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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나의 겨울과 2025년 아이들의 겨울은 이렇게나 같고 다르다【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중학생 시절,김포 토토산악회겨울마다 무주 스키장에 간다는 친구가 있었다.스키 장비를 챙겨 아침 일찍 황금동 어린이 회관 앞에서 스키장으로 가는 스키장 셔틀버스를 타고 세 시간 가까이 달려 무주에 가면 설산이 나온다고 했다.
어린 내게 당시 무주는 전라도와 경상도,충청도의 경계에 있는 너무 먼 곳이었다.산신령이 살거나 선녀가 내려와 목욕할 것만 같은 신비로운 곳.친구는 스키를 타러 간다고 했지만,닿을 수 없는 곳처럼 느껴졌다.추운 겨울 새벽에 나가 하루 종일 밖에서 스키를 타면 춥지 않으냐고 친구에게 물었다.친구는 스키를 타고 설산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도 즐겁고,곤돌라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는 것도 재밌다고 했다.
나는 9시 저녁 뉴스에서 처음 '스키'를 알았다.겨울마다 강원도로 스키를 타러 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선글라스보다 커다란 안경을 쓰고 형형색색의 스키 옷을 입고 설산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내 엄지발가락이 서늘해졌다.설경은 어여뻤지만,TV 안에서 추위가 타고 넘어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도시에서 자랐다.초,중,고 12년 동안 딱 하루 학교를 가지 못할 정도로 눈이 내려 학교가 문을 닫았다.지금 생각해 보면 눈이 엄청 많이 왔다기보다 도시가 가진 제설 장비로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로 눈이 왔었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다.
취직을 해 올라온 서울에서 꽤 자주 눈을 만났다.눈이 펑펑 쏟아지면 골목 어귀에서 작은 눈사람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시였다.눈이 오면 마을버스 기사는 가장 언덕에 위치한 우리 동네까지 올라갈 수 없다며 걸어가라며 내리라고 했다.눈이 그치고 며칠이 지나면 연탄재라도 뒤집어쓴 듯 도시는 시꺼멨다.눈은 내 상상만큼 근사하지 않았다.
9시 뉴스에서 처음 들은 그 단어.책이 전부였던 내 겨울방학
취직하고 돈을 벌어도 스키를 타러 가지 않았다.가자는 이도 없었고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결혼하고서야 비로소 스키장이란 곳을 갔다.스키 부츠 안에서 얼어버린 듯한 발가락 때문에 고통스러웠고,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건 무서웠고,다른 사람과 부딪히거나 심각하게 다칠 정도로 넘어질까 두려웠다.하지만 그때야 제대로 만난 설산은 눈물 나게 아름다웠다.
1990년대에 초중고를 다닌 사람 중,겨울이면 스키장을 가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내 주변에서 스키장을 가는 사람은 중학교 때 그 친구가 유일했다.내 부모에게 스키라는 스포츠는 생소했고,스키장에 갈만한 금전적 여력도 없었다.
눈도 오지 않고,살을 에는 듯한 바람 탓에 춥기만 추웠던 긴긴 겨울 방학 때 어린 나는 뭘 했었는지 떠올려본다.학기 중에 못다 풀었던 문제집을 끄집어내어 굳이 다 풀었다.방학이 시작되면 학교에서 나눠주는 '탐구생활'을 알뜰히 챙겼고,방학 숙제 리스트에 줄을 그어 가며 글짓기,가수 슈 도박그림 그리기,만들기 등의 과제를 빠짐없이 했다.스키 배우기 같은 숙제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가장 즐거운 시간은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으며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같은 건물 3층에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아이가 살았는데 그 집 거실 한쪽 벽은 책으로 꽉 차 있었다.3층 아줌마는 언제나 나의 방문을 환영했다.내가 온종일 그 집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어도 집에 가라는 말 대신 책을 읽는 나를 칭찬하고 책을 읽지 않는 자신의 아이들을 타박했다.
우리 집에는 오래전 엄마가 사준 백과사전 한 세트가 있었는데,내가 너무 자주 펼쳐들고 읽어서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정도였다.그땐 대부분의 어린이 책을 전집으로만 판매했을 때였다.엄마 아빠는 책으로 한쪽 벽면을 채울 만큼 경제적 여유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아침마다 배달받아 보던 신문 한 부와 월간 학습지였다.신문과 학습지에는 읽을거리가 잔뜩 있어 한자 한자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배가 부를 정도였다.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엄마와 똑같은 자세로 아빠 다리를 하고 거실에 앉아 만화책이라도 들여다보듯 문화,사회면을 읽었다.
겨우내 놀이터 기구들은 차가운 고철 덩어리였기에 차가워서 손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좋아하는 자전거를 타는 것도,줄넘기하는 것도 추워서 하기 싫었다.유일한 놀이터는 엄마와 동생들과 일주일에 한 번 가는 목욕탕이었다.
냉탕에서 바가지를 뒤집어 잡고 물장구를 치다 동네 할머니한테 한 소리를 들어도,때를 밀기 위해 고통스럽게 온탕에 몸을 담그고 있어도,실컷 물장구치고 요구르트 하나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붕어빵도 사 먹을 수 있어 동네 목욕탕은 즐거운 놀이터였다.
