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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이 지난 1월29일 미 의회에서 열린 인준 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미국의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이 지난 1월29일 미 의회에서 열린 인준 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이 한국 기업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미 투자를 독려하며 10억달러(약 1조4000억원)라는 기준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도널드 트럼프 정부의‘관세폭탄’과 반도체지원법·인플레이션감축법(IRA) 축소 예고 등 악재 속에서‘대미 투자 기준’까지 받아든 재계의 심경은 복잡하다.특히 대미 수출 주력 품목인 자동차·배터리·반도체·철강 업계는 미 통상 사령탑의 언급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처지다.

24일 재계에 따르면 러트닉 장관은 지난 21일(현지시간) 취임 선서식에 앞서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이 이끄는 경제 사절단을 만났다.이 자리에서 러트닉 장관은 대미 투자를 요청하며 1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면 전담 직원을 배치해 투자 심사를 간소화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40분간 진행된 이날 면담에는 최 회장을 비롯해 김원경 삼성전자 사장,유정준 SK온 부회장,판도라토토성김 현대자동차 사장,윤창렬 LG글로벌 전략개발원장,조석 HD현대 부회장,주영준 한화퓨처프루프 사장,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계인 포스코인터내셔널 사장 등이 참석했다.

러트닉 장관의‘10억달러’라는 구체적 투자액 언급은 한 기업인이 수천만달러의 대미 투자계획을 소개하자 나온 것으로 전해졌다.맥락상‘그것보다 훨씬 더 원한다’는 뜻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4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노골적으로 금액까지 언급할 줄은 몰랐지만 (투자 요구는) 이미 다들 예상했던 것”이라며 “미국에 내놓을 답에 대해 준비들을 하고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반도체·배터리 업계의 경우 반도체지원법과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른 보조금을 생각하고 이미 대규모 대미 투자를 진행한 터라 추가 투자가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다.SK하이닉스는 지난해 38억7000만달러를 투자해 인디애나주에서 반도체 패키징 생산기지를 설립하고 있다.조 바이든 정부 시절 SK가 약속한 대미 투자액은 300억달러(반도체·그린에너지 등)에 이른다.삼성전자 역시 텍사스주 테일러에 370억달러를 투자해 첨단 반도체 생태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배터리 기업 LG에너지솔루션도 애리조나 단독공장(50억달러 투자)을 비롯해 4개의 생산시설을 짓고 있다.그러나 이들 기업이 향후 예상한 만큼의 보조금을 계속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트럼프 정부가 반도체지원법·인플레이션감축법의 폐기를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런 상황에서‘관세 폭탄’등을 피하기 위해 무작정 추가 투자에 나서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

최태원 회장의 “(투자는) 인센티브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발언은 이런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최 회장은 2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샐러맨더호텔에서 열린 최종현학술재단 주최 트랜스퍼시픽다이얼로그(TPD) 행사에서 대미 투자 계획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 정부가 원하는 것은 많은 외국인직접투자(FDI)를 통한 생산시설 확충”이라며 “저희는 인센티브가 있어야 (투자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인센티브가 감세 등 정책적 지원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에 최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세금을 내리겠다 등의 얘기가 있었는데 아직은 구체적으로 나온 게 없다.투자 계획에 반영하려면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미 수출 비중이 50%가 넘는 자동차 업계도 고민스럽다는 반응이다.신규 투자를 하더라도 미국이 어떤 혜택을 제공하는지 아직 분명한 게 없어 섣불리 투자 규모를 결정할 수 없고,그렇다고 뒷짐만 지고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현대차그룹은 일단 미국에서 완성차 소재 및 부품,베트맨 토토 디시미래 모빌리티 분야를 포함해 지속적인 투자를 이어간다는 방침이다.제너럴모터스(GM) 등 미국 기업들과의 협력도 강화할 예정이다.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준공을 앞둔 조지아주 신공장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건설을 위해 배터리사 포함,파트너사들과 이미 126억달러를 투입하는 등 미국에 그동안 큰 투자를 해왔다는 사실도 미국 정부에 계속해서 강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당장 다음달 12일부터‘25% 관세’를 물게 된 철강업계는 그간의 대미 투자 계획을 더욱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현대제철은 10조원대 대미 투자(신규 제철소 건설)를 검토하고 있고,포스코도 미국 현지에서 상공정(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것) 관련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세아그룹은 그간 대미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왔다.텍사스주 템플시에 1억1000만달러를 투자해 특수합금 공장을,휴스턴에선 1억달러를 들여 고강도 강관 공장을 인수해 생산기지를 짓고 있다.

미국의 관세 정책과 관련한 한국 정부의 분명한 입장과 대응 전략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도 기업들로서는 고민스러운 대목이다.재계 한 관계자는 “기업들의 재무 사정,미국 시장 중요도 등에 따라 대응이 다를 것으로 보이는데 각 기업별 이해를 파악하고 종합적인 방안을 짜야 할 것 같다”면서 “탄핵 정국이라 협상력이 있는 패키지를 만들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재계에선 러트닉 장관의 발언의‘과대 해석’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왔다.향후 협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경제사절단 측에 확인을 해보니 압박성이 아니었고 패스트트랙 정책을 안내하고 홍보한 것에 가까웠다”면서 “상대의 발언을 자극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향후 협상에 부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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