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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아너 소사이어티] [2] 현대사 아픔 겪은 88세 양한종씨
“해방 직후 북으로 건너간 아버지의 잘못된 선택이 평생 한(恨)으로 남았습니다.작은 돈이지만,북에서 내려온 이웃들이 우리 대한민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는 데 보탬이 됐으면 합니다.”
지난 13일 서울 강서구의 한 실버타운에서 만난 양한종(88)씨는 자신의 기부에 대해 거듭 “내 나라를 위한 작은 봉사일 뿐”이라고 했다.그는 지난 7월 사랑의열매에 “탈북민 지원을 위해 써달라”며 10억원을 기부했다.2007년 이후 사랑의열매에 1억원 이상 기부한‘아너 소사이어티’회원 3500여 명 중에서도 10억원 이상을 기부한 이는 그를 포함해 35명뿐이다.
양씨는 1970~80년대 서울 중구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주점으로 유명했던‘산수갑산’사장이었다.언뜻 성공한 사업가의 평범한 기부로 보이지만,그의 기부엔 굴곡진 대한민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온 회한이 서려 있다.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 직후 아버지의 월북으로 가족은 찢어졌고,알나스르6·25전쟁 후엔 지독한 가난을 겪으며 동생 둘을 잃었다.
양씨는 “열다섯에 가장이 된 후 미군 부대 심부름꾼으로 시작해 악착같이 살았다”며 “재벌도 부자도 아니지만,알나스르내 작은 도움이라도 필요한 이들이 있을 것 같아 생애 마지막 기부를 결심했다”고 했다.
양한종씨는 자신의 삶을 “한 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찰 만큼 너무나 가혹했다”고 했다.그는 “북을 좇은 아버지의 이념 때문에 집안은 처절하게 몰락했고,나는 평생을 질곡 속에 살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던 양씨의 부친은 조선신탁주식회사 철원 지점장,해방 직후엔 조선신탁은행 대전 지점장 등을 지낸 사회주의 엘리트 지식인이었다.그런 아버지가 1947년 어머니와 양씨 등 6남매를 대전에 남겨둔 채 홀로 월북했다.양씨가 열한 살 때 일이다.그는 “곧 우리 가족은 판잣집 단칸방에서 멀건 비지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친척들까지 손가락질받으며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고 했다.
6·25전쟁은 더 큰 시련이었다.이복형제인 큰형 양한상씨는 전쟁 중 북으로 건너갔다.1950년 늦가을,4살·6살 동생이 이질(痢疾)을 앓다 한 달 새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양씨는 “동생들 시신을 헌 가마니에 둘둘 말아 안고 뒷산에 묻은 그때의 눈물은 74년이 흐른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며 “무작정 아버지를 찾겠다며 가출해 강원도 춘천까지 갔다가 소양강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도 했다”고 했다.양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 고인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지만,어떻게든 어머니와 남은 두 동생을 건사해야 하는 가장이었다.나이 열다섯에 서울로 올라와 방산시장 근처에서 일거리를 찾았다.미군 부대에서 나온 맥주·담배·군복 등을 받아 팔아주는 심부름 장사를 시작했다.양씨는 “영어도 못하는 열다섯 살짜리가 손짓 발짓 해가며 사정하니,불쌍하고 귀엽게 봐준 미군들이 물건을 더 많이 맡겨줬다”고 했다.
군에 다녀온 뒤 1964년부터는 다방 사업을 시작했다.클래식과 가곡을 틀어주는 세미클래식 다방‘로댕의 집’을 운영하다가 1973년 서울 중구에서 클래식 연주자들이 직접 연주를 들려주는 주점‘산수갑산’의 문을 열었다.몇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문화예술계 인사들 사이에 품격 있는 클래식 음악 주점으로 소문이 나면서 성공을 거뒀다.양씨는 “내 힘든 삶의 탈출구가 음악이었고,특히 클래식·가곡을 정말 좋아했다”며 “가곡이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안식처를 꿈꾸며 창업했고,알나스르매년 불우 이웃 돕기 성금 모금을 위한 자선 음악회도 열었다”고 했다.산수갑산은 1983년 문을 닫았지만,그는 이후 제주에 운전면허 학원을 세우는 등 사업가로 살았다.
