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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렬 in 싱가포르] 싱가포르의 핑크닷,한국의 퀴어문화축제
지난 6월 29일,싱가포르 홍림파크에서 성소수자 축제인 '핑크닷' 행사가 열렸습니다.2009년에 첫 행사가 시작돼서 올해로 열여섯 번째 열린 이날 행사에는 수천 명의 성소수자가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함께 축하공연을 즐겼습니다.이 행사에는 장관과 국회의원들도 다수 참여해 성소수자들의 의견을 경청했습니다.한때 동성애가 처벌의 대상이었던 싱가포르에서 지금처럼 성소수자 축제가 공개적으로 열릴 수 있게 된 것에는,성소수자들의 오랜 투쟁의 역사가 숨어 있습니다.
구강성교를 금지했던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가 처벌의 대상이었습니다.동성애 처벌법의 시작은 영국의 식민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860년,당시 인도를 식민 지배하던 영국은 인도 형법에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성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377' 조항을 만들어 넣었습니다.이 법은 이후 식민지가 된 다른 나라에도 그대로 전파되었으며 싱가포르도 그중 하나였습니다.이 중 377A 조항은 남성 성인이 합의 하에 성관계를 갖는 것을 범죄로 규정했고,구강성교는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성행위 중 하나로 보고 금지했습니다.다만 성인 여성 간의 성관계는 명시되어 있지 않아 범죄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도 끝나고 1965년 싱가포르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 법은 계속 유지됐고,동성애 처벌의 근거가 됐습니다.그러다 2003년 11월,해안 경비대 소속 경찰이 한 여성과 구강성교를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 판결을 받는 일이 생겼습니다.이 사건 후 구강성교를 현대에도 계속 범죄시해야 하느냐 하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싱가포르 정부는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이 법률의 재검토에 나섰습니다.그리고 2007년,싱가포르 정부는 형법 개정을 통해 377조의 "자연의 질서에 반한 성관계"에 대한 처벌 조항을 삭제했습니다.이에 따라 구강성교가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이 아니게 됐습니다.하지만 그동안 성소수자들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던 성인 남성 간의 성관계에 대한 처벌 조항 철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성인 여성 간의 성관계를 처벌하는 조항은 없지만,합의 하에 이뤄진 남성 간의 성관계를 처벌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국가가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는 게이뿐만 아니라,다른 성소수자 모두를 차별하는 악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사회에서만 있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2019년에 있었던 일입니다.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완결편인 <스타워즈 : 더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가 싱가포르에서 개봉하면서 극 중 여성 둘이 입 맞추는 장면이 삭제됐습니다.문제가 된 장면은 모든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귀환한 전사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감격해하는 장면입니다.여성이 외계인과 포옹하고,남성이 다른 외계인과 볼을 비비고,남성 둘이 여성 한 명과 껴안는 장면은 문제가 안 됐는데,여성 둘이 기쁨의 입맞춤을 하는 그 짧은 장면만 문제가 된 겁니다.
이 장면이 그대로 나가면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을 받게 되니,임슬비배급사 측에서는 이 장면을 덜어내고 13세 이상 관람가를 받았습니다.법에는 남성 간의 동성애만 처벌대상으로 되어 있지만,실상은 여성의 동성애도 여전히 금기였던 것입니다.
동성애 처벌과 동성혼 합법화 사이
남성 간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을 만든 영국은 1967년 그 법을 폐기했고,2022년에는 해당 법으로 인해 과거 유죄판결을 받은 남성들을 일괄 사면하고 전과기록을 삭제했습니다.2014년에는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에서,2020년에는 북아일랜드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됐습니다.
식민지 시절,영국에 의해 동성애 처벌법이 강제된 인도 역시 2011년 인구조사 양식에 남성과 여성 외에 '제3의 성별' 카테고리를 포함시켰고,2018년에는 동성애를 처벌하던 형법 377조항의 일부를 폐지하는 등 동성애에 대한 태도를 바꿨습니다.