학교에서 방학 동안 책 좋아하는 아이들을 모아 독서 반을 꾸려주면 더없이 즐거운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학교 교실은 따뜻하진 않았지만,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책을 읽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소중했다.
멀기만 했던 스키,블록 체인 dag내 아이들이 배우게 되다니
그렇게 먼 이야기 같았던 겨울의 스키장이,이제 시간이 흘러 내 아이들에게 현실이 되었다.어쩌다 보니 나는 한 해의 절반이 겨울인 미국 동부에서 세 번의 겨울을 보내고 있다.
겨울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변하고 있다.날이 좋은 6개월은 밖에 나가 놀고,추운 6개월은 실내에서만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올겨울처럼 눈이 자주 온다면,눈밭에서 즐길 수 있는 스포츠를 하나쯤 배워두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전라북도 무주처럼 겨우내 눈이 쌓여 있는 동네니까.
그리하여 아이들의 일주일 겨울 방학 동안 아이들을 스키 학교에 등록했고,나흘 동안 설산에서 스키를 배우는 아이들 모습을 지켜봤다.스키 학교에 가는 날들은 체감온도가 영하 17도로 2월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하루 종일 밖에서 스키 부츠를 신고 눈 위에서 허우적댔을 아이들이 스키 수업에 가기 싫다고 할까 봐 마음을 졸였다.
수업을 마치고 부츠를 벗으며 아이들은 종아리와 허벅지가 아프다고 약간 징징거렸지만,수업에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스키를 제대로 타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수업 시간에 무엇을 어떻게 배우는지는 잘 모르지만 가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이 정도면 괜찮다는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나흘간 진행되는 스키 학교 참가비는 백만 원 수준이다.누군가에게는 크지 않은 돈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상당한 출혈이다.
아이들 방학이 되면 뭐라도 하나 더 보여주고 싶고,뭐라도 하나 더 가르쳐주고 싶다.무료 활동이나 전시,공연 등을 살뜰히 찾아다니지만 뭔가 제대로 배우려면 결국 다 돈이다.돈이 있어야 좋은 환경에서 좋은 강사를 만나 제대로 안전하게 배울 수 있다.
양육자로 십 년을 살며 문득 삼십 년 전 나의 부모를 떠올리게 된다.없는 살림이어서 평소에는 학원에 못 보내줬지만,부모님은 딸인 나를 여름 특강 수영 교실에 두어 번 보내줬다.그 덕분에 어디 가서 수영은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
3층 아줌마처럼 전집으로 거실 한쪽 벽을 채워주진 않았지만,아빠는 퇴근길에 사무실 근처 중고 책방을 들러 <독일인의 사랑>,<작은 아씨들> 같은 고전을 사다 줬다.대학 입시를 앞둔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동네 수학 단과반 수업을 끊어줬다.IMF가 터져 아빠는 수개월째 일거리가 없어 전전긍긍할 때였음에도.
나의 부모는 <마틸다>에 나오는 마틸다의 부모처럼 학교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며 아이를 방치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나에게 어떤 식으로 공부하고,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그저 읽고 배우는 게 좋다는 나를 늘 바라봤다.종종 생각한다.만약 어렸을 때,그보다 더 많은 교육 혜택을 받았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까?
스키 학교의 마지막 날,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꼭 해주고 싶은 말을 꺼냈다.
"겨울이라고 세상 아이들이 전부 스키를 배울 수 있는 건 아니야.어떤 아이들은 내가 어렸을 때처럼 눈을 만나기 힘든 곳에 살아서 스키장에 못 가기도 해.그리고 스키 수업이 너무 비싸서 배울 수 없는 친구들도 있어.
엄마가 하고 싶은 말은,이렇게 스키를 배우는 건 정말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라는 거야.엄마는 너희가 진심으로 이 시간을 즐기길 바랄 뿐이야.엄마도 어렸을 때 이런 기회를 가졌다면 어땠을까,가끔 생각하거든."
양육자 경력 십 년을 채우며 나를 키운 어른들의 삶을 떠올려보고,내가 키우고 있는 아이들의 생활을 들여다본다.세상은 절대적으로 더 풍족해졌지만,사람들은 여전히 상대적 결핍을 느낀다.
어린 시절,나 또한 내가 가진 것을 백퍼센트,룰렛 구매천퍼센트 만끽하고 살았듯,아이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사랑하고 누리기만 해도 양육자로서 더없이 행복할 것 같다.세상 모두를 가질 수 없고,제각각 누릴 수 있는 재화는 한정되어 있기에 아낌없이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헤아려 준다면,그것만으로도 참 고마울 것 같다.
아이들을 스키 수업에 보내며 나의 어린 시절 겨울을 떠올리는 나날을 보냈다.눈발이 흩날리고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하면 눈이 흔치 않았던 나의 고향도,외롭기 그지없던 서울도,그리고 미국 동부도 눈물 나게 아름답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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