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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류학자 서보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지난 24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최근 출간된 <돌봄이 이끄는 자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서성일 선임기자

한국 임상의학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된다.하지만 2022년 기준 공공 의료기관 보유 병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8.8%에 불과하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중 최하위다.쏠림 현상도 심각하다.2022년 8월말 기준 전국 226개 기초자치단체 중 소아청소년과와 산부인과가 모두 없는 곳이 16곳에 달한다.지난해부터는 정부와 의료계 대립으로 인한‘의료대란’으로 환자들이‘응급실 뺑뺑이’를 돌다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사건들도 발생하고 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한 태국은 어떨까.2021년 기준 태국 전체 병상의 80%는 공공 병원에 속한다.공공 병원은 전국민 건강보험에 가입한 사람이 본인부담금이 거의 없는 수준으로 이용할 수 있다.한국과 달리 영리병원을 허용하는 데다 1932년 입헌군주제 도입 이래 21번이나 쿠데타가 일어난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공공 의료 체계를 만들었을까.

의료인류학자인 서보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이 같은 의문을 품고 2010~2012년까지 2년간 태국에서 집중적인 현장연구를 수행했다.최근 출간된 <돌봄이 이끄는 자리>는 태국 치앙마이주 치앙마이 교외 공공 병원‘반팻’을 배경으로 삼아 태국 공공 의료 체계를‘돌봄’의 프리즘으로 들여다보는 책이다.

지난 24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서 교수는 “사회보장의 전 세계적인 지형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영천경마공원 조성사업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아질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태국은 매우 중요한 나라”라면서 “태국은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 속에서 전국민 의료보험 가입률을 100% 가깝게 올리고 본인부담금이 없는 보편적 건강보험 체계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태국 정치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돌봄을 제공하는 것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이다.2001년 선거에서 농촌 지역에서의 높은 지지에 힘입어 승리한 탁신 친나왓의 타이락타이당은 2002년‘30밧(약 1000원)만 내면 되는’보편적 건강보험 정책을 시행했다.2006년 쿠데타로 탁신 정권을 축출한 군부정권은 탁신의 공공 의료 정책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환자부담금 30밧마저 없애버렸다.서 교수는 “태국에서는 전통적인 왕실 중심의 후견주의적 권력과 선거에서 이기는 게 중요해진 새 정치 세력이 의료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고,이것이 공공 의료 확대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했다.

반팻 병원 같은 지역 공공 병원은 태국 공공 의료의 최전선이다.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 공공 병원은 도시의 민간 병원에 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이주민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의료기관이다.서 교수는 태국에서 지역 공공 병원은 단순한 의료기관이 아니라 “각종 시련과 빈곤,추방과 같은 악조건에서도 삶을 가능하게 하는” 돌봄의 회로망을 이룬다고 밝혔다.“특정한 전문기술을 사용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의료라면,돌봄은 “자신과 타자,도박 영애공동체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몸과 마음을 쓰는 실천”이라는 것이다.이는 미얀마 출신 미등록 이주노동자 환자들을 대하는 반팻 병원 의료진의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이들은 환자의‘자격’을 따지지 않는다.“정부 병원은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진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신념이다.

2011년 홍준표 당시 경남지사는 공공 병원인 진주의료원을 재정적자를 이유로 폐쇄시켰지만,반팻 병원은 적자를 아랑곳하지 않는다.“태국 공공 병원에서도 적자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예요.그러나 그것이 병원을 폐업시킬 정도의 문제는 아닙니다.태국 공공 병원은 해당 지역 인구 숫자에 따라 재정을 지원받고,어떻게 운영할지는 상당 부분 병원 재량에 맡겨져 있어요.해마다 어느 정도 예산이 들어올지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그에 맞춰 병원의 살림을 해나가면 됩니다.진료 행위 하나하나에 대해 가격이 책정되는 한국의 행위별 수가제에서는 이런 식으로 사고하기가 어렵죠.”

태국 공공 의료가 완벽하지는 않다.영리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이들을 제외한 90%의 태국인들은 공공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긴 대기 시간을 견뎌야 한다.거주지로 등록한 지역의 거점 병원에 가야만 보편적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어 병원 선택의 자유도 제한적이다.복잡하고 어려운 치료에 대한 추가 보상이 없는 구조여서 책임감 약한 의사들의 과소 진료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태국 사례는 의료대란을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서 교수는 “우리는 선택할 권리,경쟁할 권리의 공정성을 가장 중시하지만 문제는 이런 종류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건강할 권리가 크게 증진되지 않는다는 것”이라면서 “훨씬 더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형태의 공정성을 상상하는 데 태국 사례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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