그런 그에게 잊을 수 없는 해가 2000년이다.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방한한 북측 가족 중 6·25전쟁 당시 월북했던 다섯 살 위 큰형 양한상씨가 포함돼 있었다.양한종씨는 “정부 측 통보에는 형님이 (남쪽에 있는) 의붓어머니는 물론 아버지를 찾는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며 “가족 모두 아버지가 북에 계신 것으로 알고 살아왔는데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대한적십자사를 찾아가 몇 번이나 확인했다”고 했다.그는 “지병(췌장염)이 있던 아버지가 전쟁 중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된다”며 “아버지 당신에게는 물론 남은 가족 전체의 비극”이라고 했다.
2000년 8월 서울 코엑스와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양한종씨와 동생들은 50년 만에 큰형 양한상씨와 재회했다.그때 함께 찍은 사진 액자가 지금도 양한종씨 집 거실에 걸려 있다.그는 액자를 가리키며 “여윈 몸으로 나와 동생들 손을 일일이 잡아주던 형님의 체온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했다.
당시 형 양한상씨는 동생들을 붙잡고 친어머니나 다름없는 의붓어머니인 한종씨의 어머니를 꼭 뵙고 싶다며 울부짖었다.87세 고령이던 어머니는 지병 때문에 상봉장에 나올 수 없었다.남북 당국 간 합의 때문에 한상씨가 어머니의 서울 마포구 자택을 방문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그러다 김대중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어머니를 제3 장소인 신촌 세브란스병원 병실에 입원시키는 방식으로 양한상씨가 평양으로 돌아가기 6시간 전 약 40분간 극적인 모자 상봉이 이뤄졌다.아들의 큰절에 “왜 이리 늦었느냐”는 어머니의 첫인사,알나스르떠나는 아들을 향해 “가지 마라.날 두고 어디 가느냐”는 어머니의 마지막 인사에 온 가족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양한종씨는 “형님이‘이제 해마다 와서 어머님을 뵙겠다’고 했는데,어머님은 3년 뒤인 2003년 90세에 돌아가셨다”며 “형님과 헤어지기 직전,통일이 되면 다 같이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가자고 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어머니는 이듬해 서신 교환 대상자가 돼 북으로 돌아간 큰아들에게 편지도 썼지만,답장을 받지 못했다.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찍은 자식들 사진을 머리맡에서 한 번도 치우지 않았다고 한다.
양씨의 가족으로는 현재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 이연미(79)씨와 3남매가 있다.그는 “자식들에게 내가 겪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평생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알나스르늘 아끼며 악착같이 살았다”고 했다.그러면서도 장학재단 기부 등을 꾸준히 이어왔다.양씨는 “고된 삶이었지만,이만큼 살 수 있게 된 건 많은 분의 도움 덕분이었고,눈감기 전 꼭 그 도움을 다른 이들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2018년부터 기부처를 찾다 작년 말 사랑의열매 측에 연락했다.올 7월 10억원을 기부하며 “정착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탈북민 등을 위해 써달라”고 했다.
양씨는 “우리 국민이라면 많이 배운 사람도,나처럼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도 이렇게 잘사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뤄냈는지만큼은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그는 “이곳은 북한과 달리 스스로 열심히 노력한 만큼 잘살 수 있는 곳이고,크게 성공한 삶은 아니지만 내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며 “우리 모든 세대가 자부심을 갖고 이 소중한 대한민국을 다 함께 꼭 지켜나가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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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나 했는데 그 장면 때문이었다.
알나스르,AP뉴시스뉴욕증시가 지난해와 다른 흐름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