애초에 동성애 처벌법을 만든 영국은 진작에 그 법을 폐지했고,그 법이 처음 적용됐던 인도마저 그 법을 버렸는데,싱가포르는 최근까지도 그러지 못했습니다.싱가포르의 성소수자들은 남성 간의 성관계를 처벌하는 377A 조항을 폐지하기 위해 온라인 청원 사이트를 만들고,집회와 시위가 엄격하게 통제되는 싱가포르에서 집회 성격의 핑크닷을 2009년부터 매년 개최했습니다.첫 번째 핑크닷은 미국 국무부의 인권 보고서에 포함될 만큼 주요하게 다뤄졌습니다.이후 377A 조항 폐지를 위한 법정 다툼이 2010년 이후 다섯 번이나 있었습니다.
구강성교에 대한 처벌이 폐지된 지 15년이 지난 2022년,당시 총리였던 리셴룽은 내셔널데이 연설에서 377A 조항이 폐지되고 더 이상 동성애로 인한 처벌은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이후 동성애 처벌 조항을 삭제한 새로운 법안이 제출되고 다음 해 1월에 공표됐습니다.이로써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동성애에 대한 처벌법이 싱가포르에서 사라진 겁니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의 요구가 모두 받아들여진 것은 아닙니다.싱가포르 정부는 동성애 처벌법인 377A 조항을 폐지하는 대신,임슬비결혼의 정의를 "남성과 여성의 결합"으로 규정하는 헌법개정을 실시했습니다.동성애는 처벌하지 않지만,동성혼까지 인정할 순 없다는 겁니다.결혼을 하면 보조금을 줘가면서까지 아파트를 저렴하게 공급하고,각종 지원금을 가족 단위로 지급하는 싱가포르에서 법적 결혼을 인정받지 못할 경우 받게 될 차별은 상당합니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동성애를 범죄 혹은 사실상의 범죄로 간주하는 국가는 62개국에 이릅니다.반면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국가는 36개국에 불과합니다.싱가포르는 동성애를 범죄로 보는 국가에서는 벗어났지만,임슬비아직 법적 결혼을 인정하는 나라에는 속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핑크닷 행사장에서 만난 참가자들은 동성혼이 합법화되어 사실상 성소수자에게 가해지는 모든 차별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목소리를 높이겠다고 입을 모았습니다.행사장에서 만난 성소수자들은 모두가 표정이 밝았습니다.사랑에 빠진 사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행복 에너지가 행사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핍박당하는 한국의 성소수자 축제
한국에서도 핑크닷과 같은 성소수자 축제가 있습니다.2000년 서울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처음 열렸으니,싱가포르의 핑크닷보다 더 오래된 행사입니다.처음엔 서울에서만 열렸던 퀴어문화축제는 2009년 대구에서도 열렸고,그 후로 부산,전주,임슬비인천 등 각 지역에서도 열리고 있습니다.
싱가포르 정부의 협조와 여러 기업의 후원으로 축제 분위기에서 열리는 핑크닷과는 달리 한국의 퀴어축제는 매번 지자체의 비협조와 보수단체의 방해로 축제가 곧 투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지난 6월 1일 개최된 서울 퀴어축제는 서울시가 서울광장 사용을 막는 바람에 을지로에서 열렸는데,보수종교단체가 맞불집회를 열어 축제를 방해했습니다.
오는 7월 6일에는 충청권에서 처음으로 퀴어축제가 열립니다.대전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6일 대전역 인근 소제동 일대에서 '사랑이쥬-우리 여기 있어'를 슬로건으로 제1회 대전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한다고 밝혔습니다.대전시장은 퀴어축제를 반대하고 있고,보수단체도 방해를 목적으로 하는 맞불집회를 예고했습니다.
성정체성을 이유로 성소수자를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이 개화된 사회의 보편적 상식이고,동성혼 합법화가 선진 세계가 가리키는 올바른 방향입니다.대전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가 지자체와 보수단체의 방해를 이겨내고,모든 종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진정한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