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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기자들과 만나 요즘 한국 상황에 관해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기억에 남는 이야기 중 하나가 요즘엔 팩트체크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그렇다.우리는 거짓과 진실의 구별이 중요치 않은 시절을 살고 있다‘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믿는다’혹은‘나는 내가 믿고 싶은 정보를 나 스스로 창조한다’가 이 시대의 규칙이다.그게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별 상관이 없다.생각해 보면 충격적인 일이지만,우리는 이미 이 새로운 규칙에 익숙해지는 중이다.
이른바‘레거시 언론의 위기’는 이미 식상한 이야기가 됐다.우리는‘위기’이전의 시대를 기억하기도 힘들다.그럼에도 지난 10년간 팩트체크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거짓을 규탄하고 진실을 밝히는 일의 가치를 부정할 수는 없고,바로 여기에 언론의 첫 번째 존재 이유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부정할 수 없다고 믿었던 가치마저 노골적으로 부정당하고 있다.언론의 위기는 또 다른 위기로 대체되고 있는데,이는 단지 언론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료 구독 서비스의 가능성
뉴스 콘텐츠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다.프랑스와 한국의 언론 기사를 동시에 소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 두 나라의 차이를 하나 꼽으라면,나는 유료 구독 서비스를 말할 것 같다.프랑스에서‘일간지’로 분류되는 언론의 상당수가 유료로 디지털 기사를 제공한다.한국에도 유료 구독 모델을 도입한 언론이 적지 않지만,돈을 내지 않아도 거의 모든 기사를 읽을 수 있다.프랑스에서 돈을 내지 않으면,단순 정보를 전달하는 일부 기사만 볼 수 있을 뿐,기사 대부분에 접근할 수 없다.그래서 적지 않은 프랑스 독자가 디지털 기사를 유료 구독한다.인터넷 르몽드(Le Monde)의 구독자는 약 41만명이고,르피가로(Le Figaro)의 구독자도 20만명 이상이다.가장 강력한 여론 주도력을 가진 좌파 언론은 메디아파르트(Mediapart)라고 할 수 있는데,2008년에 디지털 언론으로 설립돼 지금은 약 22만명의 유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런 전면적인 유료 구독 모델이 실현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독자들이 언론을 더 신뢰해서,콘텐츠에 지갑을 여는 데 익숙해서,기사의 수준이 더 높아서 등 여러 방식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그래도 비용 지출은 누구에게나 부담이다.프랑스 언론 두 곳을 구독하면 한 달에 3만~4만원 정도 나가는데,모든 독자가 이걸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그래서 유료 구독에 대한 불평은 여기저기서 쉽게 들을 수 있고,각자가 구독하는 기사를 공유하기 위한 비공개 SNS 그룹도 많다.
생각해 보면 유료 구독 서비스가 가능한 이유는 단순하다.돈을 내고서라도 반드시 기사를 읽어야만 하는 독자의 규모가 일정 정도 이상이기 때문이다.한국에 전면적 유료 구독 모델이 도입되기 어렵다면,그 이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한국 독자 중에 돈을 내고서라도 언론 기사를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물론 적지 않겠지만,그 수가 언론사를 운영하기에 충분할지는 모르겠다.
언론의 존재 이유
현대인은 왜 언론 기사를 읽는가?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모두가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하나의 사회가 유지되려면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것들이 필요한데,거기에는 공통의 지식과 정보도 포함된다.언론은 자신만의 특수한 관점에서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지만,밀워키 카지노 호텔그것을 사회 공통의 지식과 정보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이게 흔히 알고 있는 언론의 교과서적 기능이기도 하다.
언론의 생산물은 다양한 수준을 포괄한다‘어제 어디에서 사고가 났다’는 단순 사실도 있고‘어제 발생한 사고는 국가 정책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한 것이다’라는 식의 심층 분석도 있다.프랑스에서는 이런 두 유형의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꽤 명확히 분리돼 있다.무료 방송 매체는 첫 번째 유형을,일간지는 주로 두 번째 유형을 제공한다.유료 구독을 하는 독자들은 두 번째 유형,카지노 디즈니+즉 전통적 의미의 저널리즘이 필요한 사람들이다.비판적이고 분석적인 글을 읽는 것이 사회 구성원의 필수 조건으로 간주되는 곳에서만,정확히 말하자면,그렇게 간주하는 독자가 일정 규모 이상인 곳에서만 유료 구독 모델이 실현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언론을 비판하고 기자를 욕하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여겨지는데,그전에 사회적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수많은 독자가 자기 믿음을 지지해 주거나,자신이 증오하는 대상을 비난해 주는 언론을 원한다.다수가 생각하는 언론의 기능은 공동체의 유지가 아니라 자기 진영이나 분파의 목소리를 대변해 주는 것 아닌가?그래서‘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언론이 다른 모습을 보이면 독자들은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고유한 의미의 저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독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애초에 저널리즘 텍스트를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한국사회에 존재하는가?사회 구성원이 되려면 공통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는 원리가 한국에서도 유효한가?돈을 주고 기사를 읽으려는 독자가 소수라는 사실은 언론의 기능 자체에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상황은 더 나빠지고 있다.팩트체크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새로운 단계의 도래,즉 공통의 지식에 무관심한 정도를 지나 공통의 것을 적극적으로 파괴하는 시기가 시작됐음을 의미한다.거짓과 진실의 구별은 다른 사회 구성원과 대화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조건이다.거짓을 배제하자는 규칙이 합의되지 않으면 그 어떤 사회적 관계도 불가능하다.지금 한국사회 구성원의 상당수는‘내가 믿는 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공통의 규칙을 파괴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결국 한국에는 두 유형의 독자만 남은 것처럼 보인다.한쪽은‘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언론’을 찾고,다른 한쪽은 언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며 스스로 거짓 정보의 생산자가 되려 한다.
한국 언론은 제 갈 길을 잃어버리고 있다.이는 언론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그동안 한국사회는 언론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축소해왔고,이런 경향은 결국 극단적 형태에 이르렀다.이제 언론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아니 그전에,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는 언론을 향한 질문이면서,독자를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우리는 이것을 한국사회의 존속 가능성에 관한 질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언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은 사회의 공통 기초가 무너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