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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국민을 비국민으로 몰아냈던,현대 국가권력의 무도함
국가가 국민들을 반국가세력으로 매도하는 것도 무도하지만,국민들을 반국가세력도 아닌 비국민으로 분류해 격리하고 탄압하는 것도 무도하다.2017년에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6집에 실린 박숙자 경기대 교수의 논문 '해방 후 고통의 재현과 병리성 – 반공체제 속 부랑자와 비국민'은 "1960년을 전후한 시기에 국민-비국민을 구별·대립시키는 통치 기제에 따라 비국민이 호명·양산되었는데,특히 '부랑하는 자'가 정화되어야 하는 비국민의 표상으로 단속 대상이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비국민에 대한 그 같은 억압을 보여주는 것이 지난 26일 진실화해위원회가 중대 인권침해로 판단하고 진상규명을 결정한 영화숙·재생원 사건이다.이른바 부랑인 수용시설인 영화숙(永華塾)과 재생원에 갇힌 이들은 정치권력의 필요에 따라 사회와 분리된 사람들이었다.국가를 장악한 소수는 그들을 국가운영의 걸림돌로 파악하고 사회와 단절시켰다.그런 뒤 그들의 인권과 기본권을 짓밟았다.사실상 '비국민'으로 취급한 것이다.
부산시와 경찰의 협력.이것은 국가폭력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6일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영화숙·재생원이 1962~1971년 부산 지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집단수용시설로,부산시와 재단법인 영화숙이 부랑인 선도(수용보호) 위탁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라고 한 뒤 그곳의 대표적 인권침해를 이렇게 정리한다.
"진실규명대상자 181명은 경찰 및 영화숙·재생원 자체 단속반의 불법·과잉 단속으로 강제 수용된 후 열악한 생활 여건 속에서 강제노역,구타 및 가혹행위,성폭력,교육받을 권리 등 인권을 침해당했고,영화숙·재생원이 폭행 및 질병 등으로 사망한 원생의 시신을 주변 야산에 암매장한 사실을 확인했다."
영화숙에는 18세 미만,토토로 색칠하기재생원에는 18세 이상이 수용됐다.위 보도자료와 함께 배포된 PPT(파워포인트 자료)에 따르면,영화숙은 1951년 3월 6일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에 설치됐다가 1961년에 장림동으로 이전했다.이듬해부터는 부산시로부터 재생원 운영도 위탁받았다.
영화숙은 1956년에 보건사회부 허가를 받아 재단법인이 됐다.그래서 여기서 벌어진 인권침해는 외형상 국가와 무관해 보이지만,실상은 국가의 관여하에 이뤄졌다.그곳의 인권침해는 국가폭력이고 국가범죄였다.
영화숙 부지인 동대신동 3가 산17번지는 국유지였다.이곳을 임차해 첫 출발을 한 영화숙은 부산시와의 협력 관계 속에서 운영됐다.1961년 12월 15일자 <경향신문> 3면 좌중단은 "부산시는 갑자기 추워진 12일 밤부터 추위로 방황하는 거리의 노숙자들을 모아 13일까지 1백 50명을 부산시 장림동 영화숙과 구포 천애원에 각각 수용했다"라고 보도했다.
부산시와의 협력은 영화숙의 덩치를 키웠다.2021년에 <사회와 역사> 제129집에 실린 사회학자 김일환의 '지역에서의 부랑인 수용과 민간 사회복지'라는 논문은 "재단법인 영화숙은 부산시로부터 성인 부랑인 수용시설 재생원의 운영 역시 위탁받았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후 재생원은 수용인원 규모 800여 명에 달하는 대형 시설로 빠르게 성장했고,실시간 바카라 산타카지노메이저부산에서 단속된 부랑인들을 일차적으로 수용한 뒤 일부 집단을 여타 시설이나 개척단 등지로 이송하는 거점으로서 기능했다"라고 설명한다.
