 있지도 않았습니다.리버만은‘추악함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873년 리버만은 프랑스 바르비종에 갔는데요,홈 카지노 슬롯이곳에서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장 프랑수아 밀레를 만나게 됐죠.
밀레의 영향을 받은 리버만은 1874년 파리에서 학업을 이어가면서 시골 농민과 도시의 노동자를 주제로 한 작품을 더욱 많이 그렸습니다.

리버만은 여인의 뒷모습을 통해 삶의 고단함을 보여줬습니다.동시에 농민들의 인내와 강인함을 표현했습니다.



리버만은 육체노동자를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로 묘사했습니다.일각에선 리버만이 산업화 속 소외된 노동자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했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리버만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유대인으로 차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당시 독일에서 유대인은 2등 시민으로 여겨졌습니다.
네덜란드의 보육원과 요양원
리버만은 1875년부터 여름마다 네덜란드를 방문했는데요.이곳에서 그는 보육원과 요양원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독일적인 인상주의 그림
1890년대에 접어들며 리버만은 자신의 스타일과 주제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색채는 한층 밝아졌고,중산층의 여가 생활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인상주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빛과 대기,색의 표현에 더욱 신경을 썼습니다.



1890년대 독일 미술계는 전통적 회화를 중시하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인상주의,사실주의,표현주의 등 새로운 미술사조는 공식 전시회에 참여할 수 없었죠.
이에 반발한 예술가들은 1898년 베를린 분리파를 창립했습니다.리버만은 베를린 분리파의 공동 설립자이자 초기 회장을 맡았습니다.
베를린 분리파는 젊고 실험적인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화풍을 포용했습니다.매년 자체 전시회를 개최해 새로운 예술가들에게 작품 발표 기회를 제공했죠.또 빈센트 반 고흐,마네,클로드 모네 등의 작품을 독일에 소개했습니다.
1894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재산을 상속받은 리버만은 프랑스 인상주의 회화 수집도 본격화했습니다.마네,드가,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작품이 포함됐습니다.모네,카미유 피사로,알프레드 시슬리,폴 세잔,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등의 그림도 소장했죠.
리버만은 베를린 분리파의 영향력을 확장하면서도 주류 예술계와도 관계를 유지했습니다.그리고 1920년부터 1932년까지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회장을 지냈습니다.
자신의 정원을 가꾼 리버만



200여명의 초상화를 그리다




나치의 탄압 속 그린 자화상
나치즘이 득세하면서 리버만의 말년은 평화롭지 못했습니다.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자 독일 역사에도,리버만의 삶에도 어둠이 드리워졌습니다.그해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본격화했습니다.나치는 유대인 상점과 사업체에 대한 전국적인 보이콧을 조직적으로 시작했습니다.이때 리버만은 “더 이상 이 나라에 살고 싶지 않다”고 토로하기도 했죠.
공직에서 유대인을 배제하는 반유대주의 법안도 시행됐습니다.리버만은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 회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했습니다.그의 작품은 박물관에서 철거됐고,개인 수집가들도 리버만의 작품을 압수당했습니다.
외부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리버만은 반제 빌라에 머물며 정원,가족 초상화,자화상 등을 그렸습니다.특히 자신을 모델로 삼은 그림을 많이 그렸죠.

그럼에도 리버만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습니다.붓을 든 모습으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표현했죠.

리버만은 1935년 2월 8일 사망했습니다.독일 미술계의 거물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나치의 통제로 인해 언론에 거의 언급되지 않았습니다.장례식은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의 감시하에 진행됐습니다.장례식에 참석해 그를 추모한 비유대인은 케테 콜비츠 등 소수에 불과했습니다.(케테 콜비츠에 대한 소개는‘나를 그린 화가들’4회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남은 가족에겐 비극이 이어졌습니다.3년 후 리버만의 딸은 반유대주의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했습니다.하지만 부인 마르타는 베를린에 남았습니다.1943년 강제수용소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 마르타는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예술의 다양성과 자유를 옹호했습니다.그림 양식이나 주제를 이유로 화가들이 배제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그는 자신의 신념에 대해 기꺼이 목소리를 냈습니다.
애석하게도 리버만이 지지했던 자유와 관용은 그가 살던 시대에 지켜지지 못했습니다.이번 주말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이해를 보여준 리버만의 그림을 보며 진정한 자유와 포용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참고문헌>
-Mitchell B.Frank(2020),Max Liebermann: Assimilation and Belonging,토토 조작RACAR
-Gilbert,Barbara C.(2005),Max Liebermann : from realism to impressionism,Skirball Cultural Center
[나를 그린 화가들]은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탐구하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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