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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 인터뷰 - 93세에 단편‘잘 가요’발표한 한말숙 작가
남편 故 황병기와의 삶 소설로
현실·환상 오가며 이야기 펼쳐
“서로 첫눈에 반한 영원한 애인”
고령에도 컴퓨터로 소설 쓰고
지인들과‘카톡’소통 능한데도
“안경 쓴 시력이 0.7이라 불편”
인터뷰 = 장재선 전임기자
“내 애인이며 남편이었던 황병기와의 63년에 걸친 일생을 압축한 작품입니다.우리나라 보편적 부부의 이야기일 겁니다.”
한말숙 작가는 지난 4월 문예지에 발표한 단편 소설‘잘 가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꿈속 이야기를 매혹적으로 펼쳐 놓은 작품이다.만 93세의 작가가 이런 작품을 써서 발표한 것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다.한 작가는 작년에도 단편 소설‘과일가게 할머니 사장’을 문예지에 발표한 바 있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데,일단 시작하면 벼락치기로 끝까지 갑니다.제 문장이 박력 있고 군더더기가 없다고 하는 이유일 거예요.”
서울 북아현동 한 작가의 자택에서 지난달 26일 만났을 때,그는 모든 질문에 또렷한 음성으로 답을 내놨다.그런데 대화할 때 보청기를 껴야 하는 것,안경 쓰고 시력이 0.7밖에 안 나와서 작은 글씨를 못 읽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그런 말 속에서 그가 나이에 비해 얼마나 건강하게 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10년 전 척추를 다쳐서 거동이 자유롭지는 못하지만,집안일을 돌봐주는 이가 둘 있어서 두루 괜찮아요.잘 먹고 잘 자는 편입니다.자식들과 자주 외식을 하거나 쇼핑을 합니다.숙명여중·고,서울대 동창들과 전화 통화하는 것도 좋아했는데,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대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 fc 라인업거의 타계해서 아쉽지요.2009년부터 회원인 대한민국예술원에는 1년에 서너 차례 갑니다.황병기음악 보존회 회원들과 자주 카카오톡 문자를 주고받고 식사도 합니다.무엇보다 후배 문학인들과 전화하거나 카카오톡 문자를 주고받는 게 큰 즐거움입니다.”
실제로 그가 카카오톡을 활발하게 사용한다는 것을 실감했다.대면 이후로 수차례 문자를 보내왔기 때문이다.인터뷰 전에는 취재·사진 기자가 집을 잘 찾도록 대문 사진을 전송해 주기도 했다.
그는 2018년 1월에 타계한 황병기 가야금 명인과 여전히 함께 살고 있는 듯했다.황 명인 이야기를 할 때면 조쌀한 얼굴에 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띠었다.호칭은‘황병기’와‘황 선생’을 넘나들었다.
“왜 그랬는지 만나자마자 서로 좋아했어요.황병기가 저보다 다섯 살 아래거든요.제가 서울대 졸업할 때 황 선생은 입학했어요.그런데 제가 워낙 동안이니 황 선생을 더 나이 들게 봤어요.만년필 가게 점원이 우리 둘을 앞에 놓고‘아가씨는 어려서 모르겠으나,아저씨는 이 제품을 잘 알 거다’고 해서 웃은 적도 있지요.”
그가 황 명인을‘애인이며 남편’이라고 표현한 데서 그들의 60여 년 동행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나는 워낙 주책바가지인데,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대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 fc 라인업그 사람은 신중했지요.아이들이 아빠를 더 좋아했어요.그 애정이 이루 말할 수 없지요.”
이들 부부의 2남 2녀 자녀 교육이‘방임형 성공작’이라는 것은 유명하다.아이들더러 공부하라고 한 적 없고,비바람이 불면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단다.그런데 큰아들(황준묵 기초과학연구원 복소기하학연구단장)은 수학계에서,막내아들(황원묵 미국 텍사스 A&M대 생명공학과 종신 교수)은 물리학계에서 세계적 석학이 됐다.큰딸(황혜경)은 국문학 박사이며,작은딸(황수경)은 명상심리 전문가로 동국대 겸임교수다.
“아이들이 모두 겸손을 타고났어요.그게 참 좋아요.” 자녀들의 겸손마저 자랑하는 모성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큰딸은 이전보다 더 자주 나를 찾아요.작은딸은 자기 집을 놔둔 채 아예 여기 들어와서 살고 있어요.아이들이 모두 효자인데 사위(김용범 전 기획재정부 차관)도 저에게 참 잘해요.공직에 있을 때 소신껏 일한 후 지금은 회사(해시드오픈리서치) 대표예요.늘 바쁘게 살면서도 주변 사람에게 덕 있게 베푸는 인격자지요.”