영화숙의 인권침해에는 경찰도 관여했다.진실화해위 보도자료는 "경찰은 단속 및 수용 과정에서 아동의 부모 등 연고자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채 강제로 영화숙·재생원에 수용하는 등 위법한 공권력을 행사"했다고 지적한다.
영화숙은 부랑인들을 모으고자 길거리에서 자체적인 불법 단속도 벌였다.그렇지만 국가권력의 제지는 없었다.이런 부작위 역시 당연히 국가범죄다.영화숙의 범죄는 국가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
그런 유기적 관계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국가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도리어 내쳐지도록 만드는 데 활용됐다.부랑자로 규정된 이들은 격리돼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감싸안아져야 할 사람들이었다.그런데도 국가권력은 영화숙을 앞세워 그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냈다.
위 박숙자 논문은 "이들은 우범성이 높다는 이유로 단속·격리 대상으로 지목되었는데,전후 부랑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개 경제적·역사적·정치적 격변에 따라 양산된 월남민·이촌민·탈향민·이산민 등으로 이들은 엄밀히 말해 정치적·경제적 난민과 다를 바 없었다"라고 말한다."하지만 이들은 국가의 경계를 위협하는 적대적 요소로 인식되었고,이에 따라 병원·감옥·보호소 등에 격리 조치되었다"라고 논문은 기술한다.
노예노동에 시신 암매장.무도하고 무책임했던 국가
국가권력은 그런 일을 벌이면서 복지라는 명분을 들이댔다.하지만 복지와 무관했다는 점은 영화숙에서 자행된 일들이 증명한다.위 PPT는 "꽁보리밥·수제비·옥수수죽이 제공되었으나 턱없이 부족해 모든 원생이 배고픔을 호소"했다며 "돼지사료(일명 꿀꿀이죽),진흙(일명 쫀드기),개구리,뱀,소나무 껍질 등을 닥치는 대로 먹었"다고 알려준다.
구타를 비롯한 가혹행위에 더해 노예노동도 있었다.PPT는 원생들이 시설 내 작업 현장은 물론이고 장림동 개간사업과 축산업·농업에도 투입됐다고 설명한다.또한 위 보도자료는 "원생들을 낙동강 하구 개간지 매립 작업,대운동장 조성 작업,축사 관리,농작물 재배 등 각종 무임금 강제노역에 동원했는데,대규모 공사가 있던 시기에는 10세 전후 아동까지 동원했다"라고 고발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중노동하고 가혹행위까지 당했으므로 건강 상태가 양호할 리 없었다.그래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PPT는 "구타 및 가혹행위·질병으로 사망한 원생을 보충대 주변 뒷산에 암매장"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증언을 실었다.간부의 지시하에 원생들이 암매장 작업에 동원되고,"소대장이 협박 목적으로 시신 암매장 장면을 일반 원생들에게 노출"하기도 했다."너희도 말을 안 들으면 저렇게 된다"라며 억지로 지켜보게 했다고 한다.
암매장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원생은 24명이고,암매장에 참여했다고 증언한 원생은 7명이다.암매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한 원생도 82명이나 된다.암매장이 사실상 공공연히 자행됐던 것이다.
PPT에 따르면 국가는 1967년에 그곳 원장에게 문교부 사회교육유공자상을 수여했다.하지만,인권침해 실상이 세상에 알려져 문제가 되자,1976년에 영화숙재단법인 설립인가를 취소했다.
이렇게 발을 뗐다고 국가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암매장 유해를 발굴하며,피해자 트라우마 치유 계획을 수립하고 보상·재활 서비스 대책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또 권위주의 시기의 집단 수용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것도 권고했다.
영화숙 등에 수용된 이들은 세상의 관심과 연대를 더 많이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다.그런데도 국가권력은 그들을 비국민으로 취급하고 인간 이하로 대우했다.영화숙·재생원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은 사회적 약자들의 상처를 외면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이들을 격리하고 짓밟고 죽이기까지 했던 현대 국가권력의 무도함을 다시금 상기시킨다.