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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남한 단독 선거를 향한
UN 한국위 막후 로비전
1947년 11월 14일 유엔 감독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한 유엔총회 결의에 따라 9국 대표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하 위원단)이 구성되었다.이듬해 1월 8일 호주·프랑스·시리아·인도 대표와 수행원 등 위원단 1진 30여 명이 입국했다.이들을 맞기 위해 김포공항에는 하지 사령관,딘 군정장관,안재홍 민정장관,김규식 입법의장 등 군정청 요인과 이승만·김성수·이청천·조병옥 등 환영위원회 위원이 총출동했다.여성계 대표 고황경·모윤숙 등이 각국 대표에게 환영 화환을 증정했다.11일 캐나다,12일 프랑스·필리핀,29일 엘살바도르 대표가 입국했다.하지만 “유엔은 한국 문제에 관할권이 없다”는 소련의 입장을 지지한 우크라이나가 끝까지 참여를 거부하는 바람에 위원단은 8국으로 축소되었다.
위원단은 12일 덕수궁에서 첫 회의를 개최하고 인도 대표 메논을 임시 의장으로 선출했다.메논은 마지막으로 엘살바도르 대표가 입국한 이후 열린 전체회의에서 정식 의장으로 선출되었다.옥스퍼드 대학에서 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메논은 태평양전쟁 기간 중국 주재 인도 대사를 역임했고,종전 후에는 유엔총회 인도 대표로 활약했다.
메논은 남북한 주둔군 사령관들에게 위원단 업무와 관련한 협의를 요청했다.예상했던 것처럼,남한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는 위원단의 활동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협조하겠다고 약속했지만,북한 주둔 소련군 사령관 코르트코프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대신 유엔 소련 대표 그로미코가 유엔 사무총장에게 거부 의사를 밝힌 서한을 보냈다.
북한에서 선거 감시 활동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위원단은 남한 각계 지도자 16명을 선정해 의견을 물었다.이승만·김규식·김구가 상반된 견해를 피력했다.이승만은 통일정부 수립이 어려우면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한 후 그 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그에 반해 김규식은 소련의 방해로 위원단의 북한 입경이 불가능하면 남북 지도자 회담을 통해서 북한을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구는 먼저 미소 양군이 철수하고 그후 남북이 자율적으로 협의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석 달 전 폐기된 소련의 입장을 들고나왔다.불과 한 달 전 김구 자신이 맹비난하던 바로 그 방안이었다.김구는 더 나아가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구차하게 일신의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위원단은 격론을 벌인 끝에 유엔소총회에 보고하고 향후 활동 지침을 받아서 활동을 재개하기로 했다.메논 의장과 후스쩌 사무총장을 유엔으로 파견하기로 하고,메논 의장에게 유엔소총회에서 위원회의 입장을 설명할 전권을 부여했다.인도는 미소 양 진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중립 노선을 추구하는 비동맹 국가였다.“미국 주도의 남한 단독 선거 반대”는 본국 인도의 훈령이었을 뿐만 아니라 메논 자신의 견해이기도 했다.유엔소총회에서 남한 단독 선거를 승인받으려면 이승만으로서는 2월 13일 메논이 출국하기 전 어떻게든 메논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메논을 향한 로비에 대해서는 모윤숙의 자서전‘회상의 창가에서’(1968)에 상세히 기술돼 있다.남북 협상을 주장하는 김구와 김규식은 하지 사령관을 통해 메논을 설득했다.남한 단독 총선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입장을 지지하는 조병옥과 장택상은 하지와 메논의 접촉을 줄이겠노라며 요정으로 메논을 초청해 매일같이 기생 파티를 열었다.하지만 메논이 기생 파티를 좋아하지 않아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메논은 기생 파티보다는 위원단 환영 파티에서 만나 타고르와 나이두의 시,한국의 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하며 서로 마음이 통한 모윤숙과 함께하는 시간을 더 좋아했다.모윤숙은 1910년 원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고 기자·교사·시인으로 활약했다.해방 후 초대 문교부 장관에 오르는 보성전문학교 교수 안호상과 1934년 결혼해 딸 일선을 낳았지만 1947년 이혼했다.일제 말기에는 여성 대표로 조선문인보국회,임전보국단 부인대 등 각종 친일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한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메논은 매일 덕수궁 회의에 나가기 전 커다란 관용차를 모윤숙의 집 앞에 세워 놓고 문간방에서 놀고 있는 모윤숙의 딸 일선이를 껴안고 볼에다 굿모닝 키스를 했다.저녁에는 비서를 시켜 초콜릿과 과자를 보내 주었다.동네에서는 이들을 이상한 눈초리로 보고 수군거렸다.그래도 모윤숙은 메논이 하지와의 저녁 식사를 취소하고 이승만과 하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고,출국을 앞둔 메논을 한밤중에 불러내 이승만 지지자들이 서명한 두루마리를 건네주기도 했다.메논이 뉴욕에 머무는 동안에는 이승만이 써준 전보를 10통 이상 보냈다.그때마다 메논은 꼬박꼬박 답장했다.
뉴욕으로 떠난 메논은 2월 19일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사정을 설명하는 연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다.“유엔은 빈손으로 한국을 떠날 수 없습니다.위원단은 남한에 수립될 정부가 총회의 결의에서 규정된 것과 같은 중앙정부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합니다.남한에서라도 선거를 실행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유리합니다.”
이승만의 단독 총선을 지지하는 메논의 연설은 비동맹을 추구하던 인도 정부의 훈령은 물론 한국 출국 전 메논 자신의 생각과도 달랐다.메논의 지지 덕분에 2월 26일 유엔소총회는 미국이 제안한‘감시 가능한 지역 선거 안’을 찬성 33,반대 2,기권 11로 통과시켰다.이로써 유엔 감시 아래 총선거를 통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훗날 인도 외교부 장관과 소련 주재 대사를 역임하고 은퇴한 메논은 회고록에서 남한 단독 선거로 입장이 바뀌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모윤숙은 시인이자 애국자였다.그녀에게 남한 총선거 지지는 애국이었고,반대는 반역이었다.모윤숙은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었고,심지어 나를‘한국의 구세주’라고 부르는 몇 편의 시도 읽어주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내 나라 인도가 유엔 결의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찢어질 것이었다.또한 내가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었다.그래서 나는 일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이것은 어쩌면 내 공직 생활 가운데 내 심장이 내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나는 내 결정이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메논‘많은 세계들,1965) 메논을 향한 모윤숙의 로비는 국적이 다른 남녀 사이의‘우정’이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뒤바꾼 보기 드문 사례였다.
<참고 문헌>
모윤숙‘회상의 창가에서,중앙출판공사,1968
박명수‘1948년 유엔소총회의 남한 총선거 결의와 그 의의,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43-1호,2021
류석춘‘이승만 시간을 달린 지도자 2,북앤피플,새콤 토토2024
양동안‘대한민국 건국전후사 바로알기,대추나무,2019
이민영‘반공 국민의 회고담과 민족주의적 주체 구성의 자기 서사,한국근대문학회 제44호,내기 정글 프로모션 코드2021
최종고‘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기파랑,구글 미니게임 할로윈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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