한 작가 부부는 서울 가회동에서 살다가 1974년 현재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당시 이화여대 총장인 김옥길 선생이 국악과를 만들기 위해 황 명인을 교수로 초대했기 때문에 이대 근처로 온 것이었다.
한 작가는 가회동에서의 추억 한 자락을 되살렸다.“아이들을 재동국민학교에 보낼 때,급우 중 밥을 굶는 아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도시락을 늘 4개 싸줬어요.그 이야기를 신문에 썼더니,육 여사(당시 영부인 육영수)가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굶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냐며….”
한 작가는 1992년 개축한 단독주택의 1층에서 주로 지내지만,매년 12월 19일 오후 9시 40분이면 2층에 올라가 서재와 거실 연주실,베란다 등을 찬찬히 둘러보곤 한다.황 명인이 2017년까지 거처하다 떠나간 곳이기 때문이다.황 명인은 그날 큰아들이 와서 병원에 가자고 하니 여느 때처럼 베란다 창문을 연 후 담배를 피우고 재떨이에 눌러 끈 다음 집을 나갔다.그리고 다음 달 타계했다.
“그 사람을 기리는 재단을 만들어 황병기 콩쿠르를 하고 싶어요.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탓에 궁리만 하고 있지요.그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니 서울시에서 나서주면 좋겠습니다.한국 음악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잖아요.”
황 명인은 타계 전해까지도 새로운 곡을 발표하며 예술혼을 불태웠다.미당 서정주의 시‘광화문’에 곡을 붙인 것이 마지막 작품이었다.
“미당 시에 곡을 붙인 게 세 개입니다‘국화 옆에서’와‘추천사’도 있지요.그 곡들을 미당에게 들려드리니 참 좋아하셨습니다.그런 인연으로 언젠가 선생 집에 갔는데,그 집에 가야금이 있더군요.제가 젊은 시절에 가야금 연주를 했기 때문에 산조를 들려드렸어요.그게 40분이거든요.그런데 한 번 더 해 달라고 하시는 거예요.그래서 한 번 더 했더니 사모님이 점심상을 내오시더군요.점심을 먹은 후 한 번 더 하라고 해서 또 한바탕을 했어요.저녁상을 내오시기에 할 수 없이 저녁을 먹었는데,연주를 또 하면 죽겠더라고요(웃음).”
한 작가는 미당과 또 다른 인연이 있다.노벨문학상 후보와 관련된 것이다.1993년 국제펜한국본부에서 한 작가의 장편 소설‘아름다운 영가’(후에‘아름다운 영혼의 노래’로 개명)를 후보로 추천한 뒷이야기다.노벨상위원회 요청을 받은 국제펜한국본부 선정위원들이 미당의 시 작품을 추천하려 했으나,미당이 “내 시는 아직 외국어로 번역된 게 없으니 이번엔 한말숙의 소설 작품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한 작가는 “노벨상위원회에서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나는 거기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고 했지만,문화일보는 국제펜한국본부 임원을 지낸 복수의 문학인에게 그의 작품 추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미당의 작품은 외국어로 번역된 후에 후보로 추천됐다고 한다.
“저는 12세 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줄리어스 시저’를 읽었어요.셰익스피어의 36권 전집을 다 읽고 세계문학전집을 통독했지요.그렇게 처음 문학을 접했으니,웬만한 작품은 못 읽어요.”
1957년‘신화의 단애’로 등단한 한 작가의 작품은 일찍 외국에 소개됐다.1959년 작‘장마’가 서울사대 김동성 교수의 번역으로 1964년 미국 뉴욕 반탐사의‘세계단편명작선집’에 수록된 것이 시초였다.그의 단편집은 프랑스어로 번역됐으며,폴란드어로는 두 차례나 옮겨졌다.
특히 1981년 작 장편‘아름다운 영가’는 영어,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폴란드어 등 9개 국어로 번역됐다.“1980년대에 폴란드 바르샤바대 조선문학과 과장이 내게 편지를 보내 번역을 해도 좋겠냐고 물었어요.스탬프를 보니 한 달 걸려서 왔더라고요.좋다고 답을 써서 편지를 보내면서 속으로 무척 떨었어요.당시는 동서 냉전 시대였잖아요.”
그는 프랑스어 번역판이 유네스코 대표 선집에 수록됐고,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대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 fc 라인업2011년 스웨덴어판은 현지 언론 서평이 아주 고무적이었다며 관련 자료들을 보여줬다.
‘아름다운 영가’가 해외에서 이처럼 주목을 받은 것은 일과 사랑을 병립시키려는 주체적 현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삶과 죽음,그리고 구원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특히 무속(巫俗)과 유교,불교,기독교가 어우러진 한국인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단순하고 일상적 어휘로 표현해내서다.
삶의 이면인 죽음의 문제는 요즘 한 작가의 화두이기도 하다.“인생은 만남의 연속인데,첫 번째 만남은 부모님이고 마지막 만남은 죽음입니다.죽음은 내 일생을 마무리해 주는 친구지요.”
그는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 보니 가족 이외에도 스승,친구,이웃이 모두 좋았다고 했다.돌아가신 친부모,시부모님께 늘 감사 기도를 하고,먼저 간 남편 사진을 보며‘고마웠어,사랑해’라고 말한다.
“내게도 세상 떠날 날이 가까이 오고 있는데,내 친구인 죽음에게 가끔 부탁해요.친구야,언제든 내가 지금처럼 행복한 중에 아픈 데 없이 가도록 부탁해.어느 날씨 좋은 날에!”
각별한 사이 박완서·박경리·천경자… “모두 눈물 나게 그립네요”
■ 한말숙 작가와 사람들
“성공에 대한 욕심 부리지 않아
주변에 좋은 지인들 많았던 듯”
“모든 게 팔자소관이에요.사람이 날고뛴다고 안 될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말숙 소설가는 일생을‘산 절로,수 절로’라는 태도로 살아왔다고 했다.기를 쓰고 성공하겠다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런 자신의 곁에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되돌아봤다.
서울 안국동의‘개화한 양반집’에서 태어난 그는 이름(末淑)에서 알 수 있듯 5남매의 막내였다.일제강점기 때 경상도 하동군수 등을 지낸 아버지(한석명)는 막내인 그를 무척 아꼈다.“아버지는 조선 말에 유럽과 러시아 유학을 했던 당신의 형(한길명)이 고종의 헤이그 특사로 이준 열사 통역을 했던 것 때문에 일본 경찰의 감시를 늘 받았다고 합니다.”
5남매의 맏이인 오빠 한복 씨는 당시 도쿄대 법대를 나온 수재로,광복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큰언니(한정숙)는 재미 수필가였고,둘째 언니(한무숙)는 소설가로 유명했다.셋째 언니(한묘숙)는 전쟁고아를 위한 활동을 했던 사회사업가였다.첫 남편과 헤어진 후 보육 시설을 운영하다 만난 유엔군 부산군수기지 사령관 리처드 위트컴 장군과 재혼했다.북한에 있는 한국군과 미군의 유해 송환 사업에 헌신했던 한묘숙 선생은 2017년에 타계했고,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묻혀 있는 위트컴 장군 옆에 합장됐다.
한 작가는 고 박완서 소설가와 숙명여·중고 동창이다.“완서는 늘 조용하게 문학책만 읽었어요.성적은 반에서 2,3번째 하는 수재였지요.졸업 후 20여 년간 소식을 모르다가 문단에서 다시 만난 후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친구였지요.”
한 작가는 강직한 성품의 박경리 소설가와도 가까이 지냈다고 회고했다.솔직하고 꾸밈 없었던 천경자 화가와도 친했다.“모두 모두 눈물 나게 그립습니다.”
그는 후배인 아동문학가 김율희 씨와 일상의 시시한 이야기까지 나누고 지낸다며 고마워했다.김 씨의 동화 작품‘코코코 나라’는 세계 시장에서 통할 거라며 깊은 애정을 표현했다.“유안진 시인,민지원 소설가와도 자주 연락하며 지냅니다.유인순 강원대 명예교수도 그런 사람이지요.제 작품을 영역한 수잔 크라우더 한(Suzanne Crowder Han),일역한 모토하시 요시코(本橋良子) 여사와도 가끔 소통합니다.”
△1931년 서울생 △서울대 언어학과 졸업(1955) △서울대 음대 강사(1959∼1974) △문화부 영화자문위원,신문윤리위원,방송자문위원(1964∼1984) △국제여학사협회 한국본부회장(1993∼1996)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1998∼2000)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2002∼2004) △대한민국예술원 회원(2009∼현재) △현대문학 신인상(1964),제1회 한국일보 문학상(1968),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대 브라이턴 & 호브 앨비언 fc 라인업보관문화훈